소설리스트

전남편이 부임했다-48화 (48/60)

전남편이 부임했다 48화.

“……둘이 사귑니까?”

그걸 이제 알았냐. 송준과 보나가 김샜다는 듯 맞잡았던 손을 휙 떨어뜨렸다.

풋. 나정은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조금 멋쩍어진 태주가 표정을 바꾸고 그녀를 바라봤다.

“…….”

“…….”

눈이 마주친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오갔다.

‘태주 씬 늘 바빴고, 날 돌아봐 줄 여유가 없었어요. 그날도 출장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였어요. 마침 재영 씨가 당신을 만나러 왔었고…… 그날, 같이 와인을 마시다 충동적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어요.’

‘……정말 그게 다야?’

어젯밤 대화를 떠올린 나정은 왠지 가슴 한편에서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왜 갑자기 삼 년 전 그 일을 끄집어낸 걸까. 태주 씬 뭐가 불안한 걸까. 아니. 사실 불안한 건 나 아닌가.

나정의 눈빛이 혼란하게 떨렸다.

“깡나정 씨. 아침은 꼭 먹고 출근하기 바랍니다.”

그때였다. 된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게 연인 간 애정의 척도라고 오해한 모양이다. 태주가 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한마디를 고고한 표정으로 내뱉고는 현관을 나섰다.

“또, 똥준 씨 방금 들었어요? 깡나정이라니, 우리가 졌어요…….”

“내 친구한테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졌네요, 우리가…….”

보나와 송준이 혀를 내둘렀다.

나정은 다시 옆집으로 멀어지는 발소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

“더 이상 사고 칠 생각 말고 당분간 나가 있어.”

한남동 자택. 노성훈 대표가 여진에게 비행기 티켓을 건넸다.

유례없는 대통령 게이트에 단단히 꼬리를 잡힌 노성훈 대표는 요 며칠 회사가 쑥대밭이 되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생생히 목도 했다. 이 모든 일이 여진으로부터 비롯됐다 생각하니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꼴도 보기 싫었다.

“곧 특검 뜨고 검찰에서 압수수색 들어가면 한동안 회사며 집까지 시끄러워질 거다. 당장 필요한 것만 꾸려서……,”

지익. 직. 여진이 아버지의 면전에서 비행기 티켓을 찢었다.

노성훈 대표가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부라렸다.

“너, 너 지금……,”

“내가 왜 떠나야 하죠? 아버지?”

“몰라서 물어! 지금 너 때문에 회사가 완전히 끝장나게 생겼어!”

“말은 바로 해요. 내가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죠.”

“뭐야?”

“아버지가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았으면 태주 씨한테 약점 잡힐 일도 없었겠죠? 결국 아버지 가 자초한 거네요, 이번 일.”

“저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노성훈 대표가 손을 치켜들었다.

“여보! 안 돼요!”

이영은 여사가 재빨리 딸을 막아섰다.

“우리 여진이가 대체 뭘 잘못했어요? 나정이 걔가 원흉이지! 애초에 걔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여진이, 지금쯤 태주랑 결혼해서……,”

“닥쳐! 당신은 모르면 입 다물어!”

노성훈 회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당신이나 나나 자식 교육 완전히 망쳤어. 쟤가 강나정이한테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아!?”

“그 짓, 나 혼자 했어요?”

여진이 아버지를 향해 다가섰다.

“결국 삼 년 전에 내 뒷수습을 해준 게 누구지? 아버지예요. 내가 한 짓이 걸리면. 아버지 인생도 끝이라고.”

상체를 기울인 여진이 노 대표의 귓전에 은밀한 말을 흘려 넣었다.

“같이 걸려 들어가기 싫으면, 나한테 협조해요.”

“뭐?”

“다시 한 번 도와달라고요. 이번에야말로 나정일 태주 씨한테서 떼내야겠어요. 아버지가 한 번만 더 정 박사님 만나서……,”

철썩! 노성훈 대표가 말을 잇던 딸의 뺨을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여진이 이내 꿈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 넌 사람 새끼도 아니야. 나가.”

“네…… 꺼져 드리죠.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요.”

“여, 여진아!”

여진이 어머니를 밀쳐내며 자택을 나섰다. 오른쪽 뺨에 선명한 손 자욱이 보였다.

“이제 그만 하시죠.”

잠시 후, 김 비서가 차에 올라탄 여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태주 총지배인이 강나정에게 프러포즈를 했답니다.”

“뭘 해? 프러포즈?”

뒷좌석에 앉은 여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김 비서는 그녀에게 말없이 사진들을 건넸다.

받아든 사진 속엔 그림처럼 예쁜 해안가의 단독주택이 찍혀있었다. 그 집에서 함께 나오는 태주와 나정의 모습도.

“강나정에게 집을 선물한 것 같습니다.”

“집을?”

여진의 손안에서 사진들이 구겨졌다.

‘여진아. 나랑 결혼하자.’

늘 꿈꿔왔던 상상이,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프러포즈? 내가 아닌 다른 여자한테 프러포즈를 했다고?

“겨우 강나정 따위한테……?”

여진이 피식피식 작게 실소했다. 그러다 이내 차가 떠나가라 웃어젖혔다. 김 비서와 운전기사가 당혹한 눈길로 여진을 돌아봤다.

“하하, 하…… 하아.”

한참 속 시원히 웃고 난 여진은 이내 숨을 골랐다.

“아버지가 안 도와주시면, 나 혼자서라도 하는 수밖에.”

“네?”

“차 돌려요. 정 박사님 만나러 가야지.”

***

사랑하는 이의 죽음, 배우자의 외도, 그 밖의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이들이 기억을 제거하기 위해 찾는 곳. Memory loss organ.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진과 마주 앉은 정원표 박사의 낯빛이 어두웠다. 그는 여진을 경계하고 있었다. 삼 년 만에 안부나 묻자고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닐 테니.

“우리 아버지가 이 연구소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했어요. 알고 계시죠.”

“…….”

“J그룹이 아니었다면, 박사님의 논문은 진작에 파쇄기 행이었겠죠?”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정박사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전히 급하시다니까. 여진이 의자 등받이에 지그시 등을 기댔다.

“삼 년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미 한 번 기억을 지운 사람은 절대로 다시 기억 소거술을 받을 수 없다고. 만약 다시 시술받게 되면, 부작용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요.”

“…….”

“박사님이 말씀하신 그 부작용이라는 게 뭐죠?”

여진의 눈이 번득였다. 정 박사는 마른 침을 삼켰다.

“기억을 제거한 의뢰인에게 다시 같은 충격을 주게 되면, 신경회로에 과도한 충격이 가해집니다. 그로 인해 모든 기억을 잃거나, 혹은 측두엽 피질 내측에 페이크 메모리가 심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페이크 메모리?”

“기존 기억에 가짜 기억이 침투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부작용이 발생하면, 의뢰인은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만들어진 기억인지 스스로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흐음. 여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말씀하신 기계가 필요해요. 나한테 넘겨요.”

“예? 하지만……,”

여진의 눈짓을 받은 김 비서가 책상 위에 돈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을 열자 빼곡히 들어찬 오만 원권 지폐가 보였다.

“박사님. 우리 쉽게 가요. 이게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길이에요. 우린 이미 삼 년 전에 한 배를 탄 사이잖아요?”

의미심장한 말에 정박사가 갈등하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다시 충격을 주려는 게, 부부 중 어느 쪽입니까?”

“그건 알 필요 없어요.”

여진이 해사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얼마 만이야, 우리가 같이 퇴근하는 게? 카, 너무 좋다! 나정아. 집에 가서 간단하게 치맥할까? 아님 피맥?”

성격 급한 보나는 호텔 로비를 나서기도 전에 이미 배달 어플을 뒤지고 있었다.

“강 주임.”

그때였다. 익숙한 중저음에 고개를 돌리자, 로비를 가로질러 오는 태주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보나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우 총이 짧은 묵례로 화답하고는 곧장 나정에게 돌아섰다.

“오늘. 어디로 퇴근합니까.”

“네?”

순간 나정의 낯빛이 홍조로 물들었다.

“아…… 숙소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집에서 보죠.”

집, 그 한 글자가 왜 이렇게 가슴을 간질이는지.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저녁은.”

“그럼 저녁은.”

태주와 나정이 동시에 운을 뗐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저녁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아뇨. 그냥 제가 준비할게요. 사 먹는 것보다 맛은 없겠지만 그래도 집에서.”

“누가 사 먹재?”

순간 나직한 속삭임이 나정을 파고들었다.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려.”

“……아. 네. 응.”

나정의 입에서 요상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이내 태주가 상체를 비틀어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자꾸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너네 나 몰래 살림 차렸냐?”

태주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보나는 기다렸다는 듯 나정을 추궁했다.

“아니, 그게…… 집에…… 어, 집이…….”

“집 뭐. 우 총이 같이 살 집이라도 구해놨대?”

켁! 나정이 사레가 들려 콜록댔다.

“어휴. 너어는 진짜. 어디 가서 거짓말은 하지 마라.”

보나가 그런 나정을 다독여주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호텔과 꽤 떨어진 도로변에 서 있었다.

“난 여기서 택시 타고 갈게.”

“치. 잘 가. 사요나라…… 치맥은 나 혼자 해야겠네.”

보나가 투덜대며 돌아섰다. 뒤에서 나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히 삐진 척, 불쌍한 척 걸음을 내디뎠다.

끼이익!

그때였다. 아스팔트에 바퀴 갈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흠칫한 보나가 뒤를 돌아봤다. 번호판이 없는 승합차에서 내린 남자들이 나정을 붙잡아 뒷좌석에 던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 나정아……?!”

뭔가 손을 써볼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나정아! 강나정! 순식간에 나정을 집어삼킨 승합차가 도로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정이 끌려간 곳은 CCTV조차 제대로 설치돼있지 않은 허름한 무인텔이었다.

“뭐 하자는 거냐고 노여진.”

낯선 승합차에 자신을 태웠던 남자들은 여진이 고용한 심부름센터의 직원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