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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49화 (49/60)

전남편이 부임했다 49화.

뒤늦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여진이 또각, 또각 나정에게 다가왔다. 언제 닦았는지 모를 바닥이 불결하다는 듯 그녀는 홀로 스틸레토 힐을 신고 있었다.

“나정아. 이렇게 가까이서 널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라.”

여진이 손등으로 나정의 뺨을 쓸었다. 하얗고 매끄러웠다.

“태주 씨도 매일 이렇게 네 뺨을 어루만졌겠지?”

“노여진.”

“립스틱 색깔 예쁘네. 여기 몇 번이나 태주 씨 입술이 닿았을까. 내 남자랑 키스할 때 좋았어?”

나정이 낯빛이 굳어졌다. 여진은 어딘가 들뜬 사람처럼 보였다. 살짝 고조된 그녀와 표정과 목소리에서 나정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김 비서님?”

여진이 신호를 보내자, 남자들이 나정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나정아. 너 내가 왜 멜로 영화를 안 보는지 아니?”

“…….”

“난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거든.”

여진이 가죽 케이스에서 미리 준비해둔 기억 제거 기계를 꺼냈다.

“오랜만에 보지? 이걸로 다시 네 기억을 훼손시킬 거야.”

“뭐?”

나정의 동공이 팽창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여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처음엔 좀 따끔할 거야. 그다음엔 일시적인 쇼크로 정신을 잃을 테고.”

“이거 놔!”

“다시 깨어났을 땐, 둘 중 하나야. 모든 기억을 잃거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기억에 지배당하거나.”

“놓으라고!”

나정은 여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훼손시킨다니.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여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런 나정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얼마 후면 자신의 이런 모습조차 기억 못 할 것이다.

“나정아. 무서워할 거 없어. 어차피 처음 겪는 일도 아니잖아?”

“뭐?”

나정은 움직임을 멈췄다. 엷게 눈자위가 떨렸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여진의 입가에 실소가 어렸다.

“넌 네 기억이 어디까지 진실일 거라고 생각하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정은 극렬한 두통을 느꼈다. 머리가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불쌍한 것. 여진은 작게 혀를 찼다.

“난 나정이 네가, 모든 걸 다 잊고 새로 시작했으면 좋겠어.”

내가 도와줄게. 기억 제거 기계를 쥔 여진의 손에 까득, 힘이 들어갔다.

“노여진!”

“괜찮아. 이번에도 금방 끝날 거야.”

여진이 나정의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그러곤 작은 머리통에 망설임 없이 전류를 흘려보냈다. 통상적인 양보다 훨씬 충격이 강한 양의 전류였다. 이대로 나정이 아예 깨어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여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김 비서가 여진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나정의 몸이 축 늘어진 뒤였다.

바닥에 쓰러진 나정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기억이 어디까지 진실일 거라고 생각하니?

여진의 목소리가 핑퐁 볼처럼 머릿속을 마구 휘젓고 돌아다녔다.

욱. 헛구역질이 솟았다. 나정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곧 시야가 흐려졌다.

***

“정말이라니까요. 가출이 아니라 납치! 납치라고요! 내 눈으로 직접 봤다니까!?”

늦은 밤, 지구대에서 보나의 고성이 들려왔다.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요. 저희도 지금 최선을 다해서 추적 중입니다. 차종이 뭐라고 하셨죠?”

“구형 스타렉스 흰색이라니까! 몇 번을 말해요!”

“이게 대포차라 차량 조회가 어려워요. 잠시만요…….”

보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다리를 덜덜덜덜 떨었다.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맞은편에 앉은 경관은 쓸데없이 여유가 넘쳤다.

“보나 씨!”

그때 송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송준 씨…….”

보나가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송준이 오자마자 보나의 안색부터 살폈다. 보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난 멀쩡해요. 나정이가 걱정이죠. 그보다 우 총은요? 우 총한테 말했어ㅇ……”

말을 잇던 보나가 지구대로 들어서는 태주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태주는 곧장 보나에게 다가섰다. 그의 입술 새로 달아오른 날숨이 터졌다.

“강 주임이 납치됐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그게, 그러니까…….”

“제대로 설명해요. 차량 확인했습니까?”

“네. 스타렉스 차량. 흰색…….”

“얼굴은. 운전자 얼굴 봤어요?”

“아뇨. 저녁인 데다 경황이 없어ㅅ…….”

보나의 양어깨를 틀어쥔 태주의 손에 과한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건지 똑바로 얘기해요.”

“초, 총지배인님.”

“강나정 지금 어딨어.”

보나에게 내리꽂힌 태주의 눈빛이 조악했다.

“왜 이래, 애먼 사람한테.”

송준이 보나의 어깨를 파고들던 태주의 손을 떼어냈다. 이내 갈 곳을 잃은 커다란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태주의 낯빛에 허탈함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고개를 비틀어 바라본 시계는 벌써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태주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기 무섭게, 하 회장의 측근이 전화를 받았다.

“접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안에 찾아야 합니다.”

태주가 어머니 쪽 사람에게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은 드물었다.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태주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나정이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땐, 이미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핸드폰 시계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갈증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자 비로소 좀 정신이 들었다. 나정은 그제야 이곳이 무인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살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외에, 몸은 멀쩡했다. 잃어버린 물건도 없었다. 가방이나 핸드폰도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보나랑 근처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헤어졌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 보나야. 나야.”

잠시 후, 핸드폰을 꺼내 보나의 번호를 눌렀다. 어찌 된 일인지 수화기 너머에선 곧장 괴성이 울려 퍼졌다.

-강나저어엉! 너 지금 어디야!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어…… 멀쩡해.”

나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보나야. 나 좀 데리러 와 줄 수 있어?”

-당연하지! 지금 당장 갈게! 거기 어디야?

“어, 여기가…….”

여기가.

“그게. 잘 모르겠어.”

***

“나정아!”

무인텔을 벗어난 나정은 불빛이 많은 거리에 나와 있었다. 멀리, 송준의 차에서 내려서는 보나가 보였다.

“많이 기다렸지!? 너 정말 괜찮아!?”

“나정 씨, 다친 데 없어요?”

“네…… 괜찮아요.”

나정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다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지금 호들갑 안 떨게 생겼어! 난 진짜 너 어떻게 된 줄……,”

말을 잇던 보나가 멈칫 뒤를 돌아봤다. 나정의 시선도 지금 막 도로변에 멈춰선 마세라티를 향해 움직였다.

탁, 거칠게 차 문이 열리며 태주가 내려섰다.

어……. 나정은 살짝 눈을 키웠다.

“강나정.”

태주가 곧장 나정에게 다가섰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

“괜찮아?”

그가 나정을 향해 반사적으로 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총지배인님이 여길 왜…….”

나정이 그의 손길을 피해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순간 태주는 그런 나정의 태도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보나 네가 불렀어?”

“어, 어?”

“우 총 말이야. 나 혹시 뭐 사고 쳤니?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필름이 완전히 끊겼어.”

나정이 보나를 붙잡고 작은 소리로 소곤댔다.

“…….”

태주는 빤히 그 모습을 주시했다.

왠지 눈앞의 나정이 낯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래로 늘어진 태주의 손이 움찔거렸다.

“왜 하필 우 총을 불렀어. 불편하게…….”

“나, 나정아. 너 왜 그래. 총지배인님이 네 걱정 얼마나 많이 했는데.”

우 총이 내 걱정을? 나정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너 혹시 납치범들이랑 치고박고 싸우다 벽에 머리라도 박았니……?”

“납치범? 무슨 만화 같은 소리야.”

나정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에 보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나정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미묘하게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를 송준과 태주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너…… 기억 안 나? 스타렉스! 빡빡이들! 너 납치 당했었잖아!”

“뭐?”

나정은 그저 황당했다. 보나는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결국 듣다 못 해 보나의 말을 끊으려는데,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흑연처럼 짙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눈이었다.

태주에게서 야릇한 기분을 느낀 나정은 먼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춥다…… 나 집에 갈래.”

그녀가 멍한 어조로 읊조렸다.

***

“나정이가 없어졌어요.”

다음 날 아침, 보나는 부스스한 몰골로 송준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까 먼저 출근했더라고요. 왠지 기분이 싸한 게, 좀 이상해요.”

어젯밤부터 나정은 확실히 이상했다.

송준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태주에 대한 언급은 한차례도 하지 않았다. 뭔가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정이가 우 총을 대하는 태도 말이에요. 꼭 직장 상사 대하듯 딱딱하지 않았어요? 난 겁이 나서 못 물어보겠어요…… 나정이 걔, 아무래도 머리를 다친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보나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일단 알겠어요, 보나 씨. 끊어요.”

통화를 마친 송준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는데?”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엔 태주가 서있었다. 어제 종일 잠을 설친 건지, 낯빛이 까칠했다.

“어디 가냐? 설마 그 얼굴로 출근하려고?”

@공금 갠소 굴리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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