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0화.
태주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곧 행거에서 와이셔츠를 골라 입고, 하나하나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목에 맞게 조였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나정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만이 평소와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
“나정아. 병원 가자. 응?”
“또 뵙겠습니다. 고객님.”
“나정아. 가자니까? 너 이상해. 가보자. 어?”
시끄러워 죽겠네. 참다못한 나정이 보나를 향해 돌아섰다.
“아까부터 대체 왜 그래. 무슨 병원이야. 나 멀쩡하다니까.”
“너 안 멀쩡해!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이상한데.”
들어나 보자. 나정이 팔짱을 낀 채 보나와 대치했다.
“너…… 네 애인이 누구게?”
곧이어 황당한 질문이 날아왔다.
애인이 누구냐니. 왠지 맥이 빠진 나정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야, 대답 안 하고 어디가?!”
“호출 왔어. 애인한테.”
뭐? 보나가 멀어지는 나정을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
별관 프레지덴셜 룸.
똑똑. 형식적으로 문을 두드린 후, 나정이 안으로 들어섰다.
“메이아이 컴인.”
소파에 걸터앉아 시나리오를 읽고 있던 현오가 흠칫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강나정의 목소리였다.
‘혹시 나한테 친구 이상의 뭔가를 바라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저 차현오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그날 이후, 알게 모르게 나정을 피해왔다. 차가운 강나정 표정을 마주할 용기가 안 나서였다.
“현오 씨.”
그런데, 지금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오 씨?
한결 풀어진 미소로 저를 대하는 나정을 보며, 현오는 가벼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
“저, 저기요. 총지배인님!”
비서와 함께 로비로 들어서던 태주가 걸음을 세웠다. 앞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보나였다.
“뭡니까.”
“아뇨, 저기…….”
뒷덜미를 긁적거리던 보나가 이내 목에 걸린 말을 툭 내뱉었다.
“혹시 나정이 만나셨어요?”
태주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네…… 무슨 일이 있네요.”
보나는 나정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야, 너 대답 안 하고 어디가?!’
‘호출 왔어. 애인한테.’
“그게…… 아무래도 나정이가 차현오 씨를 만나러 간 것 같은데, 느낌이 좀 싸해서요.”
***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객실 내부에 위치한 미니 Bar.
긴 상판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현오가 나정을 예의주시했다.
Bar 안쪽에 서있던 나정이 직접 우린 따뜻한 재스민차 한 잔을 현오에게 건넸다.
“마셔요. 집중력에 좋대요. 요새 시나리오 보느라 정신없잖아요.”
“…….”
살가운 나정의 미소에 잠깐 넋을 놓은 현오는 얼른 정신을 추슬렀다.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응?”
“너 왜 아까부터 나한테 반존대 하는데? 그리고 왜 자꾸.”
왜 자꾸 날 현오 씨라고 부르는데.
“현오 씨 시나리오 혼자 읽기 심심하면, 내가 옆에서 대사 쳐줄까요?”
이것 봐. 현오의 눈이 좌우로 연하게 흔들렸다.
뭔가 이상했다. 눈앞의 강나정은, 규정을 운운하며 제게 벽을 치던 평소의 강나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놀려.”
“뭐가요……?”
나정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어왔다. 현오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너 지금 좀 이상하잖아. 날 부르는 호칭도, 말투도, 웃는 얼굴도. 원래 내 앞에서 그렇게 예쁘게 안 웃잖아.”
현오는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나정의 속내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벽을 허물고 제게 다가오는지.
“호칭은. 둘이 있을 땐 편하게 부르기로 했잖아요.”
“뭐?”
“그리고 나 원래 현오 씨 앞에서 이렇게 웃는데?”
나정이 한 번 더 눈가를 접고 웃었다. 현오로서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정은 다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우리 스캔들 났을 때, 생각 많이 했어요.”
“…….”
“무작정 도망치는 것만이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이제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어요. 그게 다예요.”
뭐지. 현오의 낯빛이 굳어졌다.
나정과 스캔들이 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루머일 뿐인데.
나정은 정말 스캔들이 사실인 양 말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겠다며, 저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럼 우태주는?
현오의 눈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우태주와는 어떻게 된 거지. 도저히 나정의 속을 가늠할 수 없었다.
“주임님.”
“응?”
나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은 퍽 사랑스러웠다.
“그럼 키스할까?”
몸을 일으킨 현오가 대뜸 나정을 끌어당겼다.
적당한 힘이 실린 손이 하얗고 가는 목덜미를 휘감았다.
“키스하자.”
물론 정말로 입을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나정의 속내가 궁금해서 그녀를 떠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막상 입술이 가까워졌을 때, 현오는 이토록 밀접한 거리에서 나정의 얼굴을 마주한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안으로 지긋이 말아 물었다. 긴장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대로 입 맞춰도 될까.
짓궂게 나정의 목덜미를 휘감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현오의 눈꺼풀이 감겼다. 곧이어 두 사람의 입술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홱. 그 순간 나정은 있는 힘껏 현오의 어깨를 밀어냈다.
무방비 상태로 몸을 기울였던 현오가 보기 좋게 밀려났다.
“미안해요. 태주 씨,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지, 나정은 심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내 이름. 그거 아닌데.”
현오가 나직이 읊조린 말에 나정은 살짝 눈을 키웠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어요……?”
순간 삐- 하고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나정은 반사적으로 양쪽 귀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나정아.
강나정.
머릿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현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정이 혼란함에 눈을 떨었다. 뭐지 방금 그건?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발밑의 땅이 푹 꺼진 것 같았다.
나정은 질끈 눈을 감았다.
“주임님. 괜찮아?”
당황한 현오가 나정의 어깨를 흔들었다.
“메, 메이아이 컴인! 들어가겠습니다!”
그때였다. 일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객실로 들어선 보나가 나정을 발견하고 입을 벌렸다.
“헐, 나정아! 괜찮ㅇ……,”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태주가 그녀를 빠르게 지나쳤다.
우태주 총지배인……?
자리에 주저앉은 나정이 제게 다가오는 태주를 바라봤다. 대리석 바닥이 역류하듯 치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어지러웠다.
“업혀요.”
곧 널찍한 등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뭘까. 이 이상한 기시감은. 나정은 자석에 끌리듯 태주의 등에 몸을 기댔다.
“기립성 저혈압 같은데? 좀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의무실.
침대 위의 나정을 보며, 보건의가 성의 없이 말했다.
“나정아. 자?”
보나의 걱정을 뒤로한 채, 나정은 아까부터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실은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총지배인님. 나정이 좀 이상한 거 맞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침대맡에 앉은 보나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나정은 감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시원한 손 하나가 제 이마를 덮었다, 열이 나는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이마를 덮은 손에서 우 총지배인의 냄새가 났다. 옅은 화이트 머스크 향. 내가 왜 이 냄새를 아는 거지. 왜 자꾸 마음이 울컥울컥하는 거야?
나정은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자연스레 이마를 짚은 손이 제게서 떨어져 나갔다.
지잉. 곧이어 태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말없이 나정을 내려다보던 태주가 핸드폰을 귀에 댔다.
-총지배인님. 강나정 씨 납치 사건, 아무래도 배후에 노여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딱딱한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또다시 나와서는 알 될 이름이 나왔다.
태주가 몸을 비틀어 의무실을 벗어났다.
***
“우태주와 차현오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김 비서와 통화를 하던 여진은 참지 못하고 왈칵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강나정이 두 사람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차분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차현오와 스캔들이 났던 당시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새롭게 편성된 듯합니다. 자신과 차현오가 연인 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태주에 관한 기억도 차현오에게 일정 부분 전이된 것 같습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여진은 선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희소식도 이런 희소식이 없었다.
역시 하늘은 내 편이라니까. 어떻게 하고많은 사람 중에 우태주를 잊을 수가 있어?
“강나정. 네 사랑은 겨우 그 정도였던 거지…….”
잠시 후 통화를 끝낸 여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재밌어. 이런 짓?”
그때였다. 흠칫 고개를 돌린 곳에 태주가 서있었다.
“태주 씨!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여긴 어쩐 일이야?”
반갑게 그를 맞으려다가, 여진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참. 나정이 소식은 들었어…… 다른 남자한테 완전히 돌아섰다며?”
잇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여진은 굳이 다시 밀어 넣지 않았다.
태주의 흐트러진 눈빛을 보는데, 왠지 묘한 희열감마저 들었다.
“네 짓이지.”
“증거 있어?”
“아직은 심증뿐이야.”
“그럼 확실한 증거가 생기면 다시 얘기해.”
여진이 생글 웃었다.
“걔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태주가 재차 물었다. 목소리가 저릿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정말 내가 그랬다고 생각해?”
한 발 한 발, 여진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태주 씨. 이제 그만해. 방황은 그쯤 했으면 됐잖아. 이제 우리 결혼만 생각하자. 응?”
야릇한 목소리가 태주의 귀에 감겼다.
“나 사랑 같은 거 바라지 않아. 태주 씨랑 나정이가 사랑 때문에 어디까지 곤두박질치는지 옆에서 다 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