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1화.
그냥. 태주 씨 껍데기만 나한테 줘.
여진이 자신의 셔츠 단추를 톡, 톡 풀었다.
태주는 미동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날 나정이 대신이라고 생각해 태주 씨.”
태주에게도 남자의 본능은 있을 터. 여진은 확신했다. 오늘 밤, 이성의 끈을 놓친 태주가 자신의 품을 무섭게 파고들 것이라고.
“걔 대신 날 안아.”
셔츠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진의 속살은 희고 투명했다. 적당한 볼륨감은 눈앞의 남자를 자극하고도 남았다. 적어도 여진은 그렇게 자신했다.
그런데, 돌연 태주가 제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무거운 탁성으로 속삭였다.
“……넌 절대 강나정 대신이 될 수 없어. 넌 노여진이니까.”
스륵, 그가 제게서 떨어져 나갔다.
여진은 마네킹처럼 자리에 굳어있었다. 내가 노여진이라서. 태주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누군가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태주가 화실을 벗어날 때까지 손 하나 까딱거리지 못했다.
“아아아악……!”
한참 후에야 히스테릭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밖으로 나온 태주는 그 소리를 무시한 채 차에 올랐다.
***
“괜찮아?”
“몇 번을 확인하는 거예요. 정말 괜찮다니까.”
현오는 직원 숙소 앞에 차를 댄 채, 아까부터 나정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자꾸만 태주의 등에 업혀 나가던 모습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강나정에게 뭔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매번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매번이라니. 현오는 나정에게 사실을 일러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난 널 데려다준 적이 없다고. 넌 지금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고.
“현오 씨. 영화 크랭크인하면 다시 서울 올라가야 하죠? 그때, 나도 따라갈까?”
뭐? 동그래진 눈동자가 나정에게 붙박였다.
“나랑 같이 가겠다고?”
“당연하지.”
나정은 작게 웃었다.
“끝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잖아요, 우리.”
그런 약속을 했던가. 현오가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나정을 응시했다.
“아주 그냥, 답답해 환장하겠네요.”
멀찍이서 현오의 차를 감시하던 보나와 송준이 스륵 고개를 내밀었다.
“안 되겠어요. 내가 나서야지.”
보나가 몸을 일으켰다.
“나정이한테 가서 확실히 말해줄 거예요. 네 애인은 차현오가 아니라 우태주다. 네가 납치범들과 격투 끝에 머리를 다쳐서 좀 헤까닥 한 모양인데, 넌 이미 우태주한테 프러포즈까지 받은 몸이다! 알이 이만한 다이아 반지가 네 화장대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다 말할 거라고!”
“워워. 진정해요.”
송준이 눈앞의 흥분한 코뿔소를 다독였다.
“보나 씨. 사과가 무슨 색이죠?”
“갑자기 뭐예요? 당연히 빨간색이죠.”
“거봐요. 근데 내가 파란색이라고 하면 믿어요? 믿을래요?”
끄응. 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송준은 슬쩍 웃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나정 씨는 지금 태주가 아니라 차현오 저 사람을 자기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사과는 빨갛다고 해도, 어차피 안 들릴 거라고.”
“그래도요! 이대로 있으면 우 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불쌍하기는. 송준이 확신에 차 말했다.
“태주가 의외로 파이터 기질이 있다는 거 몰랐죠. 이참에 잘 봐둬요.”
***
나정을 숙소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현오는 난데없이 끼익! 제 앞을 막아선 차를 보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하마터면 접촉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미간을 구긴 현오가 차창 밖의 까만색 마세라티를 주시했다.
곧 운전석의 남자가 차에서 내려섰다. 그제야 현오는 그가 태주임을 깨달았다.
태주가 일말의 흔들림 없이 정제된 눈빛으로 곧장 제게 다가왔다.
마 방목지 옆 갓길, 나란히 세워진 태주와 현오의 차가 보였다.
밤이라 말들이 축사에 들어갔는지, 멀리 보이는 들판은 한없이 고요했다.
두 남자는 그 들판을 배경 삼아 도로변에 서 있었다.
“강나정이 나랑 당신을 혼동하고 있는 건가?”
한참 만에 예리한 질문이 날아왔다.
“아마도.”
태주는 짧게 대꾸했다. 두 남자 사이엔 아까부터 암묵적인 반말이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 주임님이 날 그런 눈으로 봤구나. 그렇게 예쁘게 웃어주고.”
혼잣말을 가장한 읊조림이 현오의 입술 사이로 불거졌다. 사실은 약이 올라서 어쩔 줄 모르는 태주의 반응을 보기 위해 던진 소리였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태주의 눈빛이 호수처럼 깊고 잠잠해서, 현오는 거기에 돌을 던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풍덩! 요란한 파동을 일으키며 물이 튈지, 아니면 언제 뭘 던지기나 했냐는 듯 계속 평온함을 유지할지 궁금했다.
“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난 복잡한 건 딱 질색이라서.”
현오가 부슬부슬한 머리칼을 가볍게 털며 말했다.
“강나정이 날 필요로 하면, 계속 옆에 있어 줄 생각이야.”
“마음대로 해.”
태주에게서 스스럼없는 즉답이 날아왔다. 현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
“정말 마음대로 해?”
“그래.”
예상을 비켜 간 대답에 도리어 당황한 건 현오였다.
당연히 강나정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눈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돌을 쥐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태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나정이 욕심나면 욕심내. 가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
태주가 혼란한 현오의 표정을 관전하며 한 번 더 무심히 지껄였다.
***
나정아.
강나정.
잘 잤어?
자상한 음성에 나정은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꿈에서 듣던 목소리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정은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어루만졌다.
왜 운 거지. 그 목소리는 대체 뭐지.
한 손으로 무거운 머리를 받쳤다. 왜인지 두통이 일었다. 조금 더 자자. 그럼 괜찮아질 거야. 울적한 기분도 나아질 거야. 나정은 억지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굿모닝……!”
그러나 결국, 보나가 부산한 아침 인사를 건넬 때까지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저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눈을 떴다 감기만 반복했을 뿐.
스륵 몸을 일으킨 나정은 영혼 없는 기계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씻고, 간단한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고, 화장대 앞에서 연하게 메이크업을 했다.
“나정아, 뭐 해?”
“어? 아냐…….”
멍하니 거울 앞에 앉아있던 나정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이내 가장 수수한 컬러의 립스틱을 골라 입술에 발랐다.
“다녀올게.”
오후 조 근무인 보나를 숙소에 남겨둔 채 나정은 홀로 출근길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하루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갈 거라고 믿었다.
“안녕.”
그러니까, 난데없이 현오가 제 앞을 막아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현오 씨…….”
숙소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현오가 살짝 입가를 끌어올렸다.
“데이트하러 가자.”
“지금요?”
나정의 얼굴에 반가움이 아닌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어떡하죠. 출근해야 하는ㄷ……”
“제끼자.”
“……?!”
현오가 놀란 나정을 그대로 차에 태웠다.
잠시 후 하얀 스포츠카가 도로를 빠르게 질주했다. 바람에 나정의 머리칼이 마구 흩날렸다. 주변의 풍경들도 감상할 새 없이 휙휙 지나갔다.
“안 추워?”
“하나도요, 오히려 시원해요!”
정말이었다. 하나도 춥지 않았다. 이유도 모르고 뜨거웠던 머리가 조금 식는 것 같았다.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
나정이 바람을 맞으며 평소보다 높은 소리로 물었다. 핸들을 쥔 현오가 다른 손으로 나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대답했다.
“너랑 해보고 싶은 게 있어.”
“해보고 싶다던 게, 영화감상이었어요?”
텅 빈 상영관. 나정은 현오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며 조금 허무하게 웃었다. 왠지 현오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주말에 봐도 되잖아요.”
“주말엔 네가 안 만나줄 것 같아서.”
현오가 낮게 웃으며 나정을 자리로 안내했다.
“L열 8번자리. 네 지정석.”
“…….”
나정이 현오를 올려다봤다. 현오의 시선도 제게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이건, 네가 좋아하는 녹차 프라푸치노.”
내가 좋아하는. 나정은 생경한 표정으로 현오가 내미는 녹차 프라푸치노를 받아들었다.
잠시 후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제목은 플립. 미성숙한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을 다룬 영화였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예요.”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나정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현오에게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정은 긴장한 듯 입술을 축이는 그를 잠깐 동안 바라봤다.
보통의 평범한 데이트가 그렇듯, 영화를 보고 난 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밥을 먹고 카페를 찾았다.
현오를 알아보는 팬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원래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한테 관심이 없어. 현오가 그렇게 말하며 목덜미를 쥐었다. 나정은 멋쩍어하는 그 얼굴이 새롭다고 생각했다.
“제주도는 모든 길이 바다랑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좋아요.”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이 다시 차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별로 없는 바다였다. 현오는 호텔에 몇 달을 머물렀으면서도, 정작 바다는 처음 와본다고 했다.
두 사람이 모래사장 위에 편하게 앉았다. 맥주 거품 같은 파도가 발 앞까지 밀려왔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주임님. 기억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현오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나 호텔에 체크인 한지 한 달쯤 됐을 때.”
“그럼요. 기억해요. 못할 수가 없죠.”
나정은 망나니 같던 초반의 현오를 떠올렸다.
그 당시, 현오는 술과 의미 없는 파티에 미쳐있었다. 매일 밤 호텔로 지인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술을 들이부었다. 술이 깨면 죽는 병에 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취하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