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2화.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하루도 버틸 자신이 없어서였다.
“쯧…… 술 냄새. 오늘도 들이부었구만.”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에 진탕 취해 침대에 파묻혀 있었다. 머리맡에서 나정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강나정. 처음부터 특별대우 따위는 없고 그저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여자였다.
“고객님. 깨워도 안 일어나실 거죠?”
아. 지겨워.
“혹시 죽은 건 아니죠?”
재미없다고. 좀 가라고.
현오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머리맡에서 포탄 같은 잔소리가 우수수 쏟아졌다.
“진짜 뭐라도 되려고 그래요, 고객님?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예요? 다시 방송 복귀 안 해요? 여기서 벌어둔 돈 흥청망청 낭비하며 진흙탕 길만 걸으려고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빈속에 술 먹고 매일 변기 잡고 토하고, 그러다 진짜 화장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어요?”
다다다 쏟아내는 잔소리를 피해 현오는 은근슬쩍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곤 결심했다.당장 컨시어지를 교체하기로.
“주임님. 차현오 있잖아요. 걔 진짜 약쟁이예요?”
“뭐?”
“객실에서 환각 파티를 열었다는 소리가 있던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조심해. 차현오 그 사람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니야. 내가 보장해.”
당장 컨시어지를 교체하리라고 마음먹었건만. 현오는 그날 눈을 뾰족하게 뜨고 자신을 열렬히 변호하는 강나정의 실체를 보고야 말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주임님을 좋아한 게.”
바다를 응시하던 현오가 나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통은 앞에서 추켜세워주고 뒤에 가서 날 욕하거든. 근데 넌 반대였잖아. 뒤에서 내 편 들어 줬잖아.”
현오가 한 손으로 나정의 뺨을 쓸었다. 잠깐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한번 들어가 볼까?”
돌연 현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짓궂은 시선이 바다를 향했다. 나정은 경악했다.
“무슨 소리예요. 한겨울에 무슨…… 현오 씨!”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현오를 보고 나정은 비명을 질렀다.
“미쳤어요! 나와요!”
“너도 들어와.”
벌써 허리까지 물에 잠긴 현오가 웃으며 말했다. 거센 바람에 그의 셔츠 자락이 펄럭였다.
나정은 거세게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왠지 현오에게서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만 나오라니까!”
발을 동동대던 나정이 다음 순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현오에게 달려가 팔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요?”
“들어오란다고 진짜 들어오면 어떡해.”
현오가 선선히 웃었다. 그의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정은 커다랗게 눈을 치떴다.
왜 갑자기 현오의 모습에서 우태주 총지배인이 보였을까.
‘너 미쳤어?’
‘거봐. 결국은 이렇게 구하러 오잖아.’
어째서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은 걸까. 머리가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세찬 파도가 혼란에 빠진 나정의 얼굴을 자꾸만 내리쳤다.
***
“오늘 즐거웠어. 주임님.”
현오의 차가 멈춰 선 곳은 낯선 별장이었다.
“자. 갈아입을 옷.”
나정이 내밀어진 쇼핑백을 말없이 응시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흠뻑 젖어있었다.
“같이 안 들어가요?”
“난 호텔로 돌아가야지.”
현오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나정은 머릿속으로 질문을 골랐다.
“주임님. 내가 누구야?”
그때였다. 현오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잘 봐. 내가 누군지.”
“…….”
“나는 차현오야. 장기투숙 진상 고객. 차현오.”
“…….”
“그게 다야. 나는 절대 주임님한테 다른 의미가 될 수 없어.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도 없고.”
현오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네가 녹차 프라푸치노를 좋아한다는 거 나 오늘 처음 알았어. 네 인생작이라는 그 영화도, 솔직히 지루했어. 아까 바다에서도…….”
잠깐 말끝이 흐려졌다.
“어쨌든, 네가 오늘 하루 종일 데이트한 사람은 내가 아냐.”
“현오 씨…….”
“여기서 기다려. 곧 그 사람이 올 거야.”
현오가 한 손으로 나정의 어깨를 쥐었다. 이내 살짝 힘을 줬다가 아래로 손을 떨어뜨렸다.
안녕.
오늘 아침 갑자기 숙소 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그가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차를 돌려 사라졌다.
홀로 별장 앞에 남은 나정은 말없이 작아지는 차를 바라봤다.
나정을 혼자 버려두고 돌아오는 길에 현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건 정말 멍청한 선택이라고.
그가 태주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강나정이 날 필요로 하면, 계속 옆에 있어 줄 생각이야.’
‘마음대로 해.’
‘정말 마음대로 해?’
‘강나정이 욕심나면 욕심내. 가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
‘…….’
‘난 내 방식대로 강나정이 너한테 흔들리지 않도록 지킬 테니까.’
어차피 넌 내 상대가 안 돼. 흔들림 없이 견고한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나정이 시선이 누구를 향하든, 상관없이 강나정만을 바라보겠다는 확신.
현오는 태주의 눈빛에 심어진 그 확신을 이길 엄두가 안 났다.
부와앙. 그가 액셀을 밟고 속도를 올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별장 안은 썰렁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의 실내를 한번 둘러본 후 나정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여기서 기다려. 곧 그 사람이 올 거야.’
현오가 말했던 그 사람이라는 게 누군지, 나정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매일 밤 꿈에 우태주 총지배인이 나왔다.
나정아. 다정한 그 목소리는 꿈에서 깨면 어김없이 사라졌다.
나정은 알 수 없는 허탈감과 상실감에 밤새 뒤척이곤 했다.
“웬 사진이…….”
말없이 별장 내부를 둘러보던 나정은 문득 벽난로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액자 속엔 자신과 태주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팽창한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다시 봐도 분명 자신이 태주의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었다.
조급해진 나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다른 액자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서 확인한 사진 속엔 역시나. 지금보다 훨씬 앳된 모습의 저와 태주가 찍혀있었다. 마치 연인처럼 볼에 입을 맞추는 사진이었다.
어느새 나정은 액자를 찾아 별장 전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파 협탁 위. 주방 싱크대 옆.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 길목. 무슨 보물찾기처럼 숨겨져 있는 액자는 크기도 모양도 전부 달랐다. 공통점은 그 안에 든 사진이 전부 자신과 태주를 찍은 사진이라는 거였다.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며 찍은 사진도.
극장에서 영화표를 나란히 들고 찍은 사진도.
잠든 태주의 얼굴에 몰래 낙서를 하고 도촬한 사진도.
펍에서 지인들과 술자리를 하다 뭐가 그리 웃긴지, 나란히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전부 기억에 없는 것들이었다.
왜 사진 속의 자신이 그토록 행복해 보이는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어느새 이 층까지 올라온 나정은, 협탁 위에 놓인 마지막 액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강한 파도가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집어 들었다.
툭, 투둑. 액자 유리 위로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이 사진 속에서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이 누구길래 이토록 예쁘게 웃었을까…….
나정은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태주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그러나 핸드폰은 아래층에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정이 얼른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막 계단을 내려서려던 찰나였다.
아. 갑자기 머리에 극렬한 통증이 일었다. 총알이 공회전을 하며 머리 중심부를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나정은 가느다란 신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에서 떨어진 액자가 계단 아래로 떨어져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 임신이래. 8주.’
순간 눈앞으로 또렷한 잔상이 지나갔다.
‘정말이야? 정말이지?’
카페테리아에 마주 앉은 남녀. 그건 자신과 재영이었다.
“너 임신한 거 아직 애 아빠는 모르지?”
재영은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태주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입이 귀에 걸릴 거다. 아마 출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모스크바에서 한국 들어오겠다고 난리 필걸.”
“그래서, 아직 얘기 안 하려고.”
“그럼?”
“이틀 뒤에 태주 씨 한국 들어오면, 그때 얘기해 줄 거야.”
나정이 늘 마시던 커피 대신 따뜻한 유자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웃었다.
“나정아. 내가 태주 절친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너랑도 반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잖니.”
“왜 그래, 갑자기?”
“태주 소유로 돼 있는 그 남양주 별장. 아직 비어있지?”
재영은 긴 장기출장을 끝내고 이틀 뒤면 고국에 돌아올 자신의 절친을 위해 나름 발칙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나정과 단둘이 별장을 찾은 그는 아기자기한 유아용품들로 공간을 장식했다. 태주와 나정의 사진 액자를 곳곳에 배치해 로맨틱한 분위기도 연출했다.
“봐. 이 줄지어 선 액자를 쭈욱 따라가다 보면, 짠! 마지막으로 잼잼이 사진을 보게 되는 거지.”
마지막 액자엔 이제 막 8주밖에 되지 않은 잼잼이의 초음파 사진이 꽂혀 있었다.
“어떠냐. 이 정도면 우태주 그 냉혈한도 감동의 눈물을 한 사발은 쏟겠지? 그 자식 그 집채만 한 덩치로 꺼이꺼이 울면 정말 꼴사납고 볼만할 거야.”
“오빠. 솔직히 말해봐. 태주 씨 울리고 싶어서 이벤트 준비한 거지.”
“나 고프로 샀다. 그 자식 우는 거 4k 화질로 남겨서 대대손손 가보로 간직하려고.”
나정이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재영은 누구보다 새 생명의 잉태에 안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