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3화.
나정과 태주가 아이를 갖기 위해 얼마나 무던히 애를 썼는지 가까이서 지켜봐 왔기에. 그는 이 기쁜 소식이 어서 태주에게 전해지기를 바랬다.
그러나 바램과는 달리, 이틀 뒤 태주는 별장을 찾지 않았다.
나정이 아이를 낳는 일도 없었다.
“아니야…… 아냐…….”
계단 위에 주저앉은 나정이 머리를 가볍게 내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이 기억이 진짜일 리 없어.
이게 진짜면, 그럼 내 아이는……?
순간 나정은 몸에 힘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매가리 없이 축 늘어진 몸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려는데, 일순간 강한 손아귀가 나정을 낚아챘다.
“강나정……!”
나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괜찮아?”
늘 꿈에서 듣던 목소리. 태주였다.
“태주 씨…….”
막 이곳을 찾은 태주는, 다 죽어가는 나정을 보고 심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가 무어라 외치며 나정의 뺨을 감쌌다. 눈을 떠보라고 소리치는 것 같기도 했다.
“태주 씨, 나…… 나 안 그랬어요…….”
나정이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을 끌어안은 태주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
“나, 재영 오빠랑 안 그랬어요…….”
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이제 다 기억이 났어요.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강나정!”
나정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태주가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
***
병원으로 옮겨진 나정은 긴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정과 태주의 시간은 다시 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너무나 이상적인 부부였다.
자상하고 아내밖에 모르는 남편,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믿는 아내.
부부는 완벽했다. 더없이 행복했다.
다만 한가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나정의 몸이 너무 약한 탓이었다. 병원에서는 자연임신이 힘들 거라고 했지만, 나정은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아이를 가졌다. 태명은 잼잼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출장을 떠난 남편이 돌아오기도 전에, 아이는 사고로 나정의 곁을 떠났다.
재영과 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난 전복사고였다.
그날 나정은 배 속의 아이를 잃었고 재영은 의식불명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했지만, 나정은 끝내 태주에게 유산 소식을 알릴 수 없었다.
아직 임신했다는 말도 못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하필이면 이틀 뒤 귀국 예정이던 태주의 일정이 다음 달로 밀리면서, 나정은 더욱 마음이 괴로웠다.
아무에게도 아기의 이야기를 터놓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인 하문옥 회장에게도. 아버지 대석에게도.
나정은 매일 밤 초음파 사진을 붙들고 울었다.
허무하게 아기를 떠나보낸 죄책감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무렵, 여진이 나정을 찾아왔다.
“나정아! 너 괜찮아? 얼굴이 왜 이래? 왜 이렇게 다 죽어가!”
나정은 여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여진은 나정을 끌어안고 대신 울어주었다. 억지로라도 밥을 떠먹였고, 밤새 옆을 지켰다.
그래도 나정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여진은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냈다.
“차라리 다 잊어. 아기에 대한 기억 말이야. 잊으면 없던 일처럼 네 마음도 편해질 거야. 곧 있음 태주 씨 돌아올 텐데. 언제까지 폐인처럼 지낼 거야.”
여진은 끈질기게 나정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날, 나정은 여진의 바램대로 Memory loss organ를 찾았다.
이후 과정은 순조로웠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여진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모든 검사와 절차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나정이 돌연 기억을 지우지 않겠노라 버텼다. 손에 쥐고 있던 초음파 사진이 화근이었다.
“못 하겠어.”
“뭐?”
“내가 이 아이 엄마잖아. 나까지 잊어버리면 우리 아기 누가 기억해줘. 안 할래. 안 지울래.”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내가 안고 갈래.
“누구 맘대로?”
여진은 몸을 일으키는 나정을 있는 힘껏 제압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전부 없던 일로 돌리겠다고? 그렇겐 못 해. 멈추기엔 이미 늦었어.
“그냥 시작하세요.”
여진의 말에 정원표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둬. 안 하겠다잖아……!”
여진은 침대에 누워 부르짖는 나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몇 년간 꾹꾹 눌러왔던 진심이 얄궂게도 지금 터져 나왔다.
“나정아. 난 늘 네가 싫었어. 너는 엄마도 없고, 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집의 거지로 태어난 주제에. 왜 주제넘게 행복한 거야?”
“노여진.”
“가진 게 없는 네가, 가진 게 많은 나보다 더 행복해하면 그건 불공평한 거잖아. 그치?”
뭐. 나정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태주 씨 일만 해도 그래. 내가 먼저 만났더라면 분명히 그 사람 날 사랑했을 텐데. 네가 먼저 선수친 거잖아.”
여진은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나정은 말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친구였다.
아니, 내내 친구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왜.
네가 나한테 왜…….
“나정아. 비밀 하나 알려줄게.”
여진이 침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네가 아이를 잃은 그 사고…… 내가 그런 거야.”
나정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내뱉는 날숨이 거칠어졌다. 나정은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노력했다.
“네가 그 아이를 낳으면, 난 태주 씨랑 영원히 이어질 수 없잖아.”
여진은 소름이 끼치도록 태연했다. 가는 손이 나정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너무 괴로워 마. 어차피 이 기억은 전부 지워질 거야. 그리고 새로운 기억이 주입되겠지.”
조작된 기억. 나정은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 대한 기억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던 또 다른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나정이 넌 그날, 고재영과 밀회를 즐기러 별장에 갔던 거야.”
여진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넌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와 몸을 섞었어.”
영원히, 절대로 우태주한테 용서받지 못할 거야.
저주와도 같은 말이 침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나정의 위로 떨어졌다.
***
감긴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정이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제 손을 꽉 쥐고 있는 태주가 보였다.
여긴 병원이구나. 나정이 뜨거운 숨을 삼켰다.
“괜찮아?”
이윽고 낮은 중저음이 귓전을 울렸다. 태주의 시선이 제게 매여있었다.
괜찮아요. 나정은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다.
“……아기가.”
그런데, 불쑥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태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불에 덴듯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더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우리 아기가…….”
투둑, 툭, 뜨거운 액체가 연신 뺨을 타고 흘렀다.
태주는 움직임을 멈춘 채 나정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빛이 꺼졌다.
“정말이냐? 정말 여진이가 너한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태주의 연락을 받고 병원을 찾은 대석은 청천벽력 같은 나정의 이야기에 가슴이 뜯겨 나가는 통증을 느꼈다.
거대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온 보나도 경악스러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 속의 아이, 차 사고, 유산, 그리고 강제적으로 조작된 기억.
나정의 입을 통해 은폐된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보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에 양팔을 문질렀다.
대석은 삼 년 전 딸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태주는.
태주는 오랫동안 이어지던 나정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결국 대석과 보나, 나정이 함께 눈물을 터뜨렸을 때 홀연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뭐에 홀린 듯 텅 빈 눈으로 복도를 걷던 그가 멈춰 선 곳은 어두침침한 비상구 계단이었다.
‘아기가…….’
‘우리 아기가…….’
이미 아기는 삼 년 전에 하늘로 갔는데.
휑한 배를 매만지며 흐느끼던 나정이 다시 눈앞을 어른거렸다.
태주가 무너지듯 계단에 주저앉았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나정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그 아이를 어떻게 잃게 됐는지도.
삼 년 전, 재경 그룹 계열사인 재경 호텔의 해외 착공 사업을 맡았었다.
모스크바에 몇 달씩 머물다 잠깐 짬이 나면 한국을 다녀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때는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나정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게 나정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병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태주의 시선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뜨거운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 떨어졌다.
‘당신이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이상하게 속이 뒤틀린단 말이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면 재미없잖아?’
‘어차피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일까지 관둬야겠어요?’
‘이딴 사직서 쪼가리나 달랑 던져두고 도망갈 생각은 접어요. 강 주임.’
‘말했을 텐데. 내가 놔 줄 때까진 넌 여길 못 벗어난다고.’
‘평생 내 그늘 밑에서 숨도 못 쉬고 살게 해줄게.’
그렇게 상처를 줬는데.
그렇게 찔러댔는데.
세차게 말아쥔 주먹이 핏기없이 하얬다.
퍽. 태주가 제 옆의 벽을 내리쳤다. 그런데도 가슴을 짓이기는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퍽. 퍽. 벽을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수없이 이어졌다. 툭 튀어나온 주먹 뼈가 까지고 부어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태주 씨. 그거 알아요?”
적막한 일인실. 창밖을 바라보던 나정이 태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석과 보나는 일부러 둘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우리 침실에서 재영 오빠 흔적이 나왔던 날. 나는 당황했고, 태주 씬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그날…… 생각해보면 우린 참 노여진한테 철저히 놀아났어요. 그 흔적도 여진이가 미리 심어둔 거겠죠?”
태주는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