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4화.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나정이 자신의 눈앞에서 그대로 깨져버릴 것 같았다.
“태주 씨. 여진이가 내 기억을 훼손시켰어요.”
그녀가 공허한 낯빛으로 말했다.
“여진이가 내 기억을 송두리째 조작했어요. 내 인생을 망가뜨렸어요.”
“나정아.”
“여진이가 나한테. 우리 아기한테!”
나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태주가 얼른 나정을 끌어안았다.
“기억을 완전히 잃게 될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 약을 나한테 놓으면서, 걔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날 비웃고 조롱했다고.”
“미안해.”
내가 몰랐어.
미안해.
태주는 끊임없이 사과했다.
나정은 그런 태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내 머릿속에 나도 모르는 기억이 심어질 수 있다는 게 무서워요. 내가 알고 있던 게 사실이 아니라니까,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다고…….”
태주가 대답 대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투둑. 툭. 유리창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였다.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네가 마음껏 소리 내서 울 수 있게.
태주가 숨죽여 울음을 삼키는 나정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기억이 돌아와……?”
같은 시각, 여진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멀거니 김 비서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뇌에 줬던 충격이 오히려 강나정 씨의 신경 회로를 활성화시킨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최대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돌아왔는데? 걔가 뭘 알고 있는데……?”
“전부 다.”
“!”
“전부 다 아는 것 같습니다.”
“태, 태주 씨는? 태주 씨 지금 어딨어?”
다급해진 여진이 몸을 일으켰다.
“우태주 총지배인, 지금 강나정과 같이 있습니다.”
여진의 눈동자에서 불이 탁하고 꺼졌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다. 이미 태주 또한 강나정에게 모든 걸 전해 들었을 터.
아냐,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생각해야 돼, 노여진.
여진이 히스테릭하게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초조함에 물어뜯은 손톱에서 금세 비릿한 맛이 났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태주 총지배인이 기억 제거 장치의 출처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뭐……?”
“아무래도 일이 커질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 쪽에서 강나정을 납치했었다는 걸 알고 있는 데다, 노성훈 회장님이 정원표 박사 연구소에 비밀리에 자금을 댄 것까지 파악한 모양입니다.”
우태주가 기억을 조작하는 기계를 추적하고 있고, 거기에 내 아버지가 관여돼있다는 것까지 눈치챘다?
“아무래도 당분간 외국에 나가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 비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특검 때문에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만약 지금 강나정 사건까지 터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연신 손톱을 깨물던 여진이 한참 만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면 다시 기억을 조작해요.”
“네……?”
“이번엔 태주 씨, 아니, 두 사람 전부 기억을 지워버리면 되는 거 아냐?”
“아가씨.”
김 비서가 여진의 한쪽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안 됩니다. 더 이상은.”
“왜 안 돼?! 안 될 게 뭐가 있는데!”
여진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 비서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웠다.
“잘 모르겠습니다. 우태주 총지배인…… 정말 사랑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여진의 눈빛이 조악하게 빛났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사랑한단 말이야!”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가 자르르 공간을 울렸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됐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닥까지 떨어졌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그럼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
***
나정의 병실이 일반실에서 VIP실로 바뀌었다.
그녀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계의 전류가 주입됐다는 사실을 안 주치의가 열흘간의 입원을 강력히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나정아.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 입원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밤에 잠 안 오면 꼭 아빠한테 전화하고. 응?”
대석이 병실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 서방 덕분에 아빠는 한시름 놨어. 병실도 떡하니 제일 좋은 데로 바꿔주고, 문밖에 힘센 사람들이 저렇게 지키고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대석은 일부러 더 밝게 목소리를 냈다.
그의 말마따나 병실 밖에는 가드들이 배치돼 있었다. 24시간 나정의 곁을 상주하는 간병인도 있었다.
“그러게. 태주 씨 덕분에 든든하네.”
나정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처음보다 많이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랬다.
병실을 바꾼 후로 보나는 뻔질나게 야식을 사 들고 찾아왔다. 송준 역시 늘 원플러스원처럼 함께였다. 두 사랑은 늘 실없는 농담 따먹기로 나정을 웃겨주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그렇게 병원에 있은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나정은 밖에서 들려오는 캐럴에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실에서 맞는 성탄절은 또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병원 데스크의 예쁜 트리와, 복도를 반짝반짝 빛내는 전구 장식은 왠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나중에 간병인 아주머니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그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오직 나정의 병실 주변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자기는 좋겠어~ 남편이 어찌나 아내를 각별히 생각하는지 몰러. 데스크에 있는 트리도 자기 남편이 갖다 놓은 거여. 전구도 쭈그려 앉아서 다~ 직접 달고.”
쉼 없이 이어지는 간병인 아주머니의 수다에 나정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웃지만 말구. 남편한티 연락이나 한 통 하지그려?”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케이크 상자를 든 태주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성소 베이커리의 딸기 타르트 케이크. 나정이 가장 좋아하는 빵집의 케이크였다.
“왔어요?”
나정은 다가서는 태주를 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의 코트 자락에서 차가운 겨울 냄새가 났다.
“오늘은 어땠어?”
태주가 양손으로 자연스레 나정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좋았어요. 하루 종일 편하게 놀고먹고 쉬었어요.”
“잘했어. 내일은 더 분발해서 놀고먹고 쉴 수 있도록 해.”
태주가 입가를 느슨하게 풀며 웃었다.
***
“1월 1일을 병원에서 보내다니. 너 참 지지리 운도 없다.”
그리고 어느덧, 1월이었다.
보나의 악의 없는 농담을 한 귀로 흘리며 나정은 달력의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퇴원이었다.
“미리 축하해 친구! 이건 낼 다 들고 가기 힘드니까, 내 배 속에 저장~!”
보나가 냉장고의 음식들을 털기 시작했다.
지잉.
그때였다. 나정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어? 어…….”
나정이 살짝 난처한 얼굴로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보나는 눈치껏 화장실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목소리. 살아 있는 거야?
핸드폰을 넘어오는 차현오의 음성에 나정은 왠지 울컥했다.
“네. 고객님도 잘 지내시죠……?”
다시 고객님이 됐군. 현오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웃었다.
-주임님. 몸은 괜찮은 거야?
“네. 괜찮아요.”
나정은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현오가 안도한 듯 숨을 삼켰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화두를 돌렸다.
-실은 나 지금 공항이야.
“네?”
-영화 일정이 당겨져서 급하게 올라가게 됐어. 인사도 못 하고 가서 미안. 네가 그동안 나 많이 챙겨줬는데.
나정은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현오를 자신의 연인으로 오인했던 순간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고객님.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친구끼린 미안하단 말 하는 거 아냐.
잠깐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친구 맞지. 우리?
“그럼요.”
돌아오는 대답에 현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얼른 회복해. 잘 지내고.
별스럽지 않은 인사를 끝으로 현오는 통화를 마쳤다.
그리곤 멀리 있는 나정의 병실을 바라봤다.
“……선 넘지 마.”
스스로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하고는, 손에 쥔 케이크 상자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후, 현오가 떠나고 없는 휴게실 의자 위에 덩그러니 케이크 상자가 놓여있었다.
주인 잃은 딸기 타르트 케이크에 지나가던 환자들이 한 번씩 관심을 두었다.
***
“태, 태주 씨……!”
애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층짜리 단독주택은 태주가 나정에게 선물한 집이었다.
언젠가 나정과 가정을 꾸리면, 이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여느 부부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런 평범한 꿈을 꾸며 매입한 집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집 앞에서 노여진을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태주 씨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나정을 부축하며 차에서 내린 태주가 길길이 날뛰는 여진을 보며 미간을 그러모았다.
여진은 확연히 굳어지는 태주의 낯빛을 보고도 아랑곳없이 달려갔다.
“태주 씨. 나정이 말 믿지 마. 믿으면 안 돼. 태주 씨 속고 있는 거야!”
나정은 태주에게 매달리는 여진을 보며 머릿속의 퓨즈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열흘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태주와 퇴원 수속을 밟으면서, 그리고 집에 오면서. 나정은 내내 여진을 생각했다.
널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할까. 널 살릴까. 죽일까.
“노여진…….”
처음이었다. 분노로 목소리가 떨린 것은.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나정이 여진을 강한 힘으로 밀쳤다.
“나한테 왜 그랬냐고! 대체 왜 그런 짓까지 했어, 나한테 왜……!”
우리 아기한테 왜.
“비켜! 내가 뭘 어쨌다 그래?”
나정에게 떠밀리고 주춤하던 여진은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곁에 있는 태주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태주 씨만 모르면 돼. 태주 씨만 날 이해해주면 돼!
“네 기억이 얽히고설켜 뒤죽박죽 잡탕이 된 걸 왜 나한테 따지고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