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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55화 (55/60)

전남편이 부임했다 55화.

“뭐……?”

“너 내가 우습니? 네가 삼 년 전에 고재영이랑 자놓고서, 왜 가만있는 내 머리채를 끌어 잡냐고!”

나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여진이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너 혹시 태주 씨 앞에서 일부러 쇼하는 거 아냐? 머리가 고장 난 척,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척, 피해자인 척! 아닌 척! 꿈 깨 강나정.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네 과거는 달라지지 않아. 넌 남편 친구랑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 고재영이랑 몸을 섞ㅇ……켁!”

말을 잇던 여진이 컥 숨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태주가 그녀의 모가지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성마른 눈을 빛냈다.

“커걱…… 컥!”

여진이 거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태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정이 병원에 입원해있던 열흘. 그 안에 여진을 만나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태주가 그러지 않은 건, 실제로 여진을 만났을 때 이성의 끈을 놔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간 여진이 저질러온 온갖 악행을 긴밀히 추적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마땅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 태주는 그것으로 여진을 단죄하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제 발로 나타난 것이다.

태주는 이대로 여진의 목이 두둑, 부러지는 상상을 했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태주 씨!”

나정이 재빨리 태주의 팔을 붙잡았다. 노여진 때문에 태주에게까지 흙탕물이 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만해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애예요.”

“…….”

“응? 태주 씨.”

나정이 한 손으로 태주의 등을 덮었다. 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태주의 마음을 동하게 한 걸까.

곧이어 툭, 손아귀의 힘이 풀어지며 여진이 떨어져 나갔다.

헉. 헉…….

바닥에 주저앉은 여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신 이 집 앞에 얼씬도 하지 마.”

나정이 서늘한 낯으로 경고했다.

“네가 한 짓은 법정에서 명명백백히 가려지겠지. 그때까지 마음 졸이면서 기다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노여진 너야. 네가 한 짓 고스란히 다 되돌려 받게 될 거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까지.”

“……웃기지 마.”

아직도 우길 힘이 남은 건지, 여진은 연신 기침을 쿨럭이며 나정을 노려봤다.

“아가씨!”

그때였다. 검은 세단에서 내려선 김 비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섰다.

“뭐 해. 봤으면 일으키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은 여진이 그를 향해 꽥 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고재영이 깨어났답니다.”

상체를 수그린 김 비서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뭐?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한 여진이 황급히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같은 시각 병원은 난리였다.

깨어난 재영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쳐들어온 일가친지들과 의료진이 한데 뒤섞여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아이고! 아이고! 개중에는 장례식장에서나 들을법한 곡소리를 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삼 년. 자그마치 삼 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호흡기에 의지한 재영은, 희미하게 눈을 깜박이거나 손을 들어 보이며 정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보호자 아닌 분들은 다 나가주세요.”

“친척분들은 휴게실로 이동해 주세요!”

의료진들이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잠시 후 곡소리를 하던 친지들이 병실을 떠나고 의료진들은 한결 쾌적한 환경에서 재영을 살필 수 있었다.

서너 시간의 걸친 긴 검사마저 끝나고 마침내 의료진까지 모두 자리를 비웠을 때. 그때 재영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났음을 실감했다.

처음엔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도 버거워 겨우 눈만 깜박이는 수준이었는데. 이제 점차 몸에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엄마…… 나정이는.”

그리하여 한참 만에 재영이 더듬더듬 뱉은 첫마디는 나정의 이름이었다.

사고 당시 보조석에 탔던 나정의 상태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얘가! 일어나자마자 그 기집애를 왜 찾아! 네가 걔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런데 왠지 돌아오는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 후 어머니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재영은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내가, 누구랑 바람, 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누운 채로 헛웃음을 짓는데, 돌연 병실로 의료진들이 들이닥쳤다.

“고재영 님. CT 찍으러 가실게요.”

어딘가 위압적인 분위기의 남자 간호사들이 재영의 침대를 붙잡았다.

***

“안녕? 고재영 씨.”

재영이 끌려간 곳은 CT 촬영실이 아닌, 병동 지하에 공실로 남겨둔 물리 치료실이었다.

“재영 씨 나 처음 보죠? 난 그쪽 잘 알아요. 그쪽이 절대 깨어나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란 사람이 나거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재영이 여진을 향해 더듬더듬 물었다.

여진은 대답 대신 싱그럽게 웃었다.

“내가 왜 당신을 우리 재단 병원에 집어넣었겠어. 혹시 모를 이런 날을 대비한 거지.”

“뭐…… 무슨…….”

“왜 다시 깨어났어요. 괜히 일만 복잡해졌잖아.”

여진이 문 앞을 지키고 선 가드와 김 비서를 흘긋 본 뒤, 다시 재영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고재영 씨. 퀵 앤 이지하게 본론만 말할게요.”

“…….”

“당신 어머니. 당신 병간호 하느라 집까지 팔았던데. 이제 고생 그만 시키고 효도해야지.”

“무슨…….”

“그냥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돼요. 그럼 당신 어머니. 손가락 하나로 사람 부리면서 살 게 될 거야.”

“……”

“삼 년 전, 당신이 강나정이랑 불륜관계였다고 말해.”

“뭐, 뭐……?”

재영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가 이내 두어 번 천천히 깜박였다.

“이거…… 미친X 아니야……?”

곧이어 그의 입술을 뚫고 적나라한 표현이 떨어졌다.

오케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여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수긍했다,

그리고 가죽 케이스에서 약물이 담긴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이건 간편하게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주사예요. 혹시 이런 날이 올까 봐 따로 구해서 가지고 있었거든.”

비, 상, 용, 으, 로. 여진이 악랄하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재영을 향해 주사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때 닫힌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형사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우태주? 강나정……? 형사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여진의 눈이 팽창했다.

“니들이 어떻게 여길…….”

“비서는 너만 있는 게 아니거든.”

나정이 넋 나간 여진과 대치하고 섰다. 나정의 뒤로 태주와, 태주의 비서, 하 회장의 수행비서가 보였다.

“이거 놔! 놓으라고!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알아……?!”

형사들에게 팔을 붙잡힌 여진은 병원 로비를 가로지르는 내내 악을 썼다. 그녀의 뒤로 묵묵히 끌려가는 김 비서가 보였다.

“김 비서님! 지금 당장 아버지한테 연락해요! 김 비서! 야! 뭐 하는 거야! 당장 연락하라고!”

“거참. 시끄럽네. 그만 좀 합시다. 예?”

참다못한 형사가 빙글 돌아섰다.

“당신 잡아가라고 신고한 게 누군지 알아? 당신 아버지 노성훈 회장이야!”

뭐……?

순간 여진은 발밑의 세상이 푹 꺼진 듯,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아버지가…… 어떻게 날 버릴 수가 있어……?

“노여진 씨. 정원표 박사 사주해서 기억 제거 장치 갈취했죠? 그걸로 강나정 씨 기억 조작했고?”

“…….”

“삼 년 전에도 정 박사 산하 연구소에서 의뢰자 동의 없이 기억 조작, 은폐, 뭐 그런 걸 하셨네요? 에, 이건 또 뭐야? 탑차 기사 매수해서 차 사고도 냈어요??”

태주로부터 넘겨받은 증거자료들을 휙휙 넘기던 형사가 이내 여진을 위아래로 보며 혀를 찼다.

넋이 나간 채 서 있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여진은 재빨리 태주에게 매달렸다.

“태주 씨! 아냐, 내가 그런 거 아냐! 알지? 이건 모함이야!”

태주에게선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가…… 강나정! 네가 말 좀 해줘! 친구끼리 사소한 다툼이었을 뿐이라고! 별거 아니라고!”

역시나 나정도 자신을 차갑게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여진은 밟고 지탱할 땅이 없는 우주에 홀로 부웅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환자들이 둘러앉은 병원 브라운관 TV에서 아버지 노성훈 대표의 얼굴이 지나갔다.

노성훈 대표 전격 구속

위기의 J그룹, 정관계 비리 줄줄이 소환…… 대통령 조사 임박!

속보니 특보니 하며 낱낱이 죄가 까발려지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던 여진은 정원표 박사가 모든 죄를 자백했다는 헤드라인을 보고 질끈 눈을 감았다.

삐-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여진은 가만히 서서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했다.

이렇게 잡혀들어가면 몇 년을 썩을까.

다시 나왔을 때 태주 씨를 찾아가면 날 받아줄까.

그럼 그때 다시 결혼하자고 해……?

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어야 우태주를 가질 수 있을까.

“우태주, 우태주, 우태주…….”

결국 돌고 돌아 모든 원점은 우태주였다.

여진은 멀리서 나정을 비호하는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남자로 인해 비롯된 모든 것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저를 포박하려는 형사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숨겨둔 주사기를 스스로의 목에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악!”

“노여진씨!”

형사들이 일제히 소란해졌다.

난리통 속에서 쓰러진 여진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건, 오직 나정뿐이었다.

***

J그룹은 엮이지 않은 곳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온갖 정관계 비리와 성스캔들의 온상이었다. 전문가들은 향후 N년 내 J그룹이 완전한 몰락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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