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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56화 (56/60)

전남편이 부임했다 56화.

한편 좁혀 오는 수사망에 겁을 먹은 정원표 박사는 삼 년 전 나정의 기억을 조작한 사실을 남김없이 자백했다.

그가 깨끗하게 자백해준 덕분에 여진의 죄는 더 명확해졌다.

더불어 그는 태주와 나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만남을 청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그와의 만남에 부정적이던 두 사람도 그가 간곡히 청해오자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정원표 박사와의 만남은 며칠 뒤에 예정되어 있었다.

좌우당간 이 충격적인 사건에 세간이 한차례 떠들썩해지며, 나정을 아는 사람들은 한때나마 그녀를 오해했단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호텔 얼른 다시 복귀해 나정아. 다들 너 기다리고 있어. 부 총지배인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대.”

보나 말에 의하면 호텔은 완전히 발칵 뒤집혔었다고 한다.

여전히 나정은 소문의 중심이었지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아무도 호텔에서 나정을 내쫓으려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재영은 삼 년 만에 깨어나 보니 ‘친구의 여자를 빼앗은 에라이 천하의 쳐죽일 놈’이 되어있는 것에 깊은 분노를 표출했다. 그 어마어마한 미친X…… 어쩐지 인상이 싸하더라니……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는 재영을 보면서 나정과 태주는 아찔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 잘못 없이 누워있던 재영을 오해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깨어나지 않기를 빌기까지 했다.

그러나 재영은 망할 병원에 삼 년이나 누워있었더니 좀이 쑤신다며, 재활이 끝나면 허심탄회하게 술이나 한잔하자는 말로 되레 부부를 다독였다.

정원표 박사의 자백으로 나정의 무고가 세상에 알려지자,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인 인물은 또 있었다. 태주의 어머니 하 회장이었다.

“그러니까…… 내 ‘전’ 며느리가 삼 년 전에 그런 험한 꼴을 당했는데, 나는 ‘전’ 시어머니로서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도리어 죄 없는 아이를 윽박지르고 미워하고 태주 곁에서 내쫓으려 안달을 냈던 거로군?”

일 초. 이 초. 삼 초.

정확히 삼 초 만에 하 회장이 집무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이런 빠가사리들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어떻게 강나정한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전전 시어머니도 아니고 전 시어머니였던 내가 모를 수가 있어! 당장 가서 태주랑 강나정 데리고 와!”

하 회장이 그토록 격분한 모습을 처음 본 수행비서는 벌벌 떨며 나정과 태주를 하 회장 앞에 끌어다 놨다.

“미안하다. 나정아.”

하 회장의 사과는 군더더기 없이 정직했다.

나정은 제 앞에 고개를 숙인 전 시어머니를 보며 가벼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꿈에서도 꿈꿔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얼떨떨했다.

“그동안 너 혼자서, 아픈 줄도 모르고 아팠겠다.”

하 회장이 나정의 한 손을 끌어다 어루만졌다. 나정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한 번도 하 회장을 미워해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 사랑을 모르고 컸던 그녀에게 한때는 세상 유일한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아이 일은 정말 유감이다.”

“…….”

“너무 맘 쓰지 마라. 아이가 다시 엄마 곁으로 올 거야. 너희 품에 올 거다.”

하 회장은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의 재결합을 허락하겠다는 말을 대신했다.

나정은 눈앞의 하 회장을 보면서, 그리고 제게 사과했던 모든 이들을 떠올리면서, 여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다. 왜 여진이 온갖 지라시로 자신을 매장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런데 왜일까. 나정은 이상하게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좋지도. 너무 슬프지도. 너무 화가 나지도 않았다.

물론 한 사람. 여진을 생각하면 뒷골이 서늘하게 당기기는 했다.

“여진아! 정신이 들어? 여진아……!”

노여진은 스스로 목에 주사를 찔러넣은 후 사흘 만에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했다고 했다.

어머니 이영은 여사의 간곡한 부름에도 여진은 한동안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끔벅거렸다.

“노여진 씨. 정신이 들어요?”

“제가 뭐죠.”

“예?”

“제가 뭐냐고요.”

여진의 첫마디가 너무 황당해서 의사는 순간 말을 잃었다.

“노여진 씨, 본인 이름 생각나요?”

이름? 동그랗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이름이 뭐죠……?”

짐을 뺀 빈방처럼 여진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으윽. 일순 번개가 치듯 머리에서 극렬한 통증이 일었다. 아악! 여진이 비명을 내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여, 여진아! 괜찮아!? 여진아!”

“아악……!”

침대에서 튀어 오르는 여진을 보며, 문밖의 형사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대석의 강력한 권유로, 나정은 한동안 본가에서 지내기로 했다.

“나정아 보일러 좀 올릴까?”

“아냐.”

나정이 생경한 눈초리로 자신의 방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는 건가.

나쁜 일들이 썰물처럼 한꺼번에 제게서 쓸려 내려간 것 같았다.

표면적으론, 모든 일이 해결된 셈이었다.

자신은 억울한 누명을 벗었고 여진은 벌을 받기도 전에, 스스로 자신을 벌했다.

이제는 태주 씨랑 행복해질 일만 남았는데. 기분이 왜 이럴까.

“아빠. 나랑 태주 씨 앨범 안 버리고 갖고 있다 그랬지? 그럼, 혹시 다른 건……?”

“다른 거? 글쎄다. 네가 버린 것들은 죄다 도로 창고에 갖다 놓긴 했는데.”

나정은 곧장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꼬박 두 시간을 샅샅이 뒤졌다. 노끈으로 묶어둔 책들, 안 쓰는 가전 가구들, 뭐가 들었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박스들, 그 틈을 얼마나 뒤지고 훑었을까.

나정은 마침내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한때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보관하던 상자였다.

그 상자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뚜껑을 열었을 때, 나정은 비로소 깨달았다. 왜 모든 일이 해결됐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남아 있어서였다.

“…….”

나정이 보관 상자 안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두 줄. 선명한 두 줄이었다.

잼잼이♡ 202X. 09. 11.

테스트기 뒷면에 자신의 필체로 적어넣은 말이 보였다.

나정은 또 다른 테스트기도 꺼내 들었다.

아이가 제게 찾아온 것이 믿기지 않아서, 매일매일 새로 테스트기를 사서 확인해보곤 했었다.

“……미안해. 아가야.”

네가 엄마한테 왔다 간 기억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지우려고 했었어.

미안해, 아가.

정말 미안해.

나정이 작게 중얼거리며 재빨리 눈물을 훔쳤을 때였다.

뒤에서 태주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왔냐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가 등 뒤에서 나정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나정의 손에 들린 테스트기를 가져갔다.

“……다시 한 번 엄마한테 와줘.”

태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번엔, 아빠가 꼭 지켜줄게.”

나정은 말없이 저를 안은 태주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모든 것이 지나갔기를. 나정은 진심으로 기도했다.

***

“꼭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도 돼.”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 뭐.”

일부러 더 가볍게 말하고는 태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윽고 경찰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이 면담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Memory loss organ의 정원표 박사였다.

“왜 보자고 하셨죠.”

잠시 후, 나정은 정박사를 향해 차분히 물었다. 최대한 격앙된 감정으로 그를 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꼭 해드릴 얘기가 있어서, 염치없지만 형사님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원표 박사가 크게 숨을 삼켰다. 그러고도 섣불리 첫마디를 꺼내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강나정 씨는 가끔씩 이상한 꿈을 꿨을 겁니다. 같은 장소나 같은 사람이 반복되는 꿈을요.”

“그래서요?”

나정은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해마의 기억처리 과정은 실제 수면 중에 시행되는데, 강나정 씨의 경우 신경회로가 완전히 망가져서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자꾸 반복되는 악몽을 꿨던 겁니다. 마치 머릿속에 오류가 난 것처럼요.”

“……신경 회로가 망가졌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정 박사가 무겁게 숨을 골랐다.

“우태주 씨처럼 단순히 기억 일부를 제거한 경우와, 강나정 씨는 다릅니다. 일부러 부작용을 일으키기 위해 전류를 투여한 케이스는 강나정 씨가 유일합니다. 분명히 조만간 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겁니다.”

미안합니다. 정 박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나정은 정박사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운을 뗐다.

“기억이 돌아온 후로, 더 이상 악몽은 꾸지 않아요. 나쁜 조짐도 없었고요.”

“당장은 일시적으로 좋아 보일 수 있겠지만……,”

입을 다문 정박사가 어렵게 다음 말을 꺼냈다.

“지인,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 순으로 기억에서 지워지게 될 겁니다.”

순간 태주는 숨을 멈췄다. 눈동자가 아득하게 내려앉았다. 나정은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흔히 우리가 아는 알츠하이머 증상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다만 속도가 훨씬 빠를 거고 징후도 더 나쁠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억을 완전히 잃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나정은 멍하니 물었다. 태주가 그녀의 손을 거머쥐었다. 와닿는 시원한 감촉에 나정이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일으켰다.

“성공을 보장할 순 없지만, 수술을 받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대신 최고의 뇌수술 전문의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나정이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수술이 성공할 확률은요?”

곧 정박사에게서 인생을 걸기엔 너무도 야박한 숫자가 돌아왔다.

“삼십 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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