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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57화 (57/60)

전남편이 부임했다 57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태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태주는 마치 정박사를 만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의연했다.

“나 수술 받을래요.”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그럭저럭 맛있는 저녁을 사 먹고,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를 고른 날이었다.

카페 창가 자리, 맞은편에 앉은 나정의 입에서 수술이라는 말이 불거진 순간, 태주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즉답을 내뱉었다.

“안 돼.”

“받을래. 수술받고 싶어요.”

두 사람의 아슬한 시선이 허공에서 몇 초간 부딪쳤다.

“안 돼.”

시선을 내리깐 태주에게서 다시 부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정은 그가 왜 회의적인 태도를 고집하는지 잘 알았다.

정박사가 말한 수술의 성공확률은 삼십 프로.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혹은 예기치 않은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아마 태주는 그 말이 내내 걸렸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나정은 밤마다 자신을 다독여 재우고, 홀로 거실에 나가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던 태주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태주의 등에는 아무것도 지워져 있지 않았는데, 그 넓은 등이 왜 그렇게 무거워 보이던지.

“태주 씨가 뭐라고 하든, 난 수술받아요.”

나정은 전에 없이 고집을 부렸다.

“확률이 삼십 프로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설마 죽기야 할까요.”

일부러 더 가볍게 말했다. 일상대화처럼. 농담처럼.

그게 태주를 화나게 했다.

“네 마음대로 해.”

태주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정의 시선이 그를 좇아 움직였다.

이윽고 딸랑- 출구에서 예쁜 종소리가 났다.

홀로 남겨진 나정은 한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지인,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 순으로 기억에서 지워지게 될 겁니다.’

호텔 사람들. 보나. 아빠. 태주 씨. 속으로 잊혀질 순서를 헤아리다, 이내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자꾸만 엄지로 다른 손 엄지를 매만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눈앞의 코코아에서 어느덧 온기가 사라졌다. 나정은 몸을 일으켰다.

딸랑-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잿빛으로 변한 세상을 보고 살짝 눈동자가 부풀었다.

눈이었다. 올해는 눈이 유독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정은 뺨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결정이 내심 반가웠다.

“강 나정.”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조심스레 제 손을 거머쥐었다.

“미안해.”

손깍지를 끼며 태주가 묵직한 사과를 건넸다.

나정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혼자 가버린 줄 알았어요.”

“너만 두고 어떻게.”

“그럼 다시 들어오죠. 추운데.”

나정이 별스럽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강나정.”

태주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한동안 말없이 빤히 내려다봤다. 나정의 가지런한 눈썹 위로 눈송이가 떨어졌다. 태주가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눈송이를 녹였다.

“왜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 해요?”

“수술받지 마.”

“뭐야, 그 얘긴 아까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받지 마.”

큼직한 손이 나정의 뺨을 감쌌다.

“수술 같은 거 안 받아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잖아.”

“지금은 멀쩡해도 언제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잖아요.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이 몽땅 날아가면 어떡해요?”

그때는 정말 손도 쓸 수 없을 텐데.

“언제 기억을 잊을지 몰라서 내내 불안에 떠느니, 그냥 편하게 수술받고 싶어요.”

태주가 시선을 끌어내렸다.

“넌 다 잊어도 괜찮아. 내가 대신 기억하면 되니까.”

담담한 목소리가 하얀 입김과 함께 나정에게 밀려왔다.

“네가 뭔가를 잊어버릴 때마다 매일 새로 알려줄게.”

“내가 태주 씰 잊으면요?”

“몇 번이고 자기소개를 할게.”

태주는 묵묵히 대답했다. 그 모습에 욱신, 마음이 아파왔다.

“그러다 내가 완전히 모든 기억을 잃으면? 하나씩 하나씩 지워가다, 나중엔 내가 태주 씨 사랑했다는 것까지 까먹어버리면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태주가 코트를 벗더니 추워 보이는 나정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공중에 흩날리던 진눈깨비가 코트 자락 위로 달라붙었다.

“네 기억이 사라지면, 사라진 그곳에 더 예쁜 기억을 심어줄게.”

나정은 일렁이는 눈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결국 나를 잃는 게 겁나서, 나한테서 잊혀지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다.

“내가 죽을까 봐 그렇게 겁나요?”

나정이 검지와 중지로 태주의 날카로운 콧대를 가볍게 쥐었다.

당돌한 행동에 태주는 살짝 동요했다.

“기억이 전부 사라지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게 놔두기 싫어요. 태주 씨의 어제, 태주 씨의 오늘, 태주 씨의 내일. 빼곡하게 내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가끔씩 꺼내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남들처럼 살 거예요. 누가 뭐래도 수술받을 거야. 그렇게 알아요.”

“만약 잘못되면.”

“그럴 일 없어요.”

나정은 단호히 말을 잘랐다.

“끝까지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그 약속 꼭 지킬게요.”

자. 나정이 태주의 앞에 악수하듯 한 손을 내밀었다. 태주는 잠자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두 손이 틈새 없이 빠듯하게 맞물렸다.

그 후 몇 주간은 출국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나정은 호텔을 그만뒀다. 작은 송별회가 열렸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정의 퇴사를 아쉬워하며 건강과 안녕을 빌어주었다.

나정이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팀원 중 보나가 유일했다. 직원 숙소에서 짐을 빼는 날, 보나는 유난히도 나정에게 틱틱거렸다.

“보나야. 너 이거 쓸래?”

나정의 손엔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향수가 들려 있었다. 향이 너무 좋다며 보나가 종종 빌려(훔쳐) 쓰던 향수였다.

“아. 이것도 너 필요하면 가져.”

“루비 귀걸이? 그거 네가 제일 아끼는 거잖아. 특별한 날만 하고 다닌……,”

“난 이제 필요 없어.”

나정에게서 무른 대답이 돌아왔다.

“야. 너 왜 그래? 누가 이딴 거 달래?”

어째서일까. 기뻐할 줄 알았는데 보나는 도리어 화를 냈다.

“네가 수술받고 돌아와서 다시 쓰면 되지. 왜 자꾸 나한테 다 떠넘겨?! 아까부터 가방이며 화장품이며! 옷이며! 왜 갑자기 이렇게 인심이 후해지셨냐고!”

“보나야…….”

“난…… 난 절대 남이 쓰던 거 안 써! 알아 이 계집애야?!”

보나가 휙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정은 말없이 커다란 이불 덩어리를 내려다봤다.

“미안해. 너한테 다 떠넘기고 가서.”

“…….”

“근데 다시 못 돌아올 경우도 생각해야 하니까.”

잠잠히 내뱉은 말에 보나가 홱 몸을 일으켰다.

“나쁜 년! 너 정말 나빴어! 지가 무슨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인 줄 알아! 뭐? 못 돌아올 경우를 생각해!? 그런 말 할 거면 우 총 앞에서 강한 척, 센 척이나 말든가!”

보나는 나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말을 잘못했어.”

나정은 쓰린 속을 감추며 웃었다. 그게 보나의 눈에는 더 안쓰럽게 보였지만.

***

숙소에서 뺀 짐은 본가가 아닌, 태주의 단독주택으로 옮겼다. 태주가 꼭 이곳에 갖다 놓으라고 어울리지 않게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술이 끝나자마자 이 집에 들어와 함께 살자는 말도 덧붙였다.

혹시 수술이 잘못될 경우는 아예 배제하고 던진 말이었다.

“태주 씨. 우리…… 그거 할까요?”

짐 정리 후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던 나정은 불쑥 입을 열었다.

태주는 처음에 그 말의 의미를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나정의 입이 열렸다.

“나 안아줘요.”

안기고 싶어.

나정이 그를 향해 처연한 시선을 보냈다. 그 눈빛은 어쩐지 태주의 갈증을 일게 만들었다.

소파로 다가선 태주가 한 손으로 나정의 머리를 받치곤 그녀를 소파에 뉘였다.

침대로 가지 않아도 돼요. 여기서 안아줘요.

좀 더 꽉 나를 안고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말해줘요.

나정이 거듭 부탁해왔다.

태주는 그녀의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듯 깊숙이 입을 맞췄다. 나정의 벌어진 입 안으로 자연스럽게 제 숨결을 밀어 넣었다.

볼 안쪽 살을 건드리는 뭉근한 혀의 놀림에 나정은 사르르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아득했다.

대담하게 빨아들였다가, 다시 감미롭게 휘감았다가. 태주의 키스는 종잡을 수 없어서 더 나정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

그때 어디선가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나정의 상의 속으로 들어갔던 태주의 손이 멈칫, 정지했다.

멋쩍어진 나정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핸드폰 알람이에요. 얼른 끄고 올게요.”

그녀가 자신을 짓누르던 태주를 살짝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태주는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도베르만처럼 갈망 어린 눈으로 나정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

핸드폰 알람은 테이블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정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태주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런데, 나정이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냉장고 앞이었다.

양문 냉장고를 활짝 연 나정이 그대로 멈춰 선 채 안을 들여다보았다.

핸드폰 벨소리는 계속 요란하게 울려댔다.

“……나정아.”

태주가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정이 고개를 돌렸다.

“나 뭐 가지러 왔었죠?”

태주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흔히 우리가 아는 알츠하이머 증상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다만 속도가 훨씬 빠를 거고, 징후도 더 나쁠 겁니다.’

태주가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알람을 껐다. 그런 후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자, 나정은 민망한 듯 미소 지었다.

“뭐 필요하다 그랬죠?”

“이거.”

태주가 냉장고 안에서 맥주 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곧이어 나정과 빤히 시선을 섞다,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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