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8화. (본편 完)
“나정아. 아빠도 농장 일 정리되는 대로 따라갈 테니까, 우 서방이랑 먼저 들어가 있어.”
공항은 언제나 헤어짐을 맞는 사람들로 붐볐다.
대석이 딸의 손을 차마 놓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한번 안아볼까? 우리 딸.”
그가 나정을 끌어안았다.
나정은 따뜻한 대석의 품 안에서 숨을 들이켰다. 아빠 냄새. 너무 좋다.
“우 서방. 우리 나정이 좀 잘 부탁해.”
곧 대석이 듬직한 사위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었다. 그 무렵 안내방송이 울렸다. 곧 출국 게이트로 이동해야 했다.
“나정아!”
그때 멀리서 두 팔을 펄럭이며 나타난 사람은, 보나였다.
“보나야? 송준 팀장님?”
나정이 제 앞에서 헉헉 숨을 고르는 두 사람을 보고 눈을 키웠다.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못살아! 헉, 헉…….”
한동안 거친 숨만 몰아쉬던 보나가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했다.
“우씨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너 숙소 나가는 게 서운해서 내가 좀 틱틱거렸기로서니, 어떻게 간다고 말도 안 하고 가!?”
“나 문자 했는데…… 못 봤어? 너 호텔에 있을 시간이라,”
“지금 호텔이 대수야! 네가 떠나는 마당에!”
보나가 나정을 냅다 끌어안았다.
“나쁜 기집애! 잘 다녀와! 기다릴게!”
“……응. 고마워.”
두 여자가 한동안 애틋한 포옹을 주고받았다.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가만히 서 있던 송준이 두 팔 벌려 안으려는 시늉을 하자, 태주는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곧 볼 텐데 뭐하러.”
그에게서 시니컬한 한마디가 돌아왔다. 하여간 매정한 놈. 송준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잘 다녀와, 나정아!”
“딸, 도착하자마자 전화하고.”
잠시 후. 나정은 생경한 눈빛으로 저를 배웅하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다시 웃으면서 만날 수 있을까.
……돌아올 수 있을까.
묘한 기분에 젖은 나정이 이내 태주의 손을 잡고 게이트로 들어섰다.
***
5년 후.
“안 먹는다니까! 치워!”
J그룹의 몰락을 점쳤던 전문가들의 예언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여진이 내던진 식판을 치우는 이영은 여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이전의 콧대 높던 사모님의 행색이 아니었다.
“왜 이래, 가만히 좀 있어! 엄마도 정말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침대를 벗어나려는 여진과 몸싸움을 하던 이 여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누가 엄마야? 아줌마 미쳤어!? 당장 여기서 나가! 꺼지라고!”
여진이 초췌한 얼굴로 고래고래 괴성을 내질렀다.
5년 전 여진은 감옥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병원에 있었다.
지난날 스스로 제게 찔러넣은 약물은, 뇌 변연계에 영구한 손실을 입혔다.
여진의 기억은 매일 같이 리셋 됐다.
기껏 상대방의 얼굴과 이름을 인지시켜도 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이 완전한 ‘無’의 상태로 돌아갔다.
여기가 어디죠……? 매일 아침 여진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였다.
“이게 다 강나정 그 버러지 같은 계집애 때문이야.”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는 여진의 포악질에 이 여사는 그만 푸념하듯 나정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애초에 네가 그런 수준 낮은 애랑 어울리지만 않았어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 후 이영은 여사의 목소리는 여진의 괴성에 묻혀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강나정이란 이름은 여진의 앞에서 금기였다. 나정의 이름을 들으면 여진은 발작을 일으켰다.
“강나정! 강나저엉……!”
그게 누군데! 왜 그 이름을 들으면 이렇게 속이 발딱 뒤집히는 건데!
“아악, 내 머리!”
여진이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머릴 찌르는 것 같았다.
호출을 받고 달려온 의사가 여진의 상태를 기민하게 살폈다.
“선생님 제발요!”
여진이 의사에게 매달렸다.
“하루 종일 꿈에 나오는 남자가 있어요! 계속 흐릿한 뒷모습뿐이고 얼굴을 절대 보여주질 않아요!”
“환자분 진정하세요.”
“미칠 것 같아요! 왜 그 남자 얼굴이 기억이 안 나죠?! 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냐고!”
여진이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답답해! 답답해 미칠 것 같아! 차라리 날 죽여줘! 차라리 전부 끝내달란 말이야!”
5년 전. 여진은 감옥은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을 받았다.
***
대석은 겨울엔 귤 농장을 하고 여름엔 미니 단호박과 옥수수를 재배했다. 요즘은 날이 뜨거워 혼자서는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 오늘도 이웃들이 대석을 도와 옥수수밭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대석의 딸 나정의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웠다.
“그래서 그때 수술하러 외국 나간 딸은 어디에 있대?”
“들리는 소문엔 제주도 다시 들어와서 산다던데. 딸이 치매라며?”
“나이가 얼만데 치매여?”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이웃은 재빨리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터쯤 떨어진 자리에서 대석이 옥수수를 툭 따서 자루에 담고 있었다.
“아유 미안해, 강 씨. 이이가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와 가지고는!”
다른 이웃이 대신 사과를 건넸다.
대석은 그저 허허 웃으며 옥수수자루를 채울 뿐이었다.
“저렇게 웃기만 하니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어.”
정말 소문이 사실 아냐……? 몇몇이 다시 속닥거렸다.
대석은 그 수군거림을 듣고도 못 들은 척 일에 열중했다. 대인배같이 허허 웃어넘기는 그의 모습에, 이웃들은 나정의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더욱 헷갈렸다.
제주 애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층짜리 단독주택.
한때 태주의 꿈은 이곳에서 나정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여느 부부들처럼 아이를 낳고 키우며, 그냥 보통의 나날들을 보내는 것…….
“아빠! 아빠빠!”
태주가 문을 열고 나오자, 정원에서 맨발로 뛰놀던 일란성 쌍둥이 남매가 꺄르륵 웃으며 달려왔다.
태주는 으차, 하고 두 아이를 양팔에 하나씩 받쳐 안았다.
“우지호! 우나은! 니들 당장 아빠한테서 떨어져!”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태주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돌아섰다.
“이 물귀신 꼬맹이들. 엄마가 몇 번을 얘기해, 스프링클러 근처에 가지 말라고. 저건 너희들 물놀이 장난감이 아니라고!”
화사한 랩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태주의 시야에 들어섰다.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이자, 사랑하는 아이들의 엄마. 나정이었다.
나정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해 둘을 그렇게 애태우던 아이들도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심지어 쌍둥이였다.
“엄마아아아!”
쌍둥이들의 목표가 태주에서 이제 나정으로 바뀌었다.
추추추 돌아가는 스프링클러 옆에서 뛰어논 아이들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홀딱 젖어있었다.
엄마야! 나정이 제게 달려드는 장난꾸러기들을 피해 도망쳤다.
“얘들아, 엄마 옷 젖으면 안 돼. 곧 있으면 송준 삼촌이랑 보나 이모 올 텐데, 또 갈아입을 시간 없단 말이야.”
아이들에게 쫓겨 코너에 몰린 나정은 연신 항복! 항복! 을 외쳤다.
그때 저만치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놀이는 이렇게 해야지.”
“꺄아아!”
아이들이 다시 태주를 향해 달려갔다. 물 호스를 든 태주가 한 손으로 호스 입구를 눌러 아이들에게 사정없이 뿌려댔다.
“비다, 비!”
아이들에게 짓궂은 아빠는 늘 인기 만점이었다. 꺄르륵 꺄르륵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정은 못 말린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정원에 라일락 향기가 그득했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몇 년 전 수술대에 올랐던 날을 떠올리면, 지금 이 현실이 꼭 꿈같았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꿈.
문득 센티해진 기분에 나정은 정원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총 세 그루의 아기 조록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쌍둥이들이 태어난 해에 심은 나무였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지호 나무, 나은이 나무, 그리고 잼잼이 나무.
새순이 움튼 나뭇가지를 보며 나정은 연하게 미소 지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젖었는데 바다로 물놀이 갔다 올까?”
나정의 말에 아이들이 두 팔을 올리며 꺅꺅댔다.
집에서 바다까지는 아이들 달리기로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정과 눈이 마주친 태주가 젖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털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
“현오야. 바람이 세다. 제에발 뚜껑 좀 닫자!”
스포츠카 보조석에 올라탄 영석이 운전석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삼 년 전부터 차현오의 로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직접 운전대를 잡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현오가 연루됐던 정재계 마약 스캔들 역시 J그룹이 배후에 있었고, 현오는 그저 죄 없는 총알받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그는 예전처럼 승승장구했다.
새로 들어가는 영화의 크랭크인을 위해 제주도로 내려온 후, 현오는 내내 들떠있었다. 1일 1 드라이브는 기본이었다. 자신에겐 이곳이 제2의 고향이라나, 뭐라나.
“형. 꽉 잡아.”
“야, 쫌!”
현오가 부와앙 속도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매니저가 옆에서 요란한 비명을 질러댔다. 입 안으로 짭짤한 바닷바람이 마구 밀려 들어왔다.
해안도로 옆으로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는 너무도 투명했다.
끼이익!
질주하던 현오의 차가 갑자기 애매한 지점에서 급정거했다.
매니저는 일단 한숨 돌리며 사자 갈기처럼 뻗친 머리를 정리했다.
그 사이 현오의 시선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어느 한 가족에게 머물렀다.
네다섯 살쯤 돼 보이는 두 아이와 함께 해안을 걷고 있는 부부. 현오의 고개가 그 부부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뭔데? 아는 사람?”
영석은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았다. 현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
“예전에??”
“나 담당하던 호텔 컨시어지.”
곧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뭐야 그게. 영석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가족에게서 시선을 거둔 현오가 피식 입가를 올리며 액셀을 밟았다.
“야! 말을 하고 출발하라고 쪼오오옴!”
영석의 고성과 함께 스포츠카는 다시 빠른 질주를 시작했다.
“아빠! 아빠 쪼개!”
작은 조개껍데기를 주운 지호가 태주에게 그걸 내밀었다.
“쪼개 엄마 줘.”
“치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
“원래 좋은 건 엄마 주는 거야.”
태주가 아들에게 조언하며 곁에서 나란히 걷는 나정을 돌아봤다.
이내 촉. 그들이 가벼운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부부는 모래사장 위에서 놀고 있는 쌍둥이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때가 있어요.”
나정이 태주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불쑥 운을 뗐다.
“정말 이 행복이 내 게 맞나. 가끔 겁이 나요. 전부 다 꿈은 아닌지.”
나정의 눈동자가 천천히 일렁였다. 태주가 그런 아내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매번 확인시켜줄게. 꿈이 아니라고.”
태주가 나정의 이마에, 미간에, 콧날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생생한 그 감촉을 느끼며 나정은 눈을 감았다. 이내 입술 위로 태주의 입술이 포개졌다.
마지막 입맞춤은 조금 전 것보다 훨씬 더 짙고 애틋했다.
“쌍둥이들. 오늘 아버님 댁에 맡길까. 나 당신이랑 침대에서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쌍둥이들이 있으면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아이 아빠가 되더니 태주가 전보다 능글맞아졌다. 나정은 풋 웃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중간 지점에서 윤슬이 별처럼 반짝였다.
나정은 가만히 이 순간을 만끽했다.
완벽한 아이들, 완벽한 남편, 완벽한 행복이었다.
<전남편이 부임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