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59화.
오해는 사랑을 낳고(외전Ⅰ)
“안녕, 우리 귀염댕이들! 이모 오랜만에 보지!?”
“뽀나 이모!”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나타난 송준과 보나는 쌍둥이들의 격한 환대를 받았다.
“어서 와! 빈손으로 오지. 번번이 뭘 자꾸 사와.”
나정이 해사한 웃음으로 눈앞의 신혼부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나정 씨. 잘 지냈어요? 태주 이 자식이 속 안 썩여요?”
올 초 보나와 식을 올려 새신랑이 된 송준은 집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태주를 공격했다.
“요즘도 매일 야근한다고 호텔에서 자고 오고 그래요? 응? 막 가정을 등한시하고?”
“시끄러워. 들어가.”
태주가 시니컬하게 송준의 등을 떠밀었다.
송준과 보나가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 정착하며 예전처럼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네 사람은 분기별로 꼭 한 번씩은 식사 자리를 갖곤 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집 참 좋다. 넓고, 깔끔하고…….”
보나가 응접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송준은 아이들과 위층에 있었다. 간간이 쌍둥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뽀로로 흉내를 내는 송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는 의식처럼 집안의 모든 공간을 둘러본 후, 다이닝룸 옆에 딸린 주방으로 향했다. 혼자서 음식을 준비할 나정을 돕기 위해서였다.
“내가 뭐 도와줄……,”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보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태주 씨 이러지 말아요. 여기선 좀 그래요…….”
“네가 그럴수록 난 여기가 더 마음에 드는데.”
예쁜 접시들을 진열해둔 그릇장 앞으로 밀려난 나정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붉어진 뺨과 갈 곳을 잃고 요동치는 눈은 매번 태주를 자극했다.
“생각나?”
“뭐, 뭐가요.”
“어젯밤에 여기서 우리가 했던 짓.”
“악, 몰라요. 그런 거 말하지 말아요.”
나정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휙 돌렸다.
태주가 그런 나정의 고개를 다시 끌어와 입술을 감쳐물었다. 곧 농밀하고 끈적한 키스가 이어졌다.
“보나가 보면 어쩌려 그래요.”
“어젠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
“어젠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지금은 집에 손님도 와있ㄴ……,”
순간 보나의 인기척을 느낀 나정은 황급히 제 몸에서 태주를 떼어냈다.
아. 무방비하게 있다가 나정의 손에 밀쳐진 태주가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나가요 얼른. 빨리!”
나정은 정원과 바로 연결되는 주방 후문으로 태주를 내보냈다.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태주의 미간이 살짝 그러모아졌다. 그가 방금까지 나정을 안고 있던 오른손을 아쉬운 듯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내쫓긴 대형 사모예드 같았다.
“들어와. 태주 씨 내보냈어…….”
나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보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 어…….”
이내 보나가 뻘쭘한 표정으로 주방 안에 들어섰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하지 그랬어…….”
그 말에 더 민망해진 나정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난 몰라.
“미안. 내가 태주 씨 몫까지 사과할게. 요즘 왜 저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지 몰라…… 시도 때도 없이, 정말 민망하게…….”
“좋겠다…….”
“어?”
나정이 잘못 들었나 해서 고개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박장대소를 하면서 자신을 놀렸을 텐데. 보나의 반응이 어째 이상했다.
“나정아. 실은 나 너한테 말 못 한 고민이 있는데.”
“고민? 얘기 해봐. 뭔데?”
“그게…….”
보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때 2층에서 송준이 뽀로로 성대모사를 하며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어? 순간 울컥한 보나가 속에 있던 말을 내던졌다.
“저 뽀로로 새…… 아니, 소송준 저 인간이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어!”
***
송준과 결혼한 지는 일 년이 채 안 됐다.
물론 연애 기간이 길긴 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송준과 자신은 아직 꿀 떨어지는 신혼이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잠자릴 피하는 거냐고……!’
송준은 보나가 맞은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태주, 나정 부부와 와인 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었다.
저 얄미운 인간.
보나는 정확히 6개월 전부터 송준과 부부관계를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송준이 자신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나 못 할 것 같애.’
‘보나야. 오늘은 서재에서 혼자 자도 돼?’
베개를 안고 서재로 달아나는 송준을 보며, 보나는 자존심이 상해 눈물이 다 났다.
‘다른 여자가 생긴 게 분명해.’
얼마 전 송준의 차에서 못 보던 립스틱을 발견했다. 여자들에게 국민템으로 통하며 누구나 집에 하나쯤 쟁여둔다는 바로 그 립스틱이었다.
보조석 수납 칸에서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의 충격이란.
보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샐러드가 송준인 양 포크로 푹푹 쑤셔댔다.
송준은 전형적인 낮져밤이라서, 밤마다 늘 제게 황홀경을 선사해주곤 했다.
게다가 성욕도 강한 편이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보나는 송준과의 관계에서 큰 불만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잠자리에서 과한 이벤트(?)를 즐기는 두 사람은 환상의 짝꿍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그 짓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부글부글 끓고 비참해 죽을 것 같았다.
“여기. 크림 묻었어.”
그 와중에 태주가 나정의 입가를 엄지로 닦아주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엄지에 묻은 크림을 제 입으로 가져가며 태주는 여전히 나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보나가 앞에 놓인 샐러드를 송준이라고 생각했듯이, 태주의 눈에는 나정이 먹음직스러운 생크림 케이크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아까 하던 건 밤에 마저 하자.
보나는 태주가 나정의 곁을 지나치며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
홧홧해진 얼굴을 은근슬쩍 손부채질하는 나정을 보며 한편으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녕 저들이 결혼과, 이혼과, 재혼을 전부 거치고 쌍둥이 아이까지 양육하는 부부가 맞단 말인가. 그러기엔 서로 너무 좋아죽는걸. 진짜 신혼은 오히려 저들 같았다.
나와 소송준, 아니, 나와 똥준 씨도 저렇게 뜨거웠던 때가 있었는데…….
송준과 처음 선을 넘었던 5년 전 그날 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첫날밤의 시작은 이랬다.
“강나정 주임님이랑 태주요.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죠.”
그날은 간만에 팀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갈빗집 구석 자리에서 송준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나정과 태주 사이에 뭔가 있는 거냐고.
“그, 그, 그걸 어떻게!”
화들짝이라는 부사를 인간화시키면 딱 지금의 저 같을 것이다.
보나는 거짓말엔 영 젬병이었다. 특히 술이 들어갔을 때는 더 그랬다.
“태주랑 강 주임님 원래부터 알던 사이죠?”
“헐……?”
“설마 사귀던 사이?”
“엄마야…….”
“태주가 한국에 있을 때 기억을 지운 것도, 설마 강 주임님 때문인가?”
“쉿! 조용히 해요. 누가 듣겠어요!”
그날, 본의 아니게 송준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나정이랑 우 총이 부부 사이였다는 건, 우리만 알고 있는 시크릿이어야 해요. 절대 어디 가서 발설하지 말라고요……!”
회식이 끝난 후. 나정은 몸져누웠다는 태주에게 죽을 사다 주기 위해 숙소로 떠났고, 송준과 보나는 자연스레 둘이서 2차를 갔다.
왠지 특급 시크릿을 공유한 사이라고 생각하니 서로가 좀 돈독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들은 태주와 나정의 재결합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잔을 부딪치다 보니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해 다시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다시 포장마차로 옮겨 우동 국물에 소주를 두어 병 더 마셨고…… 어느새 보나는 반은 개. 반은 사람. 전설의 반인반수로 변신해 있었다.
“친구들 만나느라 샤샤샤!”
“누가 샤샤샤를 그렇게 박력 있게 해요?”
거리 한복판에서 태권도 격파 자세를 선보이며 샤샤샤를 부르짖었다.
송준은 그런 보나가 왠지 귀엽다고 생각했다. 술김에 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보나는 그날 송준과 잤다.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던 보나의 마지막 기억은, 송준이 자신의 허리를 감아 안고 모텔로 향하는 데서 끊어졌다.
“으음…….”
다음날.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에 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헉?!
몸뚱이가 저절로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뭐, 뭐야. 왜 내가 여기……?”
그녀가 맨몸을 가리기 위해 이불을 끌어당겼다.
어젯밤 급하게 벗어던진 송준과 자신의 옷가지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게 보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벗은 건지 벗김을 당한 건지 기억이 안 났다.
설마 송준 팀장이 날?
보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제 옆의 송준을 내려다봤다. 그는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였다. 이불을 걷어보지 않아서 아랫도리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나의 눈이 세모꼴로 치켜 올라갔다.
네가 감히 날……
“감히 날 덮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