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60화.
오해는 사랑을 낳고(외전Ⅱ)
퍽! 무자비한 발길질이 송준의 복부를 가격했다.
“컥!”
평화롭게 잠을 자던 송준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윽, 뭡니까? 왜 때리는데!”
“몰라서 물어요!? 송준 씨 이 상황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왜 내 속옷이 송준 씨 팬티랑 같이 바닥을 굴러다니는데!? 어째서 내가 송준 씨랑 나란히 모텔 침대 위에서 아침을 맞고 있는 거냐고요!”
“일단 진정해요! 그거 내려놓고!”
송준의 필사적인 외침에 보나는 치켜들었던 모텔 재떨이를 다시 스륵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송준 씨를 덮쳤다고요?”
“몇 번을 얘기합니까. 보나 씨 정말 어제 일 기억 안 나요?”
삼십 분 후. 침대에 걸터앉은 송준이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죽어도 집에 안 들어간다고 생떼 쓴 사람이 누군데. 내 옷에 토하고, 길바닥에 또 토하고, 좋은 데 가자면서 음흉하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진 게 누군데!”
헉……? 돌연 보나의 눈앞으로 어젯밤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안 가. 죽어도 안 가. 똥준 씨랑 같이 있을 거야! 나랑 좋은 데 가요. 진짜 손만 잡고 잘게.’
‘왜 이래요, 보나 씨. 바지 벗겨져!’
반쯤 내려간 바짓가랑이를 필사적으로 추켜올리던 송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나는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아, 아냐! 내가 송준 씨한테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 막말로 여자가 하고 싶다고 해서 그걸 할 수 있어요?! 남자가 협조하지 않으면……,”
“저기요.”
송준이 푸시시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말했다.
“내가 아래에 있었거든요?”
“…….”
“되더라고요.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세상엔 못할 게 없더라고요…….”
돌아오는 송준의 대답에 보나는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두피 속까지 붉으락푸르락 열이 났다.
물론, 평소 송준에게 쬐에끔 호감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내가 송준 팀장을 덮치다니. 보나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때, 잠자코 그녀의 표정을 훑던 송준이 다시 운을 뗐다.
“갑자기 보나 씨가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얘기가 쓸데없이 튀긴 했는데……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가 보나를 지그시 마주 봤다.
“난 어젯밤 일,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뭐, 뭐라고요?”
“솔직히 난 좋았어요. 보나 씬, 아니었어요?”
보나는 저도 모르게 어젯밤 희미한 기억을 되짚었다.
귓전을 스치던 송준의 뜨거운 숨소리, 서로의 몸을 탐색하던 입술의 감촉, 아슬하게 터지던 신음 소리 같은 것들이 떠올라서,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봤을 땐 우리 ‘그거’.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보나는 내심 송준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순서가 좀 꼬이긴 했지만…… 나랑 정식으로 만나지 않을래요?”
난 사실 처음부터 보나 씨 마음에 들었는데. 송준이 소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에 홀려버린 보나는 이내 어색한 손부채질을 시전하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어우 난 몰라! 책임지면 되잖아요! 제가 그렇게 상도덕이 없는 여자가 아니에요! 책임질게요! 됐죠……?”
“아뇨 아직.”
송준이 웃으며 보나를 끌어당겼다.
“그전에 한 번 더 시험해봐요. 우리가 정말 잘 맞는지 아닌지.”
“……좋아요. 일종의 성능 테스트라고 생각하죠, 뭐.”
도발에는 도발로 맞선다. 팽팽히 눈싸움을 하던 송준과 보나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랬던 네가.”
아까부터 말없이 눈앞의 샐러드만 푹푹 포크로 내리찍던 보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정과 태주, 송준의 시선이 한꺼번에 보나를 향해 움직였다.
“보나 씨 뭐? 뭐라고 했어?”
송준이 해맑게 물어왔다.
보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았다.
요즘 들어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급격히 치솟았다 훅 떨어지곤 했다. 도저히 감정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포크 끝으로 송준을 휙 겨냥하며 따졌다.
“그랬던 당신이! 그렇게 날 사랑해주던 당신이! 어떻게 대놓고 다른 여자를 만날 수가 있어!?”
“……어?”
“이 나쁜 자식! 천하의 무쓸모한 바람둥이! 어디 그 여자랑 잘 먹고 잘살아 봐!”
보나가 핸드백에 있던 립스틱을 꺼내 송준에게 던지고는 홱 돌아섰다.
“보나야! 잠깐만……!”
뒤에서 나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나는 그대로 눈물을 훔치며 공간을 벗어났다.
***
“보나 씨.”
“비켜.”
“보나 씨.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응?”
“할 얘기 없어.”
보나는 아까부터 제 앞을 가로막는 송준을 피해 좌우로 이리저리 동선을 바꿔 걷고 있었다.
“보나 씨.”
“…….”
“여보. 진짜 왜 그래.”
여보? 보나가 우뚝 걸음을 세우고 송준의 면상을 노려봤다.
“내가 송준 씨 여보야. 송준 씨 여보는 따로 있잖아!”
“무슨 소리야. 내 여보는 여보뿐인데.”
송준이 손에 쥐고 있던 립스틱을 다시 보나 앞에 내보였다.
“이거, 누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어떤 기집애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송준이 살짝 웃음을 참았다.
“이거 보나 씨 네 거잖아.”
뭐?
“무슨 소리야, 그 립스틱은!”
그 립스틱은, 여자들에게 국민템으로 통하며 누구나 집에 하나쯤 쟁여둔다는 바로 그 립스틱이었다.
보나는 살짝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저 립스틱이 얼마 전까지 화장대를 굴러다녔던 것 같기도 하고.
“내 거 아냐!”
“…….”
“내, 내 거 아닐걸?”
보나의 목소리가 살짝 작아졌다. 송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내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 립스틱 내가 사준 거잖아요, 이 아가씨야.”
“아.”
순간 보나는 저도 모르게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요, 요새 화장할 일이 없으니까 몰랐어. 잠시 헷갈렸다고.”
“응. 헷갈릴 수도 있지. 요즘 보나 씨 늘 생얼로 다니니까.”
송준은 얼른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보나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어쨌든 바람 피우는 거 맞잖아. 그런 게 아니면 왜 맨날 혼자 서재에서 자?”
“서재?”
“내가 서재에서 자기 다른 여자랑 통화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었단 말이야!”
여자랑 통화라니. 송준은 기억을 재빨리 더듬었다.
“혹시 이거 들은 거 아냐?”
송준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앱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러자 옥구슬같이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인 음악과 함께 흘러나왔다.
“명상의- 소리-♫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몸에 힘을 빼고, 제 목소리에 집중해주세요.”
“뭐, 뭐야 이게? 이런 걸 왜 들어?”
당황한 보나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송준을 바라봤다.
“글쎄. 불필요하게 뜨거워진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송준의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였다.
“이거라도 들어야 밤에 잠이 와서. 안 그럼 너한테 가고 싶어서 나 막 몸살 나.”
몸살이 난다고? 보나는 눈을 치떴다.
“그럼 그냥 와서 같이 자면 되잖아! 왜 방도 따로 쓰고, 나한테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해? 왜…… 왜 나랑 그걸 안 하냐고!?”
보나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보나 씨.”
송준이 보나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러곤 한 손을 뻗어 보나의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그 순간 보나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일으켰다.
“알잖아. 내가 왜 그러는지.”
“…….”
“우리 여보. 내가 피하는 줄 알고 서운했구나.”
“…….”
“근데 우리 당분간 자제해야 하잖아. 꼬물이도 있으니까.”
꼬물이. 보나는 송준이 어루만지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아빠의 손이 닿자, 배 속에서 새 생명이 반응하듯 움직였다.
“우리 꼬물이 때문에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알겠지?”
송준의 말에 보나는 왠지 울컥했다. 핑. 눈물이 돌았다.
“알아. 나도 안다고. 머리로는 우리 애기 때문인 거 아는데, 그래도 서운한 걸 어떡해! 요즘 기분이 제멋대로 막 오르락내리락한단 말이야!”
보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임신 6개월. 산모 간보나 님. 그녀의 머리 위로 그런 해시태그 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했다.
“하루 종일 배가 고파. 먹어도 먹어도 허하고, 안 먹으면 속이 미식 거려! 당신이 산모의 고통을 알아? 살은 살대로 찌지, 배는 무겁지. 잘 때 옆으로 돌아눕기도 얼마나 힘들다고! 거기다 화장도 못 하니까 립스틱이 내 건지 다른 여자 건지도 모르겠고! 혼자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진짜 미치겠어. 그 와중에 가장 환장하겠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떡볶이가 너무너무 먹고 싶다는 거야!”
보나의 입에서 하소연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송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런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6개월 동안 한 번도 부부관계를 안 하는 건 너무하잖아! 무슨 도 닦아? 의사 샘도 이제 괜찮다고 하셨단 말이야, 안정기엔 조심해서 하면,”
“안정기?”
안 정 기.
그 말이 송준의 귀에 꽂혔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어디선가 상투스도 들려왔다.
순간 보나는 송준의 눈동자 안에 지난 몇 달간 보지 못한 이채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그렇구나. 안정기구나. 해도 되는구나. 진작 말하지.”
송준은 자신의 어딘가가 불끈하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서재에서 빌어먹을 명상의 소리를 들으며 몸의 열기를 식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가끔 욕구가 끓어오르는 날이면, 일부러 아내를 멀리했다.
첫 임신. 첫 아기라 그런지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아내에게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도리어 화를 키우고 있었을 줄은.
“이젠 안 그래도 된다는 거지.”
“소, 송준 씨?”
“잠깐. 비행기 시간 좀 확인하고.”
핸드폰으로 재빨리 제주도→서울발 비행기를 확인했다. 아직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
“적어도 두 번은 할 수 있겠군.”
송준이 덥석 아내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머머. 보나는 남편의 박력에 심장이 쿵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이 쏙 들어갔다.
끼이익!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차가 호텔로 거칠게 방향을 틀었다.
보나는 처음엔 좀 얼떨떨했고, 나중엔 살짝 웃음이 터졌고, 그다음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가기 전에 떡볶이부터 먹을래.”
“여보. 미안한데 하고 나서 먹으면 안 될까. 나 좀 급한데.”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의 풍광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슴슴한 바람이 자꾸 얼굴을 간질였다. 비로소 보나의 눈에도 그런 것들이 들어왔다. 어루만진 배 속에선 꾸물꾸물 사랑스러운 태동이 느껴졌다.
***
“보나, 송준 씨랑 잘 풀었대요. 아까 그렇게 뛰쳐나가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부부의 침실. 나정이 협탁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안도했다.
보나에게서 온 마지막 톡은 ‘난 지금 천국에 있어.’ 였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송준과 잘 해결한 모양이었다.
나정이 이불을 들추고 안에 들어가 누웠다.
샤워 가운을 걸친 태주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털며 다가왔다.
“보나가 임신한 후로 감정 기복이 큰 것 같아요. 아까도 그렇고…… 이럴 때 내가 가까이 살았으면 자주 왕래했을 텐ㄷ……,”
“그건 그렇고.”
태주가 나정의 위로 올라타며 자연스레 말을 잘랐다.
“왜, 왜 또 이래요.”
그의 두 팔 사이에 갇힌 나정이 얼굴을 붉혔다.
“낮에 하던 건 마저 해야지.”
태주가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웃었다. 저 웃음에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쌍둥이가 탄생했다. 나정은 오늘은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다짐이 무색하게 태주가 마수를 뻗어왔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나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안 돼……?”
저 얼굴에 어떻게 NO를 할 수 있을까. 나정이 YES의 의미로 그의 짙은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창가에 걸린 자개 모빌이 바람에 밀려 짤그랑 짤그랑 소리를 냈다.
긴 입맞춤 끝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전남편이 부임했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