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0화 (1/388)

0. 그는 죽기 직전에 회개한다.

[잿빛 여명회]의 초대 회장.

[칼름부르크 마법 학회]의 수석 대흑마법사.

세계를 멸망시킨 열다섯 악적.

남부 정글과 불모지의 악몽.

다섯 대악마 중 하나. 타이반을 소환한 악마술사.

만마전의 저주 받은 하수인.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악마에게 사바트를 받기 전 이름으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87세. 세계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감다.

16세. 가문에서 쫓겨나 도망치며 노숙하던 그 자리에서

이제 눈을 다시 뜨다.

***

모든 그림자 속엔 악마가 울부짖고, 창백한 태양은 연녹색 하늘을 불사르는 시대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 흑마법사는 죽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마력 오염과 육체의 노화,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은 과도한 마법 사용까지. 흑마법사에겐 죽을 이유가 충분했고, 반면 죽음을 회피할 이유는 턱 없이 적었다.

그는 이 시대엔 특별하게도, 스스로 죽기를 갈구했다.

“오늘이 더 오래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페이자쉬.”

“타이반 님. 저는 리치가 되지 않을 겁니다.”

대륙을 엘프와 드워프들이 질주하던 시절에도 ‘전설 속 이야기’로 전해지던 존재. 고대의 악마. 타이반은 침대에 누워 쿨럭이는 그를 내려보았다. 타이반은 페이자쉬를 한심하다는 듯 비웃었다.

페이자쉬는 그런 그를 올려보며 마주 웃었다. 그를 처음 소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완벽한 호흡의 한 쌍이었다.

“너는 재능이 있다. 리치가 되어 나를 섬겨라. 죽음을 딛고 일어서 죽음을 사역하라. 너 정도 되는 녀석을 이리 잃고 싶진 않구나.”

“흐흐흐, 계약대로 어차피 제 영혼은 6계의 노예가 될 터인데. 어찌 제가 이보다 더 타이반 님을 섬기겠나이까?”

“그럴 바에야 리치로써 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어차피 죽어 하급 악마가 되느니 말이다. 네 마법의 재능이며 경험, 성미, 혼과 백, 영과 성. 네가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이리 헛되이 녹아 사그라트리겠느냐?”

“언데드. 언데드··· 저는 언데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타이반은 혀를 찼다. 아들 때문이다. 이 강인하고 노회한 흑마법사가 돌연 언데드를 혐오하게 된 계기는.

“네 아들은 너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나약했어.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그랬죠. 해골과 썩어빠진 살점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나약했습니다. 녀석은 끝까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죠. 이런 것이 부전자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리 죽을 테냐? 되살린 저 아들을 제 손으로 죽였을 때 처럼?”

“어쩔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리 원한다면 그리 하게 두어야지요.”

타이반은 재밌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네가 네 아들을 그리 아꼈더냐.”

“저도 그걸 죽이고야 알게 되더군요.”

페이자쉬는 씁쓸하게 웃었다. 곧 발작적인 기침이 그의 주름진 목을 울려댔다. 그는 고통스럽게 허리를 꺾고 신음한 뒤에야 간신히 자세를 고칠 수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타이반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페이자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 하십니까 타이반 님?”

“너는 애송이였어.”

“오로지 복수와 광기 뿐이었습니다. 오직 그 뿐이었죠. 당신을 불러낸 뒤 아세아스 고위 의회 귀족들을 하나하나 죽일 때에도. 데인부터 페이른, 남부 정글부터 서부 황야까지 모조리 불사를 때에도요.”

“놈들은 나약했지.”

타이반은 평생 불타오르는 화산처럼 살아왔던 페이자쉬가 이토록 약한 소리를 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페이자쉬는 재밌는 녀석이었고, 유능한 악당이었으니까.

결단력 있고 과감했으며 자존심이 넘쳤다. 하지만 타이반은 친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필멸자의 마지막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페이자쉬와 함께 추억을 곱씹었다.

“이 세르너드 영민들을 모조리 제물 바치고, 예카세트의 봉인을 풀었을 때···”

“아, 영광스러운 나날들이었지. 지옥에서도 이 현세에서도, 그리고 저 천상의 만신전에서도! 우리의 이름은 드높았다. 페이자쉬. 관문이 열리고, 군단이 진군하고, 대기를 불살랐지.”

“베이타서스의 네 계집들도 기억하십니까?”

타이반은 잠시 침묵했다. 페이자쉬는 타이반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기에 채근한 적이 없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던 이들이 위대한 나락의 군주를 다시 지옥으로 몰아내고, 다섯 지옥 관문 중 넷이 파괴되었던 시절.

선신 만신전의 선봉이자 인류의 수호자.

“베이타서스의 네 계집들··· 그래. 네 덕에 그 계집들을 모두 잡아 처넣을 수 있었지. 기억 한다.”

태양과 정의의 군신(軍神) 베이타서스의 네 챔피언들. 성전의 수호기사들이자 교지의 선교자들이며, 준신에 이른 성령들. 가장 위대한 네 천사.

페이자쉬가 스스로를 미끼로 함정을 만들고, 그들을 한 군데에 몰아 지옥으로 함께 떨어지기 전까지. 이 세계는 점차 정화되어가고 있었다.

페이자쉬의 희생으로 인류는 마지막 호흡을 놓았다. 세계는 그 날로 멸망했다. 이제 악마가 세상을 불태우고, 인간의 영혼은 악마의 노리개가 되었다.

주마등이 끝났다. 페이자쉬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세계는 멸망했고, 천상의 만신전은 봉문했으며, 만마전은 영원히 필멸자의 영혼을 고문하겠죠.”

“위대한 승리지.”

“위대하고도 허망한 승리입니다. 타이반 님.”

차라리 이대로 그를 따른다면 그는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지옥의 군주 자리를 꿰차고 당당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타이반이 그를 지지할 것이고, 본신의 힘을 유지한다면 어떤 악마들도 그의 윗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 마음의 군살을 파먹는 개미처럼. 아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으아아악! 아버지!!! 아버지!!!!

끔찍한 절규였다. 전쟁으로 허망하게 잃은 아들의 시체를 다시 부활시킨 날. 자신이 언데드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들은 광기에 빠졌다.

그는 살더미가 될 때 까지 저 스스로를 파괴했다. 페이자쉬의 마력이 이어져 있는 한, 아들은 자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이자쉬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두 번째 목숨을 끊어 주었다. 그는 그날 아들을 두 번 잃었다.

***

페이자쉬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영혼이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평생 동안 아물지 않은 채 피를 울컥대는 상처로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페이자쉬는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밀어 붙이며 입을 열었다.

“타이반 님.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습니다.”

“하라.”

“마력을 조금만 나누어 주십시오.”

“무엇에 쓰려느냐?”

“제가 한때나마 마법사였음을 곱씹으며 죽고자 합니다.”

타이반은 페이자쉬의 작게 말린 앙상한 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편이 좋겠지.

낡은 사진첩을 보며 죽어가는 노인의 심정일 터였다. 전성기엔 그 누구보다 강력한 마력을 가졌던 위대한 흑마법사.

한 줌이라도 마력을 품은 채로 죽고 싶겠지.

타이반은 손가락을 휘둘러 페이자쉬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헐떡이던 페이자쉬의 몸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감사합니다.”

그의 강력한 마력으로 페이자쉬는 잠시 생명이 연장되는 감각을 느꼈다. 달콤한 진통제였다. 그러나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그는 평생 안주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다.

-파지지지직!!!

“무슨 짓을?!”

페이자쉬의 손가락이 매듭지어지고, 순식간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의 몸 주변으로 떠올랐다. 복잡한 문양이 얽히고, 그대로 흩어졌다. 녹색 불똥이 마력의 잔향을 남기며 사그라들었다.

페이자쉬는 그 순간, 타이반에게 양도 받은 모든 마력을 소진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뭐긴. 대천사들을 해방시키는 짓이지. 페이자쉬는 킥킥 웃었다.

-푸욱!!!

타이반의 넓고 단단한 가슴 한 복판에 빛나는 창날이 솟아나 있었다. 타이반은 당장 그 창날을 붙잡았다.

-콰직!

그러나 그의 왼쪽 팔뚝에 박힌 도끼가. 오른쪽 허벅지에 박힌 칼날이. 머리를 향해 내려 꽂히는 망치가 그를 방해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타이반은 페이자쉬의 작은 몸을 바라보았다.

“인류의 배신자다운 마침표 아닙니까? 악마를 배신하는 것이요.”

“페이자쉬!!!!”

“지옥에서 봅시다.”

“와일드캐스트 네노오오오옴!!!!”

-퍼억!

그의 몸에 박힌 네 자루의 무기가 각자 흩어지며, 타이반의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악마 대공의 피보라 사이로, 페이자쉬는 다가오는 네 명의 천사들을 바라보았다.

“아, 눈부시기도 하군.”

“그대는 어째서 우리를 해방시켰는가?”

“이유가 필요한가?”

“필요하다. 그저 변덕이었나?”

페이자쉬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명분, 명분. 이래서 정의로운 것들은 싫어.

“지옥의 감옥은 내가 만들었고, 타이반의 마력을 사용했지. 같은 방식으로 봉인을 풀 수 있었네.”

“그건 과정이다.”

“그래. 그리고 그 결과가 너희의 자유지. 사례는 됐네. 이제 꺼지게나. 조용히 죽고 싶군.”

“네 아들.”

페이자쉬는 눈가를 꿈틀거리며 그들을 올려보았다.

“닥치고 꺼지지?”

“네 아들이로군. 네 후회의 근원이.”

“사람 마음 읽는 거, 안좋은 습관일세.”

“빛은 어떤 그림자도 밝힐 수 있으니. 너는 최후에 정의로웠노라. 세르너드의 페르난데스. 회개는 후회에서 나온다.”

“염병.”

그 말을 마지막으로, 네 대천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꺼져버려라. 이제 이 세계에 무엇이 남아 있겠어?

지켜야 할 인간도, 생명도 없는 것을. 저들도 포기할 것이다. 찝찝한 임무였다고 투덜대며 천상의 만신전으로 돌아가겠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인생처럼. 페이자쉬는 아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슬픔과 광기에 침식당한 탁한 갈색 눈동자를.

“마지막 기회가 있다면.”

아들을 살려내고 싶었다. 아들에게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비로써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었을까?

이 늙은 악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죄악 속에서 후회하며 지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길고, 추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하강이었다.

“마지막 기회가···”

먼 귓가에, 분노한 타이반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기다리게나 오랜 친구여. 내 영겁토록 그대에게 기꺼이 고문 당하겠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악마에게 사바트를 받기 전 이름으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그의 나이 8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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