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
사방이 울창한 침엽수림. 아침 이슬이 툭, 하고 떨어져 페르난데스의 코를 쳤다. 페르난데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 나무 밑동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젖은 담요엔 날선 잎들이 쌓여 있고, 그의 앞엔 모닥불이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페르난데스는 머리를 짚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건 그는 적어도 10년 정도, 지옥 마력에 오염되지 않은 나무라는 것을 본 적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이곳은··· 일종의 이세계나 다름 없었다.
‘호흡에 문제가 없고, 식생이 낯이 익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떤 다른 세계에 어떤 보호 없이 떨어졌다면, 당장 발생하는 문제는 호흡 곤란과 주위 식생의 차이일 것이다.
(1) 영문도 모른 채로
(2) 안전하게 눈을 떴을 때
(3)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이 가능하며
(4) 주위 환경이 적대적이지 않다.
이 네 조건이 충족하기 위해선 기적이 필요했다.
‘기적은 없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으며 담요를 내려보았다. 우습게도,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을 그의 고향의 모직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잡은 그 자신의 손등은,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고 온몸 근육엔 활력이 넘쳤다.
제 아무리 관리를 잘 했다 하더라도 여든을 훌쩍 넘긴 흑마법사가 가지고 있을 몸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는 몸 관리를 잘한 편도 아니었다.
‘둘 중 하나다. 극도의 마력 오염으로 지금 내가 정신이 나갔거나,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이거나.’
둘 중 무엇이 되었든, 앉아서 확인해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밤새 찬이슬 맞으며 노숙한 몸은 뻐근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여든 먹은 흑마법사 페이자쉬인가, 성인식도 치루지 못한 어린 페르난데스인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의문이었다. 정신은 육체에 귀속되기 마련이니, 그는 점점 맑아지는 머리를 경계하며 숲 속으로 걸어갔다.
*
약 한 시간 가량 숲을 걸으며,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가설을 세우고는 다시 불이 꺼진 모닥불 앞으로 돌아왔다.
‘숲이 끝이 없군.’
길을 잃었거나, 심각할 정도로 방향을 잘못 잡았거나, 그도 아니면 숲 모양 지옥에 떨어졌거나. 셋 중 하나일 텐데 그는 첫 번째 가설이 정답이기를 바랐다.
단검 한 자루와 몸 안에 느껴지지도 않는 마력, 반대급부로 파릇파릇하다 못해 날아다닐 것 같은 컨디션. 모든 것이 낯익었다. 마치 70년 전처럼.
‘방향 잡는 것 하나 실패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는 지금 세일링호른 산맥 북서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가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면.
지옥 마력에 세상이 오염되기 전에, 아직 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침엽수림에서 노숙한 기억은 그때 뿐이었다.
그때 대체 어떻게 이 숲을 빠져나갔더라. 왜 이렇게 깊게 들어왔었지?
‘빌어먹을 세르너드 섭정 때문이었지.’
그는 16살 생일에 가출 또는 자살 둘 중 하나를 선택 했어야 했고, 자살하는 편보단 객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었다.
추격대의 눈을 피해 숲 속 깊은 곳으로 도망쳐온 것은 좋았는데, 정작 너무 깊게 들어와 빠져나갈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리석게도.
페르난데스는 그래도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아직까진 움직일 힘도 있고, 무엇보다 아침 숲 속 공기가 대단히 상쾌했다.
근 30년은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소한 문제를 제외한다면.
‘악마 소환에 필요한 마력은 물론이고, 영체 하나 불러내어 길을 물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지금 기껏 할 수 있는 건··· 부싯돌 대신 손가락으로 불을 켤 수 있는 것 정도인가···’
죽었거나, 다른 세상에 있는 존재에게 길을 물을 수 없다면 살아있는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판단하곤 다시 모닥불 앞에 주저 앉아 바싹 마른 육포를 씹었다.
16세 페르난데스는 몰랐겠지만, 여든 노인 페이자쉬는 알고 있다. 흔적을 지우지 않은 채로 모닥불까지 피웠다면 추적자가 반드시 그를 찾아올 수 있으리라는 점을.
그리고 멀리서, 산새들이 놀라 도망치는 소리와,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고 도련님, 이거 격조하셨습니까요?”
콧수염을 깨끗하게 기른 남자가 말 위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보며 이죽거렸다. 귀족을 바라보는 태도로는 대단히 무례했으나, 서자에게 보여주는 태도로는 사뭇 적절했다.
“그래, 찾아 주어 고맙군. 자네 이름이···?”
페르난데스의 말에 남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페르난데스가 그를 조롱한다고 생각한 탓이다.
남자는 자못 위협적으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페르난데스에게 으르렁거렸다.
“도련님. 지금 사태 파악이 덜 되셨나 본데, 당신 지금 여기서 실종 될 거야. 좀 제대로 도망쳐서 실종되지 그랬어?”
“나는 능동적인 사람일세. 나를 능동적으로 ‘실종’시켜 보겠나?”
남자는 인상을 와락 구기며 말에서 내려 칼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다가서는 남자를 향해 검지를 쭉 펴들었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지금 단 하나 있군.”
“마법? 킥킥. 이게 미쳤나?”
“그것 또한 상정 중인 가설 중 하나지.”
남자가 더 이상 페르난데스를 상대하지 않으며 칼을 크게 들어올렸을 때, 페르난데스의 손가락 끝에서 불똥이 반짝였다.
“으억!”
남자는 그대로 몸을 옹송그리며 눈을 움켜쥐곤 주저앉았다. 페르난데스는 몸을 숙여 남자의 손에서 떨어진 장검을 쥐고, 그대로 남자의 허벅다리를 찍었다.
-푸욱!
“끄어어억!”
“바로 부싯돌이다.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작은 불꽃이라 한들, 눈에 닿으면 어찌 아프지 않을까. 자, 이제 선택해보게.”
허벅지에서선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남자는 허벅지를 꽉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페르난데스는 혀를 끌끌차며 그런 남자의 머리를 밟곤 칼로 목젖을 살짝 긁었다.
“능동적으로 실종 되겠나, 수동적으로 끌려 가겠나?”
“사, 사, 살려주십쑈!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요! 쇤네가 감히 도련님을 해치려, 해치려 들었겠습니까요!!”
“암, 그리하려 했겠지. 그래. 살아서 고향 땅을 밟고 싶다 이건가?”
“네, 네!! 제발 살려주십쑈!”
“나 또한 그렇다네. 함께 뜻한 바를 이뤄 보세나. 앞장 서게.”
“네..?”
사내는 그 순간 고통도 잊은 듯 눈을 번쩍 떴나. 기실, 눈이 따끔거리는 것 말곤 시력에 문제가 없는 정도의 작은 불꽃이었다.
사내는 덜덜 떨며 페르난데스가 쥔 칼끝을 바라보았다.
“고향 땅으로 가세나. 내 확인해 볼 것이 있네.”
사내는 페르난데스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
사내는 페르난데스에 의해 꽁꽁 묶인 채, 말을 이끌고 걸었다.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 앉은 채로 아무런 말 없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이 퍽 우습기도 하고, 자신의 신세가 퍽 가련하기도 했다.
“도, 도련님.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영지로 돌아가시면··· 영주님... 아니 섭정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요···? 저깟 촌놈일랑 상관치 마시고 그대로 도망치심이···”
“갑작스레 내게 충성심이 생기었나? 어찌 그러한가?”
‘니놈이 같이 가면 나도 뒤지니까 그렇지!’
사내의 역할은 추적과 살해, 그리고 증거인멸이었다. 아무리 서자라 한들, 영내에서 칼자국 내는 일은 위신에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니 추격을 보낸 것이었고, 추격자가 도리어 붙잡혀 압송되는 꼴이라 한다면 사내는 그대로 죽어 나자빠질 것이 뻔했다.
서자 암살이 드문 일이 아니라도, 대놓고 할 짓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걱정 말게. 자네는 죽지 않을 걸세.”
“무슨 개같···진 않지만 근거 없는 소릴 하십니까요···”
“내가 살아있으면 자네는 죽지 않을 걸세. 그리고 내 생각에 따르면 본인은 근 몇 해 안에 죽지 않을 것 같군.”
완전히 미쳤어. 완전히 돌아버린게야. 사내는 이젠 대화를 포기하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칼에 찔린 다리가 미친듯이 아팠지만, 이따금씩 등을 찔러대는 칼 끝이 그에게 매번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저 햇병아리가 이렇게도 독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모든 의문은 그가 미쳤다는 것 하나로 설명이 가능했고, 사내는 그 의견에 동의하는 두 번째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아니었다.
페르난데스가 미쳤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은 페르난데스 본인을 제외하고도 아직 많이 남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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