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6화 (7/388)

6. 사제가 되다. (여기부터 리메이크입니다.)

페르난데스는 가까스로 베이타서스의 말을 이해했다. 아주, 교묘한 함정이며, 승리에 취해 있을 악마들에게 있어서는 불의의 기습일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잔혹한 짓이다. 실패한 시간선 차원의 모든 영혼들을 지워버리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저건 곧···

[한 존재에 같은 영혼이 중첩될 수는 없다. 본산의 영혼들은 이 세계의 영혼으로 대체될 것이오, 세계는 평화를 되찾으리라.]

“미쳤군! 정의의 신이라는 작자가 그런 짓을 저지르겠다고..? 한 차원의 영혼을 모두 지우시겠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이젠 그런 학살까지? 애초에, 그럴 힘이 있다면 왜 그 전에 시도하지 않았지?”

[나의 딸들의 힘. 그리고 봉문이 온전히 풀린 만신전의 영성이라면 가능하지. 너는 우리의 단검이 될 것이오, 우리는 그리하여 세계의 천을 찢고 다시 기우리라. 따라서, 너는 나의 네 딸들을 구원하라. 그리고 물질 세계의 신앙을 수확하여, 만신전의 봉문을 풀라. 그리한다면 너와 네 아들의 영혼은 구원 받으리라.]

베이타서스는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 듯, 강렬한 유혹을 품은 채로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가능한 일이다.

만신전의 모든 신들이 힘을 모으고, 이 세계에 흩어져 있을 준신들의 영자를 희생한다면. 그리고 그 촉매가 자신이 된다면.

마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보기엔 어렵다. 그는 상념에, 그리고 그 상념보다 더 큰 갈망에 흔들렸다.

아들. 내 아들아. 잔혹하게 희생당한 불쌍한 아이야.

“···당신의 네 챔피언들은 어떻게 된 거지?”

[스스로 준신임을 포기해 지상에 떨어졌지. 한때 반신조차 능가하던 강대한 힘을 모두 잃고, 필멸자가 되어 지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노라.]

“그러니 구하라?”

[옳다. 세계에 흩어진 나의 딸들을 구원하라. 본신의 힘을 잃었더라도, 물질 세계에선 드문 재능을 지닌 바. 그러니 나의 딸들이 내가 네게 주는 조력인 샘이다.]

“그걸로는 부족하지. 이곳이 수평 세계라면 이미 썩을 대로 썩었을 텐데.”

거래라.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는 가장 사악한 악마들과도 불평등조약은 맺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독종이었다.

악마 계약계의 마에스트로. 만일 누군가가 악마 소환 교본을 집필한다면 제 1 저자는 반드시 그의 것이었을 터였다.

선신 따위는 그를 거래와 계약 조건으로 이길 수 없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에도, 베이타서스는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바라는 바를 말하라.]

“힘. 내 마법. 흑마법을 포기하고 난 뒤에도 충분히 보신이 가능한 수준은 되어야 하지.”

[얻으리라.]

“권력. 내가 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당신이 바라는 바를 방해 받지 않을 정도로는.”

[그리 되리라.]

“권능. 내가 명색이 당신의 대리인인데, 그 증거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잠시나마 네게 임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네게 주는 첫 권능이요. 나의 딸들로 하여금 너를 돕게 하리니, 그것이 내가 네게 주는 두 번째 권능이다.]

“아니 이 신이 정말. 어딜 어물쩍 넘어가려고? 목적과 과정을 혼동하지 말자 우리?”

베이타서스는 그의 말에 웃으며 창을 뽑더니, 그대로 그에게 던졌다. 페르난데스가 반응하기도 전에, 창은 이미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는 네 임무가 온전히 마무리될 때 까지 결코 쓰러지지도, 몸을 누이지도, 안식을 찾지도 못하리라. 이것이 네게 부여하는 나의 첫 번째 권능이오.]

불타는 창이 내뿜는 열기에 영혼이 타올라 사그라드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끄으으아아악!!!”

-푸욱!

또 다른 창 한 자루가 나타나 그의 등허리를 파고 들었다. 무릎 꿇은 채로, 비명을 내지르며 페르난데스는 바닥을 할퀴었다.

[내가 네게 임하였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너는 나와 만신전의 대리인이 되었노라. 너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협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으리라. 이것이 내가 네게 부여하는 나의 두 번째 권능이다.]

페르난데스는 격통 속에서 간신히 그가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저 말은 즉, 자신의 격을 희생해 선신 만신전의 챔피언. 즉, 사도로 임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삼켰다. 입을 열 때 마다 영자 구조물이 분해되어 흩어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거래는 성사되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나를 사도로 임명해? 감히 내 영자에 신성을 섞는다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

“끄으으으으윽!!!!”

[그렇다. 만신전의 희망을 네게 걸고 있음에. 오히려 네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노라.]

“끄으으으읍!!!!”

페르난데스는 흙을 움켜쥐고 물어뜯으며 비명을 삼켰다. 더 이상 추해질 수는 없었다. 영혼의 구조가 뒤섞이는 격렬한 고통 속에서,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어차피 베이타서스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입을 열면, 그 통로로 영혼이 뽑혀 나갈 것 같았다.

‘내 아들과 네 딸들을 걸고 하기엔 가히 저속하구나···!’

거기까지 속으로 중얼거리는 데, 베이타서스는 껄껄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영혼은 끝 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베이타서스는 그 모습을 내려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군기를 들라, 페르난데스. 너는 이제 페이자쉬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도다.]

*

마르코는 수많은 악마와 이단, 그리고 마녀를 불태우거나 처형시켜 온, 이단심문관들의 베테랑이었다. 엔마기카로써, 그는 두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는 이적과 사술을 직접 경험한 일이 많았다.

“오···오오···.”

하지만, 동시에 베이타서스의 사제로써. 마르코는 뜨거운 눈물과 탄성이 흘러 넘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만신전이 갑작스럽게 봉문한 이후 언 30여년. 선신 만신전과 물질 세계의 연이 끊기고, 세계에 악마와 이교도들이 만연한 이 시대에.

선의가 짓밟히고 악의가 득세하며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에 백성들이 타락하는 이 시대에!

찬란한 만신전의 휘광과 함께, 성자가 탄생하고 있었다!

“오오···. 주여!”

마르코는 그의 눈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어린 소년을 내려보았다. 압도적인, 거대한 영적 충만함이 이 방 전체를 가득 밝혔다.

소년의 등허리와 가슴에서, 잘못 볼 수 없는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성흔이 알알이 박혀 타들어갔다.

소년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럼에도 고귀한 기도를 멈추는 일 없었다.

“주 임재하시니 우리의 쇠사슬이 마침내 풀리는도다. 우리 모두 구원 받았다. 막토 수페를라우도(진심을 다하여 찬양하라)!”

마르코는 소년, 페르난데스의 앞에 꿇어 앉아 연신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올렸다.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신이 임하였음을 증명하는 영적 충만함이 가실 때 까지.

-털썩.

소년이 마침내 기도를 멈추고 쓰러져 혼절했을 때. 마르코는 소년의 식은땀 가득 한 옆 얼굴을 바라보며 본부에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

교황 성하.

데인 왕국의 변방 오지에 있는 한 시골 마을에서, 주의 임재하심을 직접 목도하는 영광을 누렸나이다.

이리 서신을 먼저 보냄을 용서하소서. 이 늙은이의 손이 기쁨과 충만함으로 떨리는 가운데, 분명 주께서 우리에게 내렸을 이 소년을 어찌 교단에 보고해야 할지 정리하기 지난하였나이다.

이 참람한 배교의 시대에, 주께서 마침내 봉문을 풀고 내려와 선신 만신전의 의를 우리의 세상에 도래하려 하심이 분명하나이다.

하여, 이 소년과 함께 교단으로 복귀하고자 하온데,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믿을 수 있는 수도회는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이므로, 이에 시성 자문단을 소집할 것을 요청하나이다.

···

..

렐리기오사 엔마기카, 마르코 선데일.

*

마르코는 벅찬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직인을 찍고, 편지를 곱게 봉인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향로를 꺼내 불을 피웠다.

-퍼드득.

베이타서스의 신성 주문, 영체 전령이 나타났다. 향로의 연기가 허공에 얽히며 푸른 영체 비둘기가 나타나 편지를 물고 창 밖으로 날아갔다.

마르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그를 축복하듯이, 창 밖의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전령은 이단심문청으로 곧장 날아들었고, 이튿날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장실 데스크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헛소리지···.”

수도원장 베오른은 외눈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최근 이단 사태로 정신이 없는데, 이 미친 늙은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르코는 권한과 등급이 대단히 높은 축에 속하는 이단심문관이었다. 베오른은 한숨을 푹 내쉬고, 교황청을 향해 서신을 작성했다.

물론, 온갖 미사여구를 과감히 삭제한 이후에. 최대한 사실관계에 근거하여.

*

수취인 : 교황 바울4세.

등급 : 준 1급.

처리 : 급령에 준함.

개요 : 데인 왕국의 세르너드 영지에서 주께서 임재하셨다는 보고. (보고자, 엔마기카 마르코 선데일), 시성 자문단 소집 요청. 복자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수도원으로 호송 중.

악마를, 이단을, 마녀를 불태우리라.

최종 승인자 :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장 베오른 실드베인.

*

교황과 시성 자문단이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달리 말해 이단심문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이후였다.

페르난데스가 기절한 지 거의 한달이 다 되어가는 그 때.

페르난데스는 두통과 허기와 복통과 탈력감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

몸에 박힌. 아니, 영혼에 박힌 본능으로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기 전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마력은 여전히 바닥에 메말라 있었고, 전신 근육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목이 말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촉감으로 보건대 침상인 듯 했으나, 어쨌건 이곳이 지옥이거나 감옥이 아니길 바랬다.

-일어났군.

젠장. 누가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무기질적인 석조 건물에 있었다. 꼼꼼하게 축성된 돌벽이 인상깊은, 검소한 방이었다.

눈매가 사악하게 비틀려 있는 노인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유리알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을 가지고 있는, 바짝 마른 사내였다.

그리고 그가 아는 사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보이나 보군. 흥미로워.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대흑마법사 페이자쉬. 이 시간선에 있는 것이 불가능한 인물이다. 더군다나 저건 ‘자신’이 아닌가?

어떻게 내가 날 바라보고 있는 거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머리맡의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그의 식도를 적시며, 이성이 천천히 돌아왔다. 페이자쉬가 있다는 것이 환각이 아니라 가정한다면.

가장 그럴싸하고 가장 절망적인 추측은 다음과 같았다.

Q1. 페이자쉬는 자신과 독립된 인물일까?

Q2. 페이자쉬의 실험으로, 나는 내가 ‘페이자쉬’라고 착각하고 있는 불쌍한 실험체였나?

페르난데스는 날카롭게 페이자쉬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페르난데스가 아닌가?

“아니.”

A2. 아니다.

“너는 페이자쉬가 아닌가?”

-그것도, 아니.

A1.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는 독립적인 존재다.

“흠.”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 그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악하고 비상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수수께끼를 내는 것도, 푸는 것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기실, 마법사들의 공통된 특징이긴 했다. 페르난데스는 고등 마법학과의 논리 시험을 보는 느낌으로 페이자쉬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흥미’를 느꼈다. 그 못지 않게 페이자쉬 또한 이 상황을 흥미롭게 여기는 듯 했다.

“혼과 영 중 하나겠군.”

-그렇다.

“혼 쪽이 갈렸으면 하는군. 영성의 격이 떨어지면 회복이 어려워.”

-나도 그러길 바란다. 역시 ‘나’야. 훌륭하군.

페이자쉬는 피식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따라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인간의 정신체는 네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금 더 복잡하게 파고들 순 있겠지만, 현대 마학의 관점에서 간단한 분류는 [혼], [영], [백], [성]으로 나뉜다.

[혼]은 정신체를 이루는 근간 에너지이자, 탄생과 동시에 부여되는 독립적인 정신적 중심이다.

[영]은 정신체가 살아가며 겪어 짜내어 올린, 정신체로써의 격이다.

[백]은 정신체의 삶 전반에 걸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정의 총체이다.

[성]은 정신체가 살며 얻은 성격과 성미, 고유의 특징이다.

페르난데스는 간단히 사태를 정리하고는 페이자쉬를 바라보았다.

페이자쉬의 추측에 따르자면, 자신은 지금 전생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혼이 나뉜 상태인 것 같다.

그렇다면 원인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거나, 베이타서스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거나.

“혼만 갈렸다면 네가 나와 대화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그렇지. 백과 성에도 수작을 부린 것 같더군. 네가 일어나지 않아서 확인을 못했어. 한번 기억해 보겠나?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과거를 되짚어봤다. 세르너드의 추방자에서, 흑마법사 와일드캐스트로써의 삶.

그리고 악마 추종자들을 모아 이교 단체를 만들고, 악마를 소환해 영웅들을 독살하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재물로 바쳤던 모든 전생의 기억들.

기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응당 일어나야 할 ‘감정’이 없었다.

치열했던 순간들, 통쾌한 복수의 순간들. 자신의 모든 역사가 그저 무기질적으로 ‘읽혀졌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기억은 멀쩡해. 하지만, 감흥이 없군.”

-백은 복제되었고, 성만 나뉘었군. 나 또한 기억은 멀쩡해. 내 쪽은 감정도 남아있지. 빌어먹게 부럽군, 페르난데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군.”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동일하다면, 서로가 도달할 논리 또한 동일했다. 그들은 같은 기억과 사고를 공유하니까.

영혼의 분리는 베이타서스의 작품일 것이다. 그의 정신 중, ‘사악하다’ 라고 판단될 만한 부분을 억지로 뜯어낸 것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화 소리가 들려 찾아왔네. 어린 형제여.”

문을 열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페르난데스가 이미 알고 있는, 이단심문관 마르코와 노인과 중년이었다.

노인은 푸근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검소한 수도복을 입고 있는 사제였다.

그리고 중년 사내는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당장 터질 것처럼 부푼 이단심문관 정복을 입고 있었다.

“누구와 대화 중이었나?”

“생각을 정리할 때, 혼잣말을 합니다.”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 사내는 페르난데스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사내는 잠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악마의 냄새는 나지 않습니다.”

“묵상은 좋은 취미지. 의심하지 말게 형제들. 저 아이는 베이타서스 님이 임재 하셨던 아이일세.”

“항상 의심하라. 이단심문청의 현판에 걸린 첫 문장입니다.”

“언제나 근면한 모습은 형제들의 귀감일세.”

노인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호의가 가득했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거의 받아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페르난데스의 마음속에서 경계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페르난데스를 향해 몸을 숙이고는 말했다.

“아이야. 축복 받은 아이야. 정신이 드느냐?”

“주께서 임하셨으니, 제 정신은 그 어느 순간보다 명정합니다.”

페르난데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노인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노인의 얼굴은 낯이 익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낯이 익다는 것은, 어떻게 되었든 전생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열 여섯일 때 노인이라면, 델피아, 라쿤, 오르키스, 바울인데···.’

저 네 초월자 중에, 이단심문관 마르코와 함께 다닐 수 있으며, 오히려 마르코가 윗사람 대접하 듯 떠받드는 존재는 단 한 명!

‘베이타서스의 교황, 바울 4세···. 이거 첫 시작이 괜찮군.’

페르난데스는 미소 지었다. 그 누구보다 신실하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사제님. 교회에서 저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저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막토(찬양하라)!”

-덥썩.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페르난데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연신 기도문을 읊으며 이 순진하고 신실한 소년의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아,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선신 만신전이 갑작스레 봉문하고, 인류 문명이 이단의 타락한 손아귀로 천천히 물들어가던 30년은···. 인류 문명의 선봉으로써, 이성과 교리의 수호자로써. 노인은 너무 늙고 지쳤다.

“주의 거룩함을 찬미하라···.”

노인의 기도를 들으며, 페르난데스의 입가에 더 깊은 미소가 그려졌다. 교황, 이단심문청, 70년 전의 세계···.

그의 머릿속에 정보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전략, 계략, 계획, 기책, 암수, 함정. 와일드캐스트(방랑마법사)로써의 삶은 언제나 치열하고 각박했다.

여든이 될 때 까지. 그에게 삶이란 한 수, 한 수를 목숨 걸고 착수하는 단 한 번뿐인 도박 체스와 같았다.

교황의 주재 하에 성자로 시성되며 동시에 사제가 되는 것. 이것이 지금, 대전략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그 만의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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