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든 이단들에겐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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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란, 살아 숨쉬는 전투 병기들을 일컫는다. 튼튼한 강철 갑주로 온몸을 감싸고 (물론, 그렇지 못한 기사들도 많지만) 군마를 내달려 적진을 헤집는 인간들.
마법전 전력이 길항을 이루고 있다고 가정할 때, 냉병기로. 그리고 단기 필마로 전장의 흐름을 뒤흔들 수 있는 강자들.
페이른 왕국의 로얄 그리폰 나이츠.
성 몽테그 교리수호회의 십자 구호기사단.
엘븐 트라이던트의 와일드 프린스 하우스홀트.
레바인테르 제국의 임페리얼 아이언하이드.
키라자트 술탄국의 불멸 대대.
명망 있는 기사단들은 그 외에도 더러 있지만, 어쨌건 막강한 인간들이자 하나하나 준귀족 작위를 가지고 있는 ‘푸른 피’다.
문제가 있다면, 편력 기사의 종사는 그다지 유쾌 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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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드래곤스팅 성채에서 출발해서 장장 삼일 간 도보로 글로리데인 시까지 직진 주파 중이었다. 육포와 건량을 씹으며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쭉.
전생에 따르면, 뎀드리자드가 본격적으로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는 계절은 늦은 가을이었고, 지금은 초여름이다. 그들에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제피스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카르테리오 형제가 살아있다면. 우리가 쉬고 있는 시간만큼 지옥을 보고 있을 걸세. 종사여.”
“카르테리오 경과 친밀하셨습니까?”
“얼굴 정도는 알지.”
페르난데스는 무구와 갑주, 그리고 짐가방을 잔뜩 등에 얹고,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반면 제피스는 느긋하게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제피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면 충분하다네. 발타자르. 악마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다고 생각하나?”
“···?”
악마의 머릿수? 세는 것이 의미 없다. 악마란 본디 정신체이므로, 물리적으로 그 수를 셀 수는 없다.
“반면 우리는 한정적이지. 디모니카는 끽해야 서른 명이 안 된다네. 매년 신입을 받아도, 매년 그보다 많은 베테랑들이 전사하지. 헤레티카는? 그들 또한 수백이 안 되지. 수십 명이 지금 훈련을 받고 있고, 그들이 한 사람 몫을 할 때 쯤이면 기백은 전장에서 죽어 나가지.”
제피스의 눈이 깊어졌다.
“친하나? 친하지 않나? 중요하지 않네. 우리가 우리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보다 형제의 목숨을 우선시 하겠다는 맹세나 다름 없어. 지위, 출신, 그리고 분파는 상관 없네.”
“만약에··· 형제가 악마에게 타락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악마의 출현은 마력 오염을 남긴다. 필멸자인 이상 정신과 육신의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빠르든 늦든, 악마의 지옥 마력에 노출된 인간은 반드시 타락한다.
“내 앞에서 악마에 오염된 형제들이 적어도 두 손에 꼽는 것 보단 많았지.”
“그들은 그러면···”
“그들 중 살아 있는 이는 나 뿐일세.”
제피스는 그 뒤로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달리는 말발굽]은 싸구려 여관이었다. 글로리데인에 있는 많은 여관들 중, 특별할 것 없는 여관. 제피스와 페르난데스는 마구간에 말을 묶고 여관으로 들어섰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여관엔 술 취한 여행객과 용병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들을 훑어보자, 제피스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발타자르. 조심하게.”
“아, 네.”
잘 무장한 두 거한이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경계와 의심의 시선이 그들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들은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방 하나.”
“킬킬, 동침하슈?”
“궁금한가?”
“나는 그런 취미 없어서 말이유. 큭큭큭.”
여관 주인의 말에 주위 사내들이 낄낄 웃었다. 제피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동전을 툭 던졌다.
“메를린 은화 반 닢? 거슬러 줄 돈이 없는데.. 며칠이나 묵으슈?”
“삼 일.”
“삼 일이면 구리 동전 다섯 닢으로 충분하외다만···”
“나머진 챙겨라. 혹시 카르테리오라는 기사가 여기에 들른 적 없나?”
“기사 나으리가 이런 싸구려 여관엘 왜 오겠습니까요.”
“왔었다. 사흘 전에. 40대, 콧수염을 다듬은 놈. 금발. 키는 내 어깨 정도.”
“음···”
여관 주인이 뺀질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제피스의 돈주머니를 힐끔거리자, 제피스가 돈을 꺼내려 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단검을 뽑아 여관주인의 손가락 사이에 꽂았다.
-콰앙!
낡은 바 테이블에 단검이 깊게 꽂히며, 순간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너, 감히 기사를 능멸하려 드느냐?”
“흠. 발타자르.”
여관주인은 나무 테이블을 깊게 파고든 단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바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이 촌놈들이 어디서 행패를···”
“촌놈?”
-콰앙!
“컥!”
페르난데스는 몸을 일으키려는 사내의 명치를 짧게 후려쳤다.
사내가 배를 감싸 쥐며 쓰러지자, 그대로 사내의 뒷통수를 잡고 테이블에 처박았다. 호리호리한 몸으론 생각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귀족 모욕죄를 적용 받고 싶은 양민은 거수하도록.”
“이 미친 새끼가. 혼자 뭘 할 수···”
-퍽!
“다음 번엔 집행하겠다.”
페르난데스는 테이블 위의 나무잔을 집어 소리를 지른 사내에게 던졌다. 사내의 앞니가 부러지며 그대로 쓰러져 실신했다. 주점의 사내들은 침을 삼키며 그들을 힐끔거렸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머뭇거림 없이 난동 부리는 자신감이··· 사내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다소 소란스럽지 않나, 발타자르?”
“원래 이런 더러운 놈들은 확실히 밟아 줘야 합니다.”
“···나쁘지 않군. 합격일세.”
페르난데스는 씩 웃으며 여관 주인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는 어렵지 않게 뚱뚱한 여관 주인을 한 손으로 끌어 올렸다.
“컥!”
여관주인은 페르난데스의 손아귀에 들려 바둥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코 앞까지 여관주인을 당기며 으르렁거렸다.
“귀족을 모욕한 죄. 손목으로 받겠다.”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바 테이블에 꽂혀 있는 단검을 뽑으며 말했다. 사내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사, 살, 살려줍쑈! 제발! 나으리! 저는 그냥, 그냥!”
“그냥? 귀족을 ‘그냥’ 모독하는 취미가 있었나 보군?”
“아, 아, 아닙니다요!!!”
페르난데스의 단검이 손목에 올라가자, 사내는 울음을 터트리며 버둥거렸다.
‘무슨 힘이!’
호리호리한 청년? 아니, 오히려 소년으로 보일 정도의 체구였다. 갑옷을 입어 덩치가 다소 커보였지만, 그리고 제법 선이 굵고 단단해 보였지만. 얼굴이 앳되어 어려 보였다.
그러나 여관주인은 자신의 반절 정도 될 이 청년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기선 제압을 하는 법을 잘 알더군. 발타자르. 어디서 배웠지?”
“본능 아니겠습니까?”
전생에서 페르난데스는, 와일드캐스트(방랑 마법사)로 반평생을 살았다. 온갖 더러운 꼴들을 다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끝에, 결국 사교 집단의 수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제피스는 덜덜 떨며 페르난데스에게 잡혀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때, 고요한 주점의 구석에서 한 낭인족 사내가 일어나 말했다.
“그쯤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사님들?”
“?? 누구냐?”
페르난데스가 힐끔 바라보자, 낭인족 사내는 손을 비비며 웃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조용히 묻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피를 보고 시티 가드를 만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요.”
“혀가 매끄럽구나. 좋아, 네가 말해 보거라.”
-털썩.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여관주인을 내려놓았다. 여관주인은 부르르 떨며 바 테이블의 아래로 숨어 들어갔다.
“금발에 콧수염을 기른, 덩치가 큰 기사님이라면 제가 행방을 알고 있습지요.”
“이름은?”
“어찌 제가 기사 나리와 통성명을 했겠습니까요.”
낭인족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페르난데스의 제피스의 시선이 짧은 순간 마주쳤다.
‘끌고 가 볼까요?’
‘아니, 일단 들어보자.’
“어디로 가는 것까지 알고 있지?”
“세베스티안 남작. 그 분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베스티안 남작?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페르난데스의 기억에 없는 것을 보아,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을 들었다라··· 누구와 대화 중이었지?”
“용병 놈들이입지요. 세베스티안 남작이 요즘 노예 중계에 재미를 붙여서··· 그리고 힘 쓰는 놈들을 마구잡이로 모으고 있다고···”
“내전이라도 하려고?”
“아뇨! 노예 시장 관리하는 놈들이랑 분쟁입니다. 그래서 그 기사 나리도 돈을 좀 만지겠다며···”
“흠···”
제피스는 페르난데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남작과 노예 시장.”
“저는 노예 시장으로 가겠습니다.”
“흠? 음··· 알겠다. 내가 남작을 보지.”
귀족 출신이니까 귀족에게 붙이고 싶어하는 심정은 알겠는데··· 노예 시장에 볼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세베스티안 남작이 누군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가명이거나 차명일텐데··· 그런 데에 발을 들이밀 수는 없지. 이번 생은 확실한 길로만 간다.’
*
글로리데인 시의 중심지는 소란스러웠다. 페르난데스는 노예 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 들었다.
‘내가 첫 제물을 샀던 곳도 여기였는데···’
대륙 서부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는 항구 도시. 아니 도시 자체가 노예 매매로 대부분의 자금을 확보하는 곳이다 보니, 흑마법에 필요한 인간 제물을 구하려 많은 이단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다.
‘지하 분파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거대 분파가 없다.’
소규모 분파들이 난립하지만, 이단심문청 바로 앞마당이기도 했고. 상호간에 견제가 너무 심하다보니 대규모 사교 파벌이 없었다.
키르하스 하트테이커를 구매했던 ‘컬트 오브 뎀드리자드’ 또한 그저 그런 파벌 중 하나였다.
‘당장 그 놈들 먼저 조지는 편이 낫긴 한데···’
페르난데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약 소굴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엔 마약에 흠뻑 절어 눈이 풀린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허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약굴과 싸구려 창관이 난립한 곳. 대낮에도 제정신 박힌 놈들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곳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대로 붉은 발이 쳐진 마약굴 하나에 들어섰다.
“어서옵쎠!”
한쪽 눈이 없는 낭인족 사내 하나가 그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놈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낯이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왔는데, 바로 맞춘 모양이었다.
“페싯트 할멈 찾아 왔소.”
“누구신지···?”
페르난데스는 씩 웃으며 교단의 성호를 그었다. [데’라카즈 스웜]. 야만족 토착 종교이자, 악마 숭배 교단. [컬트 오브 뎀드리자드]가 이 시기에 어디에 아지트를 틀고 있는 지는 몰랐지만···
‘데’라카즈 스웜은 훤히 알지.’
“오, 형제여! 인간 형제는 참 드문데, 보기 좋구만!”
“할멈은?”
“지금 주무시지! 어떻게, 어디서 오셨나? 안으로 들어 오시게!”
낭인족 사내는 친근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때가 낀, 긴 손톱을 휘휘 저으며, 그는 안쪽 방 문을 열었다.
곧, 간단한 죽과 빵 등이 나왔다. 페르난데스는 빵을 집어 들어 죽에 살짝 적시고 입에 가져가다가, 피식 웃었다.
‘막산초? 하여간 악마 숭배자 놈들 사람 못 믿는 것 하고는.’
막산초는 마약성 자백제의 원료가 되는 풀이었다. 낭인족 사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정제해서 에센스를 추출한 것도 아닌. 그냥 풀떼기 빻아서 삶은 죽 정도로는 디모니카의 혈관을 넘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디모니카 세례 의식을 거친 이단심문관의 혈액은 사실상 물질적 독소에 대해서 만독불침에 가까우니까.
“환대에 감사하네, 형제여.”
“무얼! 반가워서 그렇다네! 어느 지단에서 수련했나?”
“남부 대정글.”
“대정글? 페를리카?”
“아니, 데삭산.”
“그럼 우리 주교님께는 무슨 볼일로 오셨나?”
“그쪽은 직위가 어떻게 되나?”
“···전사일세.”
“그렇다면 자네와 할 말은 없네. 할멈을 만나봐야겠군.”
“잠깐 기다리게!”
페르난데스가 약에 취한 기색이 없자, 낭인족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문을 막았다. 그때, 문 밖에서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이방인 형제라고?”
“오, 할멈.”
“날 그렇게 부르는 이는 몇 안 되는데, 데삭산 출신이라고?”
찰랑이는 긴 흑발. 구릿빛으로 잘 그을린 피부와 탄력 넘치는 호리호리한 몸매.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대단히 요염한 미녀였다.
“알’페르싯트. 실례했소.”
“카라잔콜 노친네의 강아지는 잘 지내나?”
“그 할아범은 고양이를 키우는데?”
“흠···”
여인은 페르난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자수가 들어간 부채를 촥 펼쳤다.
“실례했군.”
“나이가 나이니, 그럴 수도 있지.”
“날 아나, 청년? 대단히 무례한데?”
그녀는 낭인족 청년에게 손짓했다. 청년은 여인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방을 나섰다.
“아니면 그 무례가··· 이 도시에 같이 왔던 사내 때문 인건가?”
“어?”
“오자마자 한 바탕 했다지?”
“오.”
페르난데스는 겸허이 인정했다. 아무리 소규모 방파라고 해도, 이 지역 토박이인 이상. 그리고 이단심문청의 턱밑에서 ‘토박이’로 살 수 있었던 이상. 이들은 녹록한 자들이 아니었다.
탄탄한 미래 계획과 악독한 수법을 가지고 있겠지. 다른 모든 이단 종교들이 그렇듯이.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는 법이니까.
이단심문관을 만나기 전까지는.
페르난데스는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