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유보다, 목적이 더 중요하다.
영혼에 악마를 박아 넣든, 육체에 악마를 박아 넣든. 상반신과 하반신이 둘로 나뉜 인간이 살아날 방법 따윈 ‘거의’ 없다.
“역시 양손대검이 최고지?”
-이렇게 무식하게 싸울 거면 오히려 좋긴 하지.
세 호흡을 내뱉기 전에, 두 악마 추종자를 썰어버린 페르난데스가 제단을 향해 발을 옮겼다. 제단의 ‘주교’라 불린 사내는 그를 보며 덜덜 떨면서도, 하는 짓을 멈추진 않았다.
“그만 하지?”
-쒜에에엑
페르난데스는 숄더백에서 단검을 뽑아 그대로 투척했다. 적어도 단검 투척은 제법 정밀한 경지에 있다고 자부하는 실력이었다. 단검은 정확히 흑요석 칼을 잡고 있는 놈의 손목을 꿰뚫었다.
“끄으으윽!”
사내는 손목을 꽉 붙잡고 피를 왈칵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페르난데스가 제단 위로 올라섰다.
“허, 제대론데?”
굉장히 현대적인 술식으로 짜여진 소환 제단이었다. 사지가 조각난 시체들이 여기저기 얽혀 역오망성을 그리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엔 마력으로 정제된 피가 사악한 룬문자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보자. 사다르켈리사··· 흠··· 사다르켈리사의 열일곱 번째 투사? 어이, 왜 이런 잡 마귀를 소환하려고 발버둥친거야? 기왕 할거면 사다르켈리사 본신을 소환하면 되잖아.”
“지, 지옥 룬을 알고 있다고···?”
“지옥 룬이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릴 해, 주교 씩이나 되는 양반이. 이봐, 이건 지옥 룬이 아니라 데미드라칸 텅이잖아. 언어 계보가 완전히 다른데···”
페르난데스는 부들부들 떠는 주교에게 다가가며 웃었다. 어디 반편이 같은 놈이 어설프게 배워가지고는.
“거짓말, 거짓말이다! 지옥 룬은 오로지 주인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언어··· 그걸 읽을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없긴 왜 없어. 교양 과목인데?”
진짜 어디서 악마한테 이상한 꼬임을 들은 놈인가 보다. 페르난데스는 놈의 행태가 우스웠다. 뎀드리자드의 주교라는 작자가 고작 이런 놈이었다니?
“너 진짜 주교 맞아?”
“이, 이이익! 사, 사다르켈리사여 제게 힘을 주소서!”
-콰지지직!
놈이 파르르 떨며 애써 손가락을 얽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주교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꺾었다. 흑요석 단검이 챙,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만트라가 틀렸어. 검지와 엄지 사이의 각도가 그것보단 12.5도 정도 좁혀야지. 손목 방향도 잘못 되었고. 너 마법 어디서 배웠냐? 어디 학파 와일드캐스트(방랑 마법사)가 그 따위로 가르쳐?”
“사, 사다르켈리사여···!”
“그리고, 넌 너한테 속삭이는 악마 이름도 잘못 알고 있잖아.”
페르난데스는 사내의 배에 무릎을 꽂았다. 사내는 컥, 하며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구멍 뚫린 그의 오른 손목을 밟고 짓이겼다.
“끄, 끄으으윽···.”
피 웅덩이에 얼굴을 묻고, 사내가 거품을 내며 비명 질렀다.
“사다르켈리사가 아니야. 네가 숭배하는 그 악마는···”
[테트라갈란이다.]
그 순간, 지하 동공에 붉은 빛이 번뜩이며 위협적인 쉭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유황 냄새를 품은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페르난데스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그래. 테트라갈란. 백인대장 테트라갈란. 사다르켈리사의 투사. 도마뱀 왕 크샤스락스의 오른 엄니. 그렇지?”
[제법 현명한 필멸자로다. 오히려 네가 나의 수족이었다면 이리 귀찮진 않았을 것이다.]
“날 부리기엔 네 격이 과히 많이 떨어지지.”
[감히.]
-후우우웅.
다시 한 번 강풍이 몰아쳤다. 페르난데스의 로브가 돛처럼 펄럭였다. 그의 발 아래에 짓밟힌 사내가 히익, 하며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사, 사다르켈리사시여. 제 영혼을 바치나이다!”
“어딜!”
-콰직!
사내가 돌연 바닥에 떨어진 흑요석 단검을 집더니, 자신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사내는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눈을 뒤집고 죽었다. 그가 잠긴 피 웅덩이에서 거품이 일었다.
-방심했군.
“방심할만 해. 괜찮아.”
-테트라갈란은 하급 악마가 아니야. 지옥 마장 중 하나다.
“알아. 그래봐야 마장에 불과하지.”
-온다. 준비해.
“내가?”
페르난데스는 소환 제단에서 물러서며 대검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든든했다.
-후우우웅···
바람이 지하 공동을 미친듯이 휘몰아쳤다. 이 지하수로의 그림자 속에서 스며나온 붉은 뱀들이 일제히 쉿쉿거리며 기이한 소리를 내질렀다.
뱀들이 내는 소리가 기묘한 리듬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의 정신을 무너트리고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가락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경애를 바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콰지지직.
소환 제단의 피 웅덩이와 시체들 사이에서, 선명한 녹색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틈으로 비늘 덮인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거의 페르난데스의 머리 만한 손아귀였다.
-턱, 턱. 터억.
곧, 손을 시작으로 대리석 기둥 같은 팔뚝이, 그리고 비늘과 근육이 도드라진 가슴과 얼굴이 나타났다. 하나, 둘, 셋···. 놈의 네 머리가 그림자 속에서 스며나왔다.
-사두룡(四頭龍)의 후손···. 푸른 비늘의 테트라갈란.
“그래. 오랜만이군.”
페르난데스의 말은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진짜배기 악마를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테트라갈란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란 말이기도 했다.
즉, 테트라갈란은 초면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전생에 키르하스에게 심장이 꿰어 죽은 악마들 중 하나였다.
그때 테트라갈란이 내질렀던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그는 그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준비 됐어?”
-나는 준비라고 할 만한 게 없지.
“너 말고. 너. 이 악마야.”
테트라갈란의 거대한 몸을 향해서 페르난데스는 양손대검을 겨누었다. 테트라갈란은 그 모습을 보고 쉿, 하며 웃었다.
[감히 내게 그러한 말을 하느냐. 나는 테트라갈란이다. 위대한 사두룡의 후예이자 위대한 어머니 사다르켈리사의 투사이니라! 군왕 크샤르락스의 오른 엄니이자···]
테트라갈란의 말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추억에 잠겼다. 키르하스를 독대한 그가 내뱉었던 말과 똑 같은 레퍼토리였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선명했다.
“뱀 답게 혀가 길구나.”
[이놈, 감히!]
-파스스스···
페르난데스의 견갑이 순식간에 부식되어 바스라졌다. 진정한 데미드라코만이 사용할 수 있는 [부식의 기운]이었다. 축성 받은 은제 장검만은 그 기운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내가 키르하스의 재주를 따라하진 못하지.”
-그렇지.
“하지만 키르하스의 공략을 따라하는 것 정돈 식은 죽 먹기야!”
페르난데스는 테트라갈란의 오른쪽 허리를 파고들며 외쳤다. 테트라갈란은 노호성을 터트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
-콰아앙!
테트라갈란의 세 번째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강산이 제단을 녹였다.
[이놈! 이노오오옴!! 이름, 이름을 말해라!!!]
-푸화아악!
페르난데스는 테트라갈란의 오른 허벅지를 베어내곤 그대로 바닥을 굴러 뒤로 돌아섰다. 거대한 꼬리가 그의 머리 위로 휘몰아쳤다.
‘느려졌군.’
페르난데스는 꼬리를 칼로 막아내곤 뒤로 밀려났다. 테트라갈란은 그 사이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다.
-쒜에엑!
[크르으으윽!!!]
페르난데스가 솜씨 좋게 던진 단검이 테트라갈란의 왼쪽 눈을 파고들었다.
[이건,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네노오오옴! 정체를 밝혀라. 마, 만신전의 천족이더냐!]
“우습구나. 악마야. 할 말이 그것 뿐이더냐?”
페르난데스는 실금이 가득 올라 삐걱거리는 대검을 굳게 잡고 그대로 쏘아지듯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온몸 관절도 그의 칼보다 상태가 낫진 않았다. 독과 산, 그리고 피로와 충격에 찌들어 부서지고 있었다.
‘역시 전성기 키르하스를 따라하는 짓은 위험하구만.’
-비슷하게라도 한 것이 어디냐.
‘이번엔 키르하스가 못하는 짓을 해보자고.’
페르난데스는 비틀거리는 테트라갈란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너는 먼저 주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천부께서 네 간구하는 바를 알며 네게 더하시리라.”
-요한 외경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구절이 아닌데?
“혼자 해본 적 있어. 페이자쉬, 신성 주문의 필요조건은?”
-기원, 기도, 기적?
“내겐 셋 다 있다!”
-콰지직!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대검이 부서지며 페르난데스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테트라갈란의 심장에서 황금색 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가슴 안에 박혀 있는 칼날 안으로 스며들었다.
“거봐 될거랬지?”
테트라갈란의 거대한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곧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지옥의 6계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이 칼날에 봉인되고 있었다.
[어떻게!?! 만신전의 힘은 봉문되었거늘!! 이럴 수는 없다···!!]
“안 되는 걸 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 혹시 너 성자라고 알아?”
페르난데스는 바닥에 떨어진, 녹색 빛을 흘리는 칼날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칼날을 로브 자락에 감싸곤, 로사리오로 묶었다.
“이거 우리 엔마기카 형제님들이 보면 경을 치겠군.”
멀쩡한 장비가 없었다. 견갑이고 단검이고 숄더백이고 양손대검이고···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독과 산, 그리고 피가 뒤섞인 기묘한 액체가 그의 발치에서 찰랑였다.
“후우···”
지옥 마장 정도의 악마를 홀로 대적하는 것은 피로한 일이었다. 그는 격전에 삐걱거리는 몸을 추슬렀다. 당장 여기 누워 기절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며 살지 않았다. 멈춰 서서 만족하며 살아온 적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로브 자락은 피와 오염이 얼룩져 더러웠다.
“할 일은 해야지.”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흔적.”
페르난데스는 제단 아래에, 말라 붙은 핏자국들을 가리켰다. 자루 같은 것이 끌려간 자국이 가득했다. 핏자국의 끝에는 지하 수로 끄트머리에 있는 어두운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
노예 저장고. 혹은 저주 받은 산실이라 불리는 이 장소는 꿉꿉하고 불결하고, 지독한 냄새가 났다. 키르하스는 넝마를 두른 채로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저벅, 저벅.
아까부터 엄청난 굉음이 제단 방향에서 빗발치곤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악마 놈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키르하스는 피로에 찌든 눈으로 철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함께 끌려온 노예들 중 이제 남은 이들이라곤 다섯 명 정도가 전부였다.
-철컥.
로브를 입은 사내가 철창 밖에 서 있었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사내는 넝마를 입은 노예들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악마의 냄새는 없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다 죽일 수는 없잖아.”
“아, 그만 투덜거려.”
청년은 갑자기 멈춰 서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건가?’
노예들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두려움에 움츠러들었다. 미치광이 악마 숭배자가 제물용 노예 저장고를 찾아왔다!!
“아, 그만!! 다 살려 나가는 걸로 한다!”
-치잉.
청년은 대뜸 단검 한 자루를 뽑아들더니, 그대로 창살에 걸린 쇠사슬에 박고 비틀어 끊었다. 대단한 힘이었다. 쇠사슬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자, 다들 일어나.”
“···???”
“달려 나가, 최대한 멀리. 가급적이면 글로리데인 시 밖으로 며칠간 피신해 있기를 권장한다. 곧, 불바다가 될 테니까.”
노예들이 머뭇거리자, 청년이 대뜸 버럭 소리질렀다.
“어서!”
“히이이익!!”
노예들을 내쫓고, 청년은 구석에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그를 노려보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너구나?”
“날 알아?”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칼라니 씨족의 마지막 생존자. 맞지?”
그 말에, 키르하스는 부스스 일어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랜 기아와 갈증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여전히 강인했다.
“···넌 누구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야? 밖에 그 미치광이들은 어떻게 됐지?”
“궁금한 게 많나 보구나. 좋은 자세야. 잠깐 함께 걷겠어?”
키르하스가 잠자코 그에게 다가오자, 청년은 옆으로 슬쩍 비켜서 길을 만들었다. 키르하스는 조심스럽게 청년의 곁을 지나쳤다.
“흠. 키르하스.”
청년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키르하스의 넝마 두건을 벗겼다. 굶주림에 말랐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선을 가진 사나운 인상의 묘인족 미녀가 나타났다.
“맞군. 젊은 모습을 보니 좋네.”
“넌 누구야?”
“디모니카 이단심문관 발타자르. 지금은 그렇게 알고 있어.”
“이단심문관··· 그런 녀석들이랑 친하게 지낸 적은 없는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물론!”
사내는 열린 철창 사이로 나갔다. 키르하스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 걸었다.
복도에서 공동과 제단에 이르기까지, 이 지하 수로는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일렁이는 불길한 빛이 근처를 떠다녔다. 청년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이를 걸었다.
키르하스는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봐도, 저 미끄럽게 생긴 청년의 나이는 자기보다 윗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강자임에 틀림 없었다.
청년은 피와 오물에 로브 밑단이 젖어 드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저벅, 저벅 걸으며 말했다.
“월 1일 누적으로 계산해 월차. 은편 반닢으로 계산한 월 급여. 임무당 생명수당과 성공수당은 별도로 150%로 쳐주고, 임무마다 은편 세 닢을 추가 지급하지. 베이타서스 교단의 자유민 신분을 보증하고 임무에서 주교에 준하는 면책권한을 부여할 수도 있다.”
“···?”
키르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노예를 구하는 태도 치고는 과히 정중했고, 그렇다고 자신을 그냥 보내주겠다는 뉘앙스 또한 아니었다.
청년은 지하수로의 계단을 타고 오르며 말했다.
“즉, 내 수행 종자로 들어오라는 이야기야. 이단심문관들에겐 수행원이 따르지. ‘토치맨’. 횃불을 들고 따르는 이들. 그 자리에 네가 필요하다.”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요?”
어느새 키르하스의 말투가 공손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기세에 위압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너나 나와 같은 사람들은 목적이 더 중요하지. ‘세상을 구하라’, ‘악마를 불태워라.’ ‘이단을 섬멸하라.’ 모두 좋은 목적이지만, 그게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지.”
어느새 수로의 입구에 도달했다. 페르난데스는 반쯤 열린 수로의 입구를 활짝 열었다. 새벽 하늘 빛이, 그리고 맑은 공기가 터져 나오듯 키르하스에게 쏟아졌다.
키르하스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멈추어 섰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내려보았다.
“너는 복수를 원하잖아. 나는 네가 복수하길 원한다.”
‘노예 사냥꾼과 악마 숭배자들에게 멸족 당한 씨족의 복수를 해라.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내 아들의 미래를 위하여. 악마를 불태워라.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키르하스의 예민한 후각이, 불씨의 냄새를 맡았다. 지독하고 뜨거운 냄새다. 페르난데스의 말에서 풍기는 유혹의 향기에,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새벽 하늘을 등진 페르난데스의 눈 앞에 무릎 꿇었다.
“이단심문청에, 복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거라.”
“은공. 이름을 듣고 싶습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키르하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세르너드 공.”
그녀의 머리 위에서, 페르난데스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웃었다.
전생엔 그렇게도 죽이고 싶었던 여자였다. 칼라니 씨족의 키르하스. 묘인족이 자랑하는 최강의 창이자 서부 황야의 가장 견고한 방패.
이젠, 그녀 또한 그의 체스말에 불과하다. 페르난데스의 손이,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
어두운 소환 제단의 바닥에, 붉은 뱀 하나가 숨어 있었다.
[··· 이단심문관··· 디모니카···]
[··· 발타자르···]
[이단심문관···]
[베이타서스의 개···]
뱀은 쉭쉭거리며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지나간 자리를 노려보고는, 곧 핏물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사다르켈리사는 네 놈을 기억하겠노라. 필멸자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