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작전명 : 사슬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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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퀴지션 킵의 아침은 평화로웠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수 많은 인파들의 시선을 느끼며 흥에 겨웠다.
마치 마법학회 시절 교편을 잡았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그는 이제 흑마법사가 아니고, 그의 눈 앞에 있는 이들은 열정적인 대학생들이 아니라 노회하고 숙련된 이단심문관들이지만.
그는 지금 대예배당의 단상에 올라, 드래곤스팅의 모든 이단심문관들 앞에서 발표를 시작하고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형제님들.”
“그러시게.”
수도원장 베오른이 외눈 안경을 쓱 밀어 올리며 말했다. 그는 큼지막한 흉터가 한쪽 눈을 찢어 놓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헤레티카의 대표이자 이단심문청의 장관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이 말이지. 페르난데스는 옛 시절, 연구비를 타기 위해 이사장에게 연구를 발표할 때가 떠올랐다.
“먼저, 지난 임무에 대해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페르난데스는 대예배당 단상 위의 칠판으로 다가갔다. 그는 칠판 위에 빠르게 글을 써내려갔다.
[글로리데인 시]
[컬트 오브 뎀드리자드]
[데미드라코]
[인퀴지션 킵]
“모두들 아시다시피, 글로리데인 시는 이단심문청 바로 아래 있는 대도시입니다. 하지만 감히 미친 사교 놈들이 여기에서 악마를 소환했었죠. 왜 일까요?”
“정답!”
“네, 파비아노 형제님.”
"어···. 미쳐서···?"
"아닙니다. 형제님."
파비아노는 나무 기둥 같은 팔을 들어올리고 한 마디 하고는, 제피스와 베오른, 마르코의 시선에 기가 죽어 손을 내렸다.
페르난데스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악마를 소환하는 데에는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이 소모됩니다. 소환 과정에서 은폐를 위해서는 거의 악마 교단 놈들의 전력이 투사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작업을 하필이면 이단심문청 바로 턱 밑에서 진행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돌리지 말고 바로 얘기하게. 형제.”
베오른은 심기가 불편했다. 글로리데인에서 희생된 헤레티카 이단심문관, 라우렌시오는 유능한 베테랑이었다.
“저희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연막이었습니다.”
“악마 교단이 악마를 소환하는 행동을, 고작 버림패로 썼단 말인가?”
“글로리데인 시의 뎀드리자드는 작은 지파에 불과합니다. 놈들의 본체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주교를 죽였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가 뭔가?”
“제가 죽인 이단 놈은, 마법을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반면에, 악마가 소환된 제단은 대단히 뛰어난 실력으로 축조된 마법 구조물이었습니다.”
베오른이 입을 다물자, 제피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놈들이 중형 악마를 포기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 냈는가?”
“네. 여기서 전혀 다른 교단이 나옵니다.”
페르난데스는 칠판에 선을 쓱 그어 반대편에 글을 적어 내려갔다.
[청동 천칭단]
[페이른 왕국]
[워커 역병]
“뎀드리자드는 청동 천칭단과 손을 잡았습니다. 놈들은 지파 하나를 파견해 글로리데인 시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여기 계신 제피스 형제님이 아니었다면 글로리데인 시에 제법 오랜 시간 발이 묶여있을 뻔 했지요.”
“겸손이 지나치군. 악마 토벌부터 잔당 추적까지 자네가 했지 않았나.”
“겸손 맞습니다.”
이에 제피스는 큭, 하고 웃었다. 페르난데스 또한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봉인한 데미드라코 악마, 테트라갈란에게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청동 천칭단은 지금 페이른 왕국을 전복시킬 대규모 주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그런게 가능한가?”
페이른 왕국은 동부 왕국 연합 중에서도 독보적인 군사력을 가진 강국이었다. 로얄 그리폰 나이츠와 메를린 시가드를 포함해 명망 높은 군단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강국을 고작 악마 교단 하나 둘이 전복시킬 수 있다고? 베오른은 인상을 찌푸렸다.
“억측 아닌가?”
“청동 천칭단은 워커 역병을 만들어 흩뿌린 장본인들입니다.”
“뭐?”
마르코가 기겁하며 놀랐다.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건 자연 발생적인 질병이 아니었소?”
“워커 역병은 청동 천칭단이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비술을 바탕으로 악마에게 얻어낸 역병입니다. 놈들은 제물을 얻거나 제의를 지낼 때 희생 제물을 모으기 위해 해당 역병을 퍼트렸습니다.”
워커 역병. 타액에 의해 감염되는 지독한 열병이었다. 일종의 광견병에 가까운 질환인데, 감염된 인간은 이성을 잃고 주변 인간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고통도, 자의식도 없는 인간들이 친지와 형제, 지인들을 물어뜯고, 그렇게 물린 희생자들은 또 다른 워커가 되어 다른 희생자들을 찾아 떠난다.
이런 식으로 전파된 워커 역병은 작게는 한 마을에서 크게는 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다. 다행히도 워커들은 행동이 굼떠 다른 지역에 크게 전파 되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그, 그렇다면··· 그 사교 놈들을 뿌리 뽑는다면 워커 역병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겠나?”
“저 또한 그러기를 바랍니다만··· 확신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어쨌든 기세가 줄겠지요.”
“고작 워커 역병 따위로 페이른 왕국을 무너트릴 수 있단 말인가?”
베오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전염성이 강하고 치료제가 마땅치 않았지만. 도보로 이동하는 워커들이 다른 마을에 멀쩡히 도착해서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작 해야 닫힌 사회의 작은 마을 하나, 인구 밀집이 높은 도심지역 하나 정도···?
대부분의 워커들은 마을을 벗어난 순간 몬스터의 점심이 되거나 계곡이나 강가에 빠져 익사하거나, 또는 그저 방황하다가 아사하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다른 마을에 도착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떤 멍청한 마을이 아무 말도 못하고 괴질에 걸려 있는 게 보이는 이방인을 선뜻 마을 안으로 들여보내 준단 말인가.
페르난데스는 페이른 왕국 전도를 대강 칠판에 그었다. 그는 몇 군데에 분필로 표기를 했다.
“여기,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이렇게 총 네 개의 도시가 악마가 제게 말해준 청동 천칭단의 지파들입니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다시 지도의 다른 부분에 표식을 남겼다.
“이렇게 여섯 개의 마을이 지금까지 페이른 왕국에서 발병한 워커 역병 발병지역입니다. 이걸 이렇게 이으면···”
페르난데스의 분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도의 여기저기를 선으로 긋자··· 기괴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악마가 말하기를··· 이 자들은 페이른 왕국에 국가 면적의 거대한 소환진을 그리고 있답니다.”
“!!!!”
“···.베이타서스시여···”
“···.후···”
이단심문관들은 기겁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마르코는 성호를 긋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보가 사실일 가능성은?”
“분명 저 중에도 연막이 있습니다. 저희가 진상을 모두 파악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겠지요. 그러니, 저 체크 포인트가 정답일 가능성은 30% 정도로 가정합니다.”
“페이른 왕국에 전력을 투사할 수는 없네.”
베오른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임무를 배정받지 못한 형제들 중에, 반절 정도는 이번 달 안에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야 하네. 당장 운용할 수 있는 형제들이 충분하지 않네.”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개인 수행원을 한 명만 붙여주십시오.”
“너무 위험하다네. 페르난데스 형제. 자네는 버림패가 아닐세,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물어온 임무가 아닙니까.”
페르난데스는 베오른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이 어린 성자가 임무 중에 사망한다면? 베오른의 입장에서 이단심문관은 하나하나가 귀중한 인재였으며, 더욱이 ‘30년 만에 나타난 성자’는 잃어버려선 안되는 인재였다.
“토치맨 키르하스와 동행하겠습니다.”
“···? 토치맨과?”
“어차피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을 겁니다. 저희는 진상 파악과 놈들의 거주 지역 특정을 위해 움직이겠습니다. 그 이후에 토벌 임무를 새로 할당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좋네.”
이 정도가 베오른이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피스는 가만히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지난 임무에서 형제의 능력은 잘 보았다. 탐문과 탐색에 능하더군. 반드시 살아 돌아올 수 있겠나?”
“믿어 주십시오.”
“무운을 빌지.”
마르코는 박수를 짝 치고는 말했다.
“자, 첫 단독 임무로군 페르난데스 형제님? 작전명은 어떻게 짜겠소?”
“사슬 끊기. 어떻습니까?”
“천칭이니, 사슬을 끊는다라··· 좋군! 마르티리오 형제에게 가보시오. 병장기를 최대한 잘 챙겨가시게.”
이걸로 반은 성공이다. 페르난데스는 웃었다. 지금의 임무 브리핑은 단독 임무를 따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판이었다. [청동 왕좌]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유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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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공, 이게 뭡니까?”
“작전 명령서. 처음 보지? 나도 두 번째야.”
페르난데스는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는 키르하스를 찾아갔다. 서고 관리장은 디모니카인 페르난데스가 서고에 들어오자 퍽 당황한 눈치였다.
하여간 디모니카가 서고를 찾아오는 일이 없었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관리장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저 교육 받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대단한데? 벌써 교육을 시작했다고?”
이단심문청의 시련은 가혹했다. 물론 디모니카의 세례 성사에 비할 만 하겠냐마는, 민간인이 수행원으로 인정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조건은 대단히 까다로웠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천부적인 감각과 선천적인 재능으로 모든 난관을 일주일 만에 돌파한 괴물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대호족 키르하스 하트테이커가 되는 거겠지.’
“사슬 끊기··· 토벌 임무는 아니네요?”
“벌써부터 피를 묻히고 싶어?”
“하핫, 복수를 하자면서요?”
키르하스는 맑게 웃으며 명령서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그녀는 종이의 테두리를 쓰다듬었다.
“잘 부탁드려요 안젤로 경.”
“그래 바실라.”
키르하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내렸다. 아름다운 흑발이 찰랑이며 그녀의 날렵한 턱선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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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 사슬 끊기]
작전 지역 : 페이른 왕국 전역, 제 1, 3, 12 체크포인트.
작전 개요 : 청동 천칭단의 비처 탐색 및 이단 수색. 워커 역병의 진원지 수색.
작전 테스크포스 팀 :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토치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음성 기호 : 페르난데스 – 안젤로(A), 키르하스 – 바실라(B)
악마를, 이단을, 마녀를 불태우리라.
최종 승인 :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장 베오른 실드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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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왕좌라··· 확실히 쓸 만 하긴 하겠군.
“지금 나한텐 더 없이 필요하지.”
청동 왕좌. 악마들의 유물.
실제로 왕좌는커녕 의자 조차 아닌 자그마한 청동 팔찌에 불과하지만, 그 물건에 무려 ‘왕좌’라는 으리으리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달리 있었다.
청동 왕좌의 기능은 지옥 마력의 흡수 및 방출. 전생에 페르난데스에겐 쓸모 없는 기물이었다. 애초에 마력량이든 방출량이든 불필요할 정도로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몸으로 지옥 마력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흔이 박힌 몸에 마력 회로를 만들어 넣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마력 회로를 대신할 유물을 구한다면···’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 지옥 마력을 이용한 마법은 대체로 시전자를 타락시키지만, 청동 왕좌는 마력의 잔향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흑마법 전용 인공 마력 회로. 하루에 활용할 수 있는 주문 시전 총량이 정해져 있기야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진행할 수 있는 계획이 얼마나 많겠는가.
-똑똑.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정리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습니다.”
“준비는 잘 되어가나?”
“이제 뭐, 병기고나 한 번 들러볼까 합니다.”
“하하, 마르티리오 형제가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더군. 지난 임무에서 장비를 모조리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업무상 과실입니다.”
제피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협탁이 말 그대로 ‘협소한 탁자’가 되는 기적적인 몸집이었다.
“어쩐 일입니까, 형제님?”
“걱정 되기도 하고?”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은 신실한 수도승이 할 일은 아니지요.”
“그런가?”
제피스는 페르난데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말해보게. 이 임무를 자원한 이유가 뭔가?”
“···? 악마, 이단, 마녀를 불태우기 위해서 입니다?”
“신실한 수도승은 아니군?”
“···신실하진 않지요. 제피스 형제님. 디모니카가 심문을 하려니 어색하십니다.”
“그래. 너처럼 잘 할 자신은 없지. 형제, 다른 이유가 있을 걸세. 독립적인 임무를 배정받아야 할 이유가. 형제의 목적이 뭔지 궁금하군.”
페르난데스는 제피스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제피스는 별 다른 말 없이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에겐 제피스와 이단심문청의 ‘신뢰’가 필요했다.
‘성자’로써의 페르난데스가 아니라, ‘이단심문관’으로써의 페르난데스에게 보내는 신뢰가. 장차 앞으로 있을 대계를 이루려면, 그들의 신뢰와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형제님. 천칭 사슬단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단정적이군. 이유는?”
“컬트 오브 뎀드리자드는 페이른 왕국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장 놈들의 목적이 청동 천칭단과 같아 보이지만, 제 정보에 따르자면 지하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전생에서 뎀드리자드는 페이른 왕국을 집어삼키는 데에 성공했다. 청동 천칭단은 실패한 이후 중소 방파로 전락한다.
이 정도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위해선 뎀드리자드의 힘만으로 부족한 ‘한 조각’이 더 있었다. 전생에 이 시기의 정보는 알지 못했지만, 결과를 두고 보자면 확실했다.
(1) 기세 등등한 [청동 천칭단]을 실각시킨 의문의 조직이 있다.
(2) 배후 조직은 왕국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단심문청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는 실력자들이다.
(3) 뎀드리자드는 훗날 청동 천칭단과 배후 조직간의 갈등에서 어부지리로 페이른 왕국을 차지한다.
위 조건이 만족하기 위해선···
“왕실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페이른의 로얄 그리폰 나이츠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존재가 수도에 있어야 했다. 그 정도의 권한을 지닌 권력자라면, 적어도 왕족이거나 궁중 대신일터.
“그러니 형제님께선 페이른 왕실을 견제해 주십시오.”
제피스는 ‘왕실’이라는 말에, 다소 놀란 듯 눈을 치켜 떴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제피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청동 왕좌]를 손에 넣을 때 까진, 저한테 신경 끄십시오.’
제피스의 신뢰도 얻고, 이단 종파 하나를 견제하며, 페이른 왕국을 구원하고, 동시에 악마의 유물을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계획의 첫 단추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