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늑대의 항구 (1)
키르하스는 아무래도 중장비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신 사슬 갑옷의 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기마에 익숙하군?”
“아, 은공··· 혹시 저희 부족이 산에서 나물만 캐먹는다고 생각하셨던 건 아니죠?”
키르하스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페르난데스는 살짝 찔렸다. 그로써 묘인족 부족 문화 생활이 어떤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어··· 그럴리가. 음! 벌써 다 왔군?”
페이른 왕국의 동부 지역은 넓은 평야와 곡창 지대였고, 마보로 달리는 이상 인퀴지션 킵에서 닷새 안에 닿지 못할 곳은 없었다.
키르하스나 페르난데스 둘 모두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적지에 온전히 집중하며 달려올 수 있었다.
저 멀리에 [메를린포트]가 보였다. 중앙해의 관문이자 북해항로로 이어진, 페이른 왕국의 가장 거대한 항구 도시였다. 이곳의 별명은 ‘황금항’. 남부 대정글에서부터 중앙해를 타고 비단길을 잇는 부유한 도시였다.
그리고 모든 부유한 도시엔 이단의 악취가 따르는 법이었다. 이 시대엔 당연하게도.
“정지! 정체를 밝히시오!”
명성 높은 메를린포트 관문수비대였다. 어지간한 하마기사보다 뛰어난 중장갑을 입은 경비병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체···?”
하지만 질문이 이상했다. 그들은 지금 성 요한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서코트에 용과 창의 문장을 화려하게 박아 넣은 그들에게 ‘정체’를 밝히라니?
“성 요한 기사단 안젤로. 이쪽은 내 종자 바실라다.”
“경, 지금 시기가 시기인지라, 관문 진입에 신분 확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역상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중인가? 일감이 대단할텐데?”
하루에 유동인구가 얼마나 많은 도시인데, 그 인원들을 매번 검문한다고? 페르난데스는 안장에서 기사단의 인증서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경비는 정중한 자세로 서류를 읽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대부분의 상단은 항구에서 검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무슨 일이 있었나?”
“···몬스터가 도심 내에 출몰하고 있습니다.”
“몬스터? 어떤 놈인지 아는가?”
“밤중에 도심 골목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사라집니다. 생존자가 없었지만··· 흔적을 보면 라이칸슬롭이 아닐까 합니다.”
라이칸슬롭은 광랑증에 걸린 인간에게 나타나는 변이형 질병이었다. 감염된 인간은 보름 안에 괴물로 변이하는데, 변이 이후의 외형이 낭인족과 거의 유사하다보니 수인족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가 매서워질 수 밖에 없었다.
‘하기야, 키르하스가 묘인족이었지.’
라이칸슬롭과 상관 없는 종족이었지만, 어쨌건 편견이란 무서운 법 아니겠는가. 페르난데스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키르하스를 힐끔 바라보고는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일단 숙소를 잡지.”
“네, 은공. 그런데···”
이단심문청에서 작전 지역에 얻어 놓은 여관은 [세 마리 말]이라는 교단 소속의 고급 주점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익숙한 길이라는 듯 주점 거리를 지나치더니, 구석에 있는 작고 음침한 여관으로 들어섰다.
주점 [별과 인어]는 하급 선원들과 용병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전생에 페르난데스가 무작정 ‘저렴한 여관’을 찾다 들려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별과 인어]는 무려, 인신 매매를 공공연히 저지르는 범죄 조직들의 거점이었다.
“정말 여기서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음. 여기 와 본적 있나?”
“아··· 아뇨.”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끌려왔던 키르하스에게 황금항의 숙박업소가 익숙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익숙하든 아니든 정상적인 곳은 아니라는 것이 너무 뻔해 보였다.
“어서옵쎠어어!!!”
눈 한쪽에 탁하게 백내장 낀 사내가 킥킥 웃으며 다가와 말의 재갈을 잡았다. 페르난데스는 씩 웃으며 동편 반 닢을 던졌다. 사내는 재주 좋게 공중에서 동전을 낚아챘다.
“사흘 묵는다. 방 있나?”
“하나면 될깝쇼?”
“아, 아뇨 두 개···”
“하나면 된다.”
“으, 은공?!”
지금까지야 야영이었으니 대충 짐 풀고 모포 덮고 잤다고 해도, 여긴 여관이 아닌가. 같은 방을 쓴다고? 키르하스는 당황해 페르난데스를 올려 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짐을 풀었다.
“아, 그냥 두셔도 됩니다요. 저희 마구간은 안전···”
“바실라. 짐 다 챙겨라.”
“어.. 네.”
쳇 하고 혀를 차는 사내를 뒤로 하고, 페르난데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주점의 미닫이를 밀었다.
-옛날 생각 나는군···
“여기에 왜 왔는지, 알겠지?”
-물론. 스승을 만나러 왔겠지.
“네 생각에도 여기 아직 있을 것 같아?”
-그 늙은이 생각을 내 어찌 알겠나. 시기는 비슷한데···
페이자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
주점에서 시끄럽게 술을 마시며 떠들던 거친 사내들이 한 순간 낯선 이방인을 바라보며 말을 삼켰다.
‘뭐야 저 놈?’
‘기사야?’
‘기사가 여길 왜 와?’
유명 가문이나 기사단의 기사라면 당연히 귀족이나 상단의 숙소에 머물 것이고, 하다못해 편력 기사라 하더라도 묵을 수 있는 곳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싸구려 술집에?
“어, 어서옵..셔?”
“시원찮군. 방 하나 있나?”
“괜찮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때, 낑낑거리며 짐을 한 가득 들쳐 매고 키르하스가 들어왔다. 묘인족 특유의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와, 잡티 없는 피부. 차갑게 벼려진 날렵한 턱선에 사내들이 한 순간 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 하나 맞지요···?”
“그래.”
키르하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페르난데스는 힘겹게 따라오는 키르하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밤에 조심해라.”
“은공을요?”
“···뭐?”
페르난데스가 멍하니 키르하스를 바라보자, 키르하스는 얼굴을 붉히곤 말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머, 먼저 씻고 올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놈들 밤에 너 납치하러 올 거니까 조심하라고.”
“납치요? 이런 큰 도시에서?”
“큰 도시니까 이런 저런 놈들이 있는 거지. 난 사흘간 여기 없을 거야.”
“뭐라고요?!”
키르하스는 당황해 목소리를 키웠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쉿, 하고 손가락을 올렸다. 키르하스는 기가 죽어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 어디 가시는데요? 잠은요?”
“내가 실험해봤더니 디모니카는 아무래도 사흘 정도는 안 자도 되는 것 같더라고.”
평균적인 전투력과 판단력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는 최대치가 사흘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다른 수도승들이 볼 때 할 수 없는 실험을 위해 밤을 지샌 적이 있었다.
“어쨌건. 사흘 안에 이 도시에서 찾아야 할 게 좀 있어.”
“그럼 저는 무얼 하면 될까요?”
“여기 놈들이 납치하러 오면 족치고, [붉은 도끼단]이랑 선을 놓아 놔. 놈들이 필요하다.”
“붉은 도끼단이요? 용병단입니까?”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대외적으론 그렇지. 악마 숭배자들이 모인 전사 집단이다.”
그 말을 듣고, 키르하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어떤 포지션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까요 은공?”
“···훌륭하군. 용병단을 구하는 편력 기사로 접근해. 이단심문관인걸 들키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알겠습니다.”
페르난데스는 방에 짐을 내려놓고, 땀을 닦는 키르하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르하스는 눈을 감고 잠시 멈춰 그의 손길을 느꼈다. 고운 머리칼과 그 사이에 톡 튀어나온 조그마한 귀를 만지는 촉감이 끝내줬다.
-이 아이가 혼자 해낼 수 있을까?
‘믿어. 아무리 어린 시절이라 해도,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야. 이 정도도 못 해낼 리가 없지.’
키르하스는 전성기엔 악마 대공을 홀로 감당했다는 소문마저 있는 전사였다. 고작 붉은 도끼단 정도에 고전할 리가 없었다.
이 도시는 파고든 청동 천칭단의 지파, 단독으로 움직이는 고대 리치와 선신 만신전의 맥레런 교단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격전지였다. 이미 단단히 굳은 판세를 흔들기 위해선 조커 카드가 필요한 법이다.
'붉은 도끼단은 전생에도 참 신세를 많이 졌지.'
*
페르난데스는 가벼운 경장을 걸치고 밤거리를 나섰다. 글로리데인 시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장검을 한 자루 패용하고 있었다.
-삐이이익. 삐이익.
야경꾼들의 호적소리가 들렸다. 메를린포트는 기본적으로 통행제한이 없는 자유 무역 도시였지만, 최근 라이칸슬롭 사태 때문에 야경꾼들이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라이칸슬롭이라니. 아마 확실하겠지?”
-아무래도, 그 노친네 취향이긴 하지.
처음 경비병에게 라이칸슬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페르난데스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스승이라는 늙은 흑마법사는 메를린포트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당시 그의 수발 노예였던 페르난데스로써는 그의 아지트 위치까지 정확히 기억하진 못했지만, 라이칸슬롭 사태를 추적하면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페르난데스에겐 그 늙은이의 유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쨌건,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는 야경꾼들 탓에 페르난데스는 팔자에도 없는 은신을 하고 있었다.
“몰래 걸어다니는 건 취미가 아닌데···”
“아, 그쪽도 그렇소?”
“?!”
페르난데스가 조용히 투덜거리자, 갑작스레 그의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디모니카의 감각을 속이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니?
“···누구신지?”
“서로 그걸 숨기려 숨어 다니는 것 아니겠소?”
“허. 그렇군.”
등 뒤의 사내는 조심스럽게 페르난데스의 등줄기에 차가운 날붙이를 밀어 붙였다. 페르난데스는 서늘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지?”
“그쪽도 라이칸슬롭을 추적하고 있소?”
사내는 그의 귓가에 으르렁거렸다.
“아니면, 그쪽이 라이칸슬롭이신가?”
“이봐, 이렇게 멀쩡히 말하는 라이칸슬롭을 본 적 있나?”
“없지. 아직은. 그런데 있다면 그쪽 모습일 것 같소만. 잘 숨고, 예민하고, 그리고 조심스럽지.”
“···할 말 없군.”
-예리한데?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물러섰다. 등 뒤의 사내는 더 이상 깊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 요한 기사단, 안젤로.”
“안젤로라... 성 요한 기사단? 편력 수행 중이오?”
“그런 셈이지.”
“기사 나리가 어째서 이 야밤에 처마 밑을 돌아다니시는지?”
사내는 선이 날렵한 가죽 코트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사냥꾼 같은 차림새였다.
“그쪽이랑 같은 용건일 것 같은데. 그 쪽 이름도 들어보고 싶군?”
“페이른 로얄 헌팅 스쿨에서 나왔소. 카를이라고 부르시오.”
“로얄 헌팅 스쿨? 괴물 사냥꾼?”
“그건 멸칭이오!”
사내는 투덜거렸지만 날카로운 기세가 한결 꺾여 있었다. 페이른 로얄 헌팅 스쿨. 괴물 사냥꾼 훈련소. 왕국 전역에 있는 각종 몬스터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프로페셔널들이었다.
“로얄 헌팅 스쿨에서 나왔다는 건, 왕실에서도 이 사건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오. 나는 이 근처에 트롤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왔었소. 라이칸슬롭은 때아닌 사냥감이지.”
카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동행하시겠소, 기사 양반?”
“아니. 나는 편력 수행 중이거든.”
“아. 명예롭기도 하구려.”
카를은 비꼬며 말했다. 기사들의 편력 수행. 즉 명성과 명예를 얻기 위해 업적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혼자 사냥하겠다는 것이었다.
“좋소. 부디 나보다 먼저 사냥에 성공하시길.”
카를은 휘적거리며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그림자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놀라운 몸놀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카를. 기억나지?”
-닥터 카를로마노 파빌로스··· 거물을 만났군.
“저 양반 흡혈귀 사냥꾼인 줄 알았는데, 온갖 걸 다 잡네?”
-이 시기에 헌팅 스쿨이 그렇지 뭐.
밤의 귀족이자 언데드들의 왕이라 불리는 종족, 흡혈귀. 악마와 상관 없는 이종족임에도 선신 만신전에 적대적인 종족들···
파빌로스 교수는 그들 최고위 혈족 중 하나, ‘셀든버그’ 가문을 홀로 멸족시킨 인류의 영웅이었다.
페르난데스가 본격적인 흑마법사로 활동하기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라 그로서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간 이 시대엔 툭 하면 영웅담 속 인물들이 나타난다니까, 페르난데스는 투덜거렸다.
“스승, 그 늙은이라면 분명 라이칸슬롭으로 실험을 할 텐데. 참 곤란하게 됐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카를로마노가 늑대인간 사냥을 조기에 성공했다면 우리가 인지하기 전에 사건이 끝났을 수도 있지.
“그러게. 스승을 찾는 건 포기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목적은 청동 천칭단을 괴멸시키는 것이었고, 지금 스승을 찾거나 늑대인간 사태를 정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에겐 [비전 시야]가 있었다. 현대 마학의 정수에 가까운 유물. 복제품이 따로 없는 녀석이었다. 전생엔 손에 넣지 못했던 것 중 하나였으며,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페르난데스에겐 더 없이 필요한 유물이었다.
[마력 감지]와 [감각 증폭], 그리고 [마법 탐색]. 흑마법사나 악마술사들을 추적하기로는 그만한 유물이 없었으니까.
“끄아아아아악!!!!”
그때, 저 먼 골목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소리가 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