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내 오랜 친구여.
페르난데스는 잠시 성당에 앉아, 힘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이틀간 밤을 지샌 상태에서 고대 리치와의 결전까지. 페르난데스의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엉망이었다.
“이러다 죽겠군.”
-한번 죽었지.
페르난데스는 향로를 만지작 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보고를 해 말아.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장 철수해서 인퀴지션 킵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메를린포트가 리치에 의해 타락해 있던 것을 확인한 이상, 더 많은 지원이 필요···.
-꺄아아아악!
-살려줘요!!!
-끄으으윽!!! 엄마! 엄마!!
“···?”
이게 다 무슨 소란들이지···? 페르난데스는 움찔 떨며 칼을 움켜쥐었다.
-파스스···
“이거 되는 일이···”
그가 칼자루를 움켜쥐자마자, 풀 세인트메탈 장검이 그대로 바스라졌다. 검게 변색된 철가루가 흩날렸다. 리치의 심장을 꿰뚫는 과정에서 부식된 것 같았다.
“하이고, 피곤하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성당 밖으로 나섰다. 어쨌건, 지금 이 난장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심 중앙에 위치한 만신의 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심상치가 않았다.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워커 하나가 그의 얼굴을 향해 뛰어 들었다.
“흣, 썅!”
-콰앙!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주먹을 짧게 끊어쳐 워커의 미간를 찍었다. 워커는 그대로 목뼈가 부서지며 쓰러졌다.
“뭐야 이거 설마 워커야?”
-주변을 봐라.
페이자쉬의 목소리에,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메를린포트가 불타고 있었다. 온 사방에 불길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로 뛰어 다녔다. 아니, 공포에 질렸거나, 광기에 질려 있었다.
“이런 제기랄, 워커 사태가 일어났다고?”
갑자기?!
워커, 끝없는 증오와 허기에 휩싸이며 멀쩡한 사람을 찾아내 씹어먹게 되는 역병. 이 역병에 감염된 자의 체액에 노출되면 그 또한 빠른 시간 내에 워커가 된다.
피, 오물, 타액으로 전염되며 전파 속도는 빠르면 수 분에서 늦어도 수 시간.
치료제는 없다. 워커 전염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다.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치명적인 연단법과 비술이 악마의 흑마법과 결합되어 만들어진 청동 천칭단의 비전이다!
-끼이익.
일단 문을 닫고, 페르난데스는 잠시 문에 기대어 생각을 정리했다. 밖에선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다.
“대체 왜 갑자기? 메를린포트가 함락되는 건 40년 뒤인데··· 그리고 이 시기에 난 워커를 본 적도 없다고!”
-전생과 달라질 만한 게 뭐가 있었겠나.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지. 뎀드리자드의 실각? 그거 아닐까?”
-하나 더 있다.
뎀드리자드가 글로리데인 시에서 실패한 사건이 청동 천칭단을 자극했나? 페르난데스가 신음하고 있자, 페이자쉬가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피스 시라다스트. 그 자가 뭔가 저질렀을 수도 있다.
“페이른 왕실···? 그건 그냥 연막이었는데?”
-진짜 왕실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잖아. 그리고 그걸 제피스가 자극해서 지금 그 영향이 나타났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이거 약간 좀 가책이 드는데.”
그럼 지금 저 끔찍한 워커 사태에 페르난데스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리치의 시체로 다가갔다. 잿가루와 주홍색 법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법복을 찢어 주먹에 감쌌다. 워커 역병엔 치료제가 없었다. 디모니카의 혈청이 대부분의 역병에 면역력을 지니지만, 그래도 최대한 감염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워커 역병을 이렇게 '갑자기' 전파시킬 수 있는 놈은 딱 하나 뿐이야.”
-그래. 데일 페르타스. 그 놈이 직접 여기에 와 있다.
“이거 운이 좋군.”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몸을 풀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창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살피고.... 눈이 마주쳤다.
광기에 젖은 워커의 탁한 동공과.
-와장창!!
“흣?”
창문이 깨어지며 워커들이 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씩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영혼도, 육신도 피로에 찌들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당장 쓰러져서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비척거리며 다가온 워커의 정수리를 내리 찍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다.
*
“거기 막아 개씨발새끼들아!”
“니미 막긴 뭘로 막아 개새끼야! 니 새끼 애미로 막으랴?!”
키르하스는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워커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 찍는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도끼단. 워커 사태가 터지자마자 바로 도시 내부로 뛰어 들어온 이들이다.
“누님, 씨발 보고만 있지 말고 저 새끼 좀 도와 줘요!”
“하아···”
페르난데스가 이들을 회유하라고 한 이유가 정말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들은 그냥 평범하고 거칠고 야만적인 용병단이었고, 어떤 특별한 이단적인 기색도 없었다.
‘저 입은 다소 이단적이네.’
하지만 키르하스는 베이타서스에 대한 신앙심에 불타는 사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신앙심은 오히려 페르난데스에 가까웠다.
사자의 야만성과 따오기의 지혜를 동시에 가진 인물. 그야말로 그녀의 부족 신화에 나오는 대영웅의 풍모였다! 키르하스는 워커의 미간에 칼을 꽂아 넣으며 페르난데스를 생각했다.
용병단을 회유하러 나가자마자, 뜬금 없이 도시 내부에서 워커 사태가 터졌고. 그리고 워커 사태로 혼란스러운 항구 도시에서 크게 한몫 잡자며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고··· 그 사이에 휩쓸려 이들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즉, 키르하스는 지금 도시에 약탈자로서 입장한 것이다!
‘은공, 어디에 계십니까···’
“으아아악! 이 씨발! 그만! 제발!!!!”
“이런 씹! 썅! 야! 네이썬이 물렸어!”
“씨발! 네이썬! 개새끼야! 내가 씹! 맨손으로 무기 잡지 말랬잖아!”
창고 입구에서 바리케이트를 지키며 몰려드는 워커를 공격하던 용병 하나가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터트렸다. 손에 느껴지는 고통 탓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 탓이었다.
후방에서 지도를 바라보며 한참 작전을 짜던 용병대장, 제레일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네이썬! 이 개 호로 잡놈! 니가 든 방패 덕에 살아난 우리 형제가 적어도 다섯은 된다! 씨발놈아! 마지막으로 할 말 있냐!”
“씨···씨발.. 제발, 대장. 나 아직 멀쩡해.”
“마지막 말 치곤 존나게 비루하구나. 네이썬.”
-콰앙!
제레일은 붉은 기운이 몽글거리며 피어 오르는 불길한 도끼를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리 찍었다. 네이썬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도끼날을 바라보았다.
-촤아악.
도끼가 그대로 네이썬의 정수리부터, 명치까지 파고들었다. 사람을 세로로 쪼개다니, 인간의 완력이 아니다! 키르하스는 침을 삼키며 제레일을 바라보았다.
‘들키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머릿속에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레일에게 다가갔다.
“워커 사태에 경험이 좀 있나 보죠?”
“용병들이 다 뭐 그렇지 뭐. 돈 주면 워커든 수녀님이든 쪼개고 봐야지.”
제레일은 킬킬거리며 지도의 여기저기를 찔렀다.
“아까 옥상에서 보니까, 여기. 여기. 그리고 시장 골목에 여기에 워커들이 존나게 모여 있더라고. 그럼 이쪽에 생존자들이 있단 소리야. 놈들이 살 냄새는 기가 막히게 찾거든.”
“당장 구하러 가야 합니다!”
키르하스가 분연히 일어서며 외쳤다. 그 사이에 은공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은공은 사자의 힘줄과 곰의 근육, 그리고 따오기의 지혜를 가진 사내였지만··· 그럼에도 이 도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많은 워커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슨 헛소리야. 이봐. 여기 봐봐.”
제레일은 지도의 한 구석을 짚었다.
“여기. 여기가 중앙 청사지구야. 은행이며 관청이며 죄다 몰려있는 곳인데, 여기에 개쩌는 게 있어서 우리가 온 거야. 너 메를린포트에 뭐가 있는 지 알아?”
“···아뇨?”
“이런 빡대가리 편력 기사새끼들. 쯧. 봐봐. 이게 뭐야.”
제레일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때가 잔뜩 낀 동전 하나를 꺼냈다.
“은화요?”
“’메를린’ 은화! 페이른 왕국 도량 은화잖아! 왜 은화 이름이 메를린이겠어. 여기가 메를린포트 조폐공사가 있는 곳이라고!”
키르하스는 그제야, 워커 사태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은공이 말하길, 워커 역병은 청동 천칭단의 비술이다.
이단심문청과 멀지 않은 곳, 그리고 페이른 왕실에서도 주의 깊게 보호하는 곳. 메를린포트에 굳이 이단 비술을 행하면서까지 그들이 노리는 것.
화폐 시장의 붕괴를 통한 왕국의 몰락!
지금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생존자. 그 중 민간인들은 이제 거의 희생될 테니 제외하고도, 메를린 시가드와 시티가드들은 두 부류의 적과 싸워야 했다.
워커와 청동 천칭단.
그리고 이 도시에 상주 중인, 또는 이 근방을 지나가던 승냥이들.
메를린포트는 몰락할 것이다. 페이른 왕실은 당분간 경제적 공황에 빠질 것이다. 대륙 동부의 가장 강력한 왕국인 페이른 왕국은 얼마간 국가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반드시 청동 천칭단을 제거하려 들텐데···?’
국운이 걸린 상황에서, 왕실이 과연 청동 천칭단을 가만히 둘까? 눈엣가시 같은 지하 교단에서, 이제 국가적인 테러리스트로 발전한 상황인데?
일견 대단한 실적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오판이었다. 분노한 왕실에겐 아직 로얄 그리폰 나이츠가 있었다. 전세계적 관점에서 봐도 수위 안에 들어가는 초인 집단이 남아 있었다.
‘대체 왜?’
*
“바다와 영광을!”
“보고!”
“3시 방향에 적 다수! 워커로 보입니다!”
“7번 분대! 12번 게이트를 방어하라! 실시!”
“바다와 영광을!”
메를린 시가드의 야전 지휘소는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도 질서 정연했다. 시가드 제너럴은 전령을 보낸 후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전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도시 행정부를 보호하는 것엔 성공했지만, 행정부 인사들은 지금 공황에 빠져 떨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워커 역병이 발생한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진행한 적은 없었다.
도시 귀족들은 제각기 자신의 가족을 구해달라고 요청했고, 시가드는 그 말에 즉시 출동해 청사 지구를 장악했다.
이성 없이 달려들기만 하는 워커들은, 한때 사람이었다는 부분만 떼어 놓고 본다면 손쉬운 상대에 속했다.
사람의 치악력으로는 사슬 갑옷을 파고들 수 없었다. 아니, 그냥 가죽 갑옷도 뚫지 못했다.
방진을 잘 짜고, 바리게이트 뒤에서 창을 찌르고 방패로 밀며 저항하기만 해도 청사 지구를 보호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고 할 부분은, 승냥이처럼 덤벼 대는 용병대와,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며 발작하는 귀족들.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서 분전하고 있을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시민을 지켜야 했다.
“대장님! 시장 지구에서 구조 신호가 왔습니다!”
“인원은?”
“알 수 없습니다! 대규모 워커 무리가 시장 지구로 밀집 중에 있습니다.”
“제기랄. 제기랄!”
수비 병력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건 청사 지구부터 시작해 전선을 천천히 확장해 나가는 데에 사용되어야 하는 인력들이었다.
별동대를 꾸릴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막사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천막 너머로 그림자가 졌다. 청년이 천막을 들추며 들어섰다.
“누구시오?”
“이단심문관 안젤로요.”
“···이단심문관? 그다지 좋을 때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소만··· 보호 요청이요?”
“병력 지원 요청이요.”
“미쳤소? 지금 여기 상황이 안 보이오?”
사내,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별동대를 요청하오. 워커 사태의 주범을 검거해야 합니다.”
“주범을 잡으면 워커들이 알아서 혀 깨물고 뒤진답니까? 지금 일어난 일 먼저 해결해야죠!”
“놈들을 놓친다면 다른 도시들에도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소. 그럼 페이른은 끝이요.”
페르난데스는 피로에 찌든 눈매를 쓰다듬었다. 마음만 같아선 그냥 협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워커들에게 발이 묶여 놈들을 놓쳐선 안 되었다. 혼자 움직여서 워커를 뚫고 청동 천칭단을 검거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특정할 수 있는 장소가 너무 많았다. 대충 상황을 확인했을 때, 의심되는 지역은 체크했지만. 그 모든 곳을 그 홀로 탐색할 수는 없었다.
‘키르하스와 합류해야 하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때, 막사 내부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오, 안젤로 경.”
“···카를?”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나는 카를로마노 파빌로스요. 페이른 왕립 헌팅 스쿨의 교수직을 맡고 있지. 함께 하시겠소?”
“놈들의 위치는 알고 있나?”
카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침 내가 쫓던 놈들이 그 놈들인 것 같더군. 시외 공동 매장지역으로 가야 하오.”
“딱 놈들이 있을 것 같은 곳이긴 한데···”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열댓 명의 시가드보다, 단 한 사람의 카를로마노가 더 뛰어난 인재이긴 했다.
어쨌건 단신으로 흡혈귀 대귀족 가문 하나를 멸족시킨 인물이니까.
이제 정말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청동 천칭단, 그 중에서도 워커 역병을 이렇게 즉발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비술을 지닌 존재는 단 한 사람 뿐이다.
데일 페르타스. 네가 직접 여기에 오다니. 어지간히 안달이 났나 보군.
내 오랜 친구여··· 기다리고 있으시게.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깊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