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긴 밤이 되겠군.
“율리안··· 율리안 반 프란츠리트···”
이 주위의 흡혈귀들에겐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예상대로 프란츠리트 혈족의 흡혈귀였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쩌다가 레드 헝거가 된 거지?”
“위험···. 위험해.”
“뭐가?”
“인퍼머르···. 엘핀 서펜트 킹에게···.”
여기서 엘프가 왜 나와? 페르난데스는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신음했다. 엘프? 엘프가 나올 구석이 있나···?
-인퍼머르? 거긴 프란츠리트 놈들 무역항 아니었나?
‘그치? 맞지?’
-엘핀 서펜트킹이라··· 그 놈들도 오랜 만에 들어보는군.
고대에 있었던 천상전쟁 이래로, 엘프들은 대륙을 밟을 수 없는 저주를 받고 영원히 바다를 떠돌아다니거나, 섬에 둥지를 틀고 주저 앉았다.
명망 높은 엘븐 와일드프린스 하우스홀드는 이제 더 이상 기마병이 아니었고, 엘프 군단은 더 이상 대륙을 호령하지 못했다.
드워프는 천상전쟁 때 멸망했고, 엘프는 동시기에 대륙 밖으로 쫓겨 났다. 그리하여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 만신전의 시대가.
‘엘븐 트라이던트에 속한 왕국이 이 근방에 있었나?’
-내 알기론 없는데···.
문제가 있다면, 엘프 해상 왕국이 있는 지역은 여기서 거리가 제법 멀다는 것이었다!
“무슨 개소리야. 엘핀 서펜트킹이 여기서 왜 나와?”
“인퍼머르···. 인퍼머르의 로드 가이메른에게 이걸···.”
율리안이 부들부들 떠는 손을 품에 넣더니, 서신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조작이나 마법적 위협이 걸리지 않은, 평범한 편지였다. 닭의 피로 글을 적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인퍼머르가 가이메른의 항구였다고?”
무역항 인퍼머르가 프란츠리트에게 점거되기 전까지, 가이메른 왕족의 항구였다면. 그리고 가이메른 왕족과의 세력 갈등 탓에 아직까지 서펜츠아일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대충 어떻게든 아귀가 맞는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뽑아, 율리안의 목젖에 데고 고민에 빠졌다. 놈을 살려서 인퍼머르로 향해야 하는 걸까?
사실 서신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그 재수 없고 결벽증 있는 엘프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이라 생각이 되지 않는다.
율리안은 큽, 하는 소리를 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죽여···. 곧, 다시 발작이 온다.”
“흠. 회개 하겠나?”
“사제였나? 큭큭···. 회개는 무슨. 버러지들이···..”
-콰직!
페르난데스는 율리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을 뼈 채로 끊었다. 피가 울컥이며 장판에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젖혀 피를 털고는, 창문을 가로 막은 나무 판자들을 거칠게 뜯어 냈다.
-치이이이익···..
햇빛을 받은 율리안의 시체가 빠르게 기화되어 갔다. 영생을 추구하던 마법사들이 고대의 태양신, 알미트다테스를 살해했던 이후, 선신 만신전에게 직접 받았다는 세 가지 저주 탓이다.
영원히 산 자의 혈액 만을 삼킬 수 있으리라. 영원히 산 자의 시간에 나타날 수 없으리라. 영원히 산 자의 온기를 담을 수 없으리라.
그리하여 그들을 일컬어 흡혈귀라. 태양 아래 활동할 수 없고, 피를 제외한 모든 음식을 섭취할 수 없으며, 한 여름에도 언제나 영적인 추위에 떨며 살아야 했다.
이런 놈들이 제정신 박힌 삶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놀란 키르하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흡혈귀는 처음 봐?”
“네, 은공. 저희 부족에선 전설로만···.”
“거의 전설이랑 같을 거야. 전설보다 강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앞으로 만나면 조심하고.”
“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내려 깔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번 임무는 이렇게 끝인가요?”
“일단 명령서에 나온 임무는 끝인데, 개인적으로 조금 더 알아볼 게 있어. 본단으로 복귀 할 거야?”
“아니요! 은공께서 제가 필요하시다면 좀 더 동행해도 좋을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페르난데스는 씩 웃으며 향로를 꺼냈다. 곧 영체 전령이 향로에서 피어 올랐다. 페르난데스는 방 한 구석에 있는 낡은 탁상에서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
[명령 보고서 : 쥐 잡이]
작전 지역 : 데인 왕국, 베르베스 남작령 제 2 체크포인트.
작전 개요 : 상정 외 워커 사태 발생으로 인한 긴급 조사단 파견.
작전 경과 :
1) 이단 사술로 인한 워커 사태가 아님을 확인.
2) 흡혈귀의 레드 헝거 사태로 인한 대규모 구울 발생 확인.
3) 프란츠리트 혈족 흡혈귀 [율리안 반 프란츠리트] 사살.
4) 체크포인트 내 구울 정화 실시.
작전 테스크포스 팀 :
1)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복귀
2) 토치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 복귀
악마, 이단, 마녀를 불태우리라.
작전 책임자 :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보고서를 다 작성하고 서류를 전령에게 물리려는 찰나, 그의 비전 시야가 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강대한 마법의 발현이다! 페르난데스는 깜짝 놀라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으, 은공!”
“잠시만!”
페르난데스는 창틀에 몸을 숨기고 밖을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 쬐던 마을에 검은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먹구름 사이로 박쥐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곧, 밤이 되었다. 아니. 그믐달이 뜬 밤보다 어두운 낮이었다. 빛 한 점 없는 구름 아래의 마을은 칠흑 속에 잠겨 들었다.
풀 세인트 메탈로 만들어진 은제 장검이 내뿜는 새하얀 빛 만이, 이 어둠 속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욱신!
“윽?!”
그의 등허리에 박혀있는 성흔에서 고통이 치솟았다. 사악한 마물의 접근에, 성흔이 발작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고통 속에서 대기를 뒤덮은 마법을 읽었다.
‘태양증오의 저주···.’
흡혈귀 대귀족들이 낮 동안 외부에 출타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들이 태양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마법이다! 그 말은 즉···.
“토벌대가 왔군!”
몸을 빼기엔 너무 늦었다. 저 멀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
핏빛 마력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시체들이 이끄는 마차의 내부에서. 두 눈에서 푸른 귀화를 붉힌 시체 말 네 마리가 거대한 검은 마차를 이끌고 있다.
마차는 마을 내부로 진입하고, 구울들이 일제히 그늘 밖으로 나와 마차에 조아렸다.
-또각.
마차 안에서, 레이스가 화려하게 치장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내린다. 붉은 힐이 바닥을 딛고, 검고 긴 지팡이가 나타났다.
싸늘한 눈매와 새하얀 피부가 차갑게 빛나는 미녀였다.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쓱 들어 올리며, 구울들 사이로 걸었다.
“정말···. 피곤하네.”
여인은 2층 건물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율리안은 죽은 것 같지? 여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안 내려?”
“누님, 나 좀 피곤한데···.”
“쳐 자. 그리고 뒤져.”
“에휴.”
마차 안에서,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청년이 내렸다. 검은 정장에 우스꽝스러운 지팡이. 그의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마력이 솟구치고 있었다.
흠, 하고 한숨을 내쉰 여인은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깊고, 날카롭고, 예리한 붉은 미소를. 새하얀 송곳니가 반짝였다.
“누구신지 물어봐도 좋으련지요?”
“이단심문관 안젤로.”
-그워어어어어
건물의 1층에,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서 있었다. 구울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여인은 드레스 양 끝단을 잡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베이타서스의 검이셨군요. 소녀는 프란츠리트의 말예, 아멜리아랍니다. 만나뵈어 영광이에요.”
아멜리아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그 눈을 바라보던 키르하스가 순간 비틀거렸다. 매혹의 사술이다.
흡혈귀들이 흔히 사용하는, 먹잇감을 현혹하는 기술이다. 페르난데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지?”
“···?”
매혹이 먹히지 않았다고? 아멜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톡톡 두드렸다.
“제 동생이 이쪽으로 잠시 출타를 나왔는데,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답니다. 피차,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흡혈귀가 피를 보기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마실 피가 아니라면, 솔직히 필요 없죠.”
“아쉽게 되었네.”
-챙그랑.
페르난데스는 품에서 철제 버클 하나를 꺼내 아멜리아의 발치에 던졌다. 아멜리아는 발 밑을 내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프란츠리트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는 버클이었다.
“네 동생은 사제의 권한으로 장례 성사를 치루어 주었다. 좋은 곳에 갔겠지.”
“고작 두 분이서···.”
아멜리아는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를 노려보았다.
“저희를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너희 할 일을 대신 해 주었는데, 뭐가 문제지? 어차피 그 녀석은 레드 헝거였어. 죽일 거 아니었나?”
“제법 박학다식한 분이셨군요. 엔마기카···. 그렇게 불리는 분이 맞으신가요?”
“너도 제법 아는 게 많군. 아니, 디모니카다.”
“악마가 이 근처에 나타났었나 보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아멜리아와 페르난데스는 서로 눈을 돌리지 않고 노려보았다. 아멜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왜 매혹이 듣지 않지?
혹시 싶어서 이번엔 전력으로 걸어 보았는데, 그래도 사내는 돌처럼 단단했다.
“뭐, 좋아요. 율리안, 제 동생은 어차피 제 손으로 처형해야 했으니까요. 그럼 제 동생의 유해는 수습해도 좋을까요?”
아멜리아는 우선 이 사내와 대적하지 않기로 했다. 상대의 저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덤벼드는 것은 레드 헝거나 하는 짓이었다.
진정한 흡혈귀는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만 송곳니를 박아 넣는다.
“햇볕에 잘 말려 주었고, 나머지 유해는 화장했다.”
“그럴 리가.”
아멜리아는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팡이의 틈이 갈라지며, 장검이 뽑혀 나왔다.
“말로는 안 되겠네요. 사제님. 오늘 일에 대해 회개할 시간을 지금 드려야 할까요? 더 남기실 유언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 기다려 드릴게요.”
“바실라.”
페르난데스는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키르하스를 불렀다. 키르하스는 화들짝 놀라며 페르난데스의 곁에 와서 섰다.
“저 여자는 맡긴다.”
“네, 네?!”
“난 할 일이 있어.”
아멜리아는 눈쌀을 찌푸렸다.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시종을 부린다고?
“제가 우스워 보였나요? 아니면, 제 동생을 감당하는 편이 더 쉬워 보이셨나요? 둘 다 아니실텐데요.”
“아멜리아 반 프란츠리트. 말이 길다.”
“···동생아.”
아멜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곁에 건들거리고 서 있는 청년을 불렀다.
“네?”
“죽여.”
“아, 남자는 싫은데···.”
청년은 피식 웃으며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는 페르난데스에게 지팡이를 향하며 말했다.
“잘 봐요, 사제님. 기도도 잘 해두고. 이제 곧 갈 테니··· 어? 어어??? 어?!!”
-파지지직!
청년의 지팡이 끝에서 검은 전류가 흘렀다. 명백한 마력 폭주! 청년은 황급히 수인을 맺으며 날뛰는 마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러나 폭주하기 시작한 마력은 구축된 마법을 찢어 발기며 그의 마력 회로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이런, 씨, 씹, 읍, 누, 누님! 누님!!! 저 새끼 막아야 해요!”
“뭐? 무슨 소리야?”
“저 새끼가 지금, 지금!!!”
-쿠르르릉···
-그워어어어!!!!
검은 먹구름이 천천히 흩어지며, 마을에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구름의 틈새에, 벌써부터 희미해진 사이를 비집고 얇은 빛기둥들이 나타나 마을에 내려 앉았다. 그 새에 구울들이 불타올랐다!
“태양증오의 저주! 그걸 해주 하고 있어요!”
아멜리아는 기겁하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의 왼손이. 그러니까, 검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고, 비틀리며 수인을 짚어내고 있었다.
마법에 밝지 않은 아멜리아라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정교한 손짓이었다. 천천히, 어둠이 걷히며, 그림자 안에선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검은 헤일로···.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로, 검은 왕관 모양 헤일로가 나타나 있었다. 자못 신성하기까지 한 표정과 자세로. 페르난데스는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내가 마법도 잘 쓴다고 말 안 했던가?”
“이이익! 이익! 이단심문관이 맞긴 한 거에요?! 에버렛! 마차 타! 가자!”
순식간이었다. 두 흡혈귀들은 마차에 올라타 문을 쾅 닫았다. 페르난데스는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마차는 하늘이 채 걷히기 전에 황급히 마을을 벗어났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밤에 두고 봐요!!!!”
페르난데스는 그들이 지평선 끝까지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먹구름이 천천히 걷히고, 페르난데스의 등 뒤에 떠 있던 헤일로가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으, 은공? 왜 추격을 하지 않으셨는지···.”
“이것도 허장성세였거든.”
페르난데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공?!”
“아, 너무 피곤한데···.”
역시 대주술에 주문 쐐기를 박아 넣는 작업은, 피로했다. 전성기의 힘과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면 저 정도 주문이야 간단한 일이었지만. 청동 왕좌를 활용해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청동 왕좌에 접속해 마력 회로를 만든 것이 이제 열흘이 채 되지 않았다. 즉,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마력량은 마법대학 1학년생 수준이었다.
오로지 그의 지식와 센스에 의존하여 기적과 같은 정밀한 마력 운용으로 상대의 주문에 카운터를 넣는 것. 지금은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밤을 대비해야 해. 키르하스. 저 녀석들은 반드시 다시 올 거야.”
“아까처럼은···.”
“아마 안 되겠지. 저쪽에서도 준비를 하고 올 테고.”
“지원 요청은···.”
“오늘 밤 안에 도착하진 않을 거야. 긴 밤이 되겠군. 눈을 좀 붙여 둬.”
디모니카는 사흘은 잠을 자지 않아도 활동할 수 있다. 반면 키르하스는 매일 밤 숙면을 취하는 편이 나았다. 오늘 밤은 힘들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