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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7화 (28/388)

27. 멜리실두르의 여명

-타다닥, 타닥.

페르난데스는 염장 육포를 모닥불에 구우며,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무지의 저녁은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새 육신을 얻은 뒤로, 페르난데스는 자연 경관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전생엔 뭐 다 오염된 것들 뿐이었으니까.’

-언제는 그래서 좋다며.

‘그건 너 였을때나 그런 거고.’

-이젠 그걸 구분하는 거야? 의미 없다는 걸 알잖아. 나는 너야.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진짜 정신병자 같은데?’

-왜 아니겠어? 지금 너는 너랑 혼잣말을 하고 있는 셈인데.

페이자쉬는 큭큭 웃었다. 하긴 같은 정신체에서 혼과 성이 갈린 셈인데, 넓은 범주에서 보면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지.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그래서, 오늘 밤엔 살아남을 수 있겠어?

‘준비는 해 뒀어. 이걸로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 곧 밤이 찾아온다. 프란츠리트의 분노한 집행자들이 페르난데스의 피를 갈망하며 찾아올 시간이다.

마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들을 살피며 지평선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흡혈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흡혈귀도 이단이긴 하지?’

-악마 숭배자는 아니긴 해도, 뭐···. 선신 만신전 기준으로는 이단이긴 하지.

또 이 놈이 무슨 소릴 하려는 거지? 페이자쉬는 인상을 찌푸리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지평선 끝에 걸려있는 검은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단심문관의 시간이라고 봐야지! 키르하스! 일어나!”

“헛, 흡! 씁!”

키르하스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모포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입가에 침을 닦으며 무구를 집었다.

“이단을 정화하자!”

*

-두두두두···.

검은 사두 마차가 황야를 달리고 있다. 해골 마부가 이끄는 네 마리 시체 말은 그 자체로도 불경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아멜리아는 벨벳 소파 위에 앉아서, 칼날을 닦고 있었다.

“아, 누님. 쫌! 마차 안에선 칼 뽑지 말라니까!”

“자꾸 투덜거리면 뒤져?”

“뭔 말 끝마다 뒤져야! 우리 어차피 뒤진 놈들인거 몰라?”

“오늘따라 왜 이럴까?”

-스릉···.

아멜리아는 칼을 가볍게 휘둘렀다. 허공을 베어내는 감촉이 날렵했다. 에버렛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움츠렸다.

“왜 우리 율리안은 그렇게 귀찮은 곳에서 뒤진 걸까. 이단심문관이라니, 심지어 디모니카 이단심문관이랑 싸우고 싶지 않은데···.”

“근데 그 놈 그거 이단심문관 맞아요? 흑마법 쓰던데?”

“그러게. 이상하지? 한번 죽였다가 일으켜서 물어볼까?”

아멜리아는 쿡, 하고 웃었다. 흡혈귀의 가학성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흘러 넘쳤다. 그때, 에버렛이 기겁하며 말했다.

“카, 칼 집어 넣어요! 누님! 엎드려!”

“뭐···어어어어?!?”

-콰아아아앙!

엄청난 충격이 마차를 덮쳤다! 엎드리던 에버렛이 허공으로 튕겨나가고, 마차의 한쪽 문이 부서져 날아갔다. 바깥 풍경이 한 바퀴 빠르게 돈다!

“이게 뭐···야아아아!!!!”

-쿠우우웅!

마차가 순식간에 전복되며, 아멜리아와 에버렛은 바닥을 굴렀다.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만, 충격이 엄청났다.

마차의 부서진 바퀴가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다. 저 멀리 검은 밤 하늘이 문 밖으로 보였다.

“으으으···.”

“누, 누님. 괜찮아요?”

에버렛과 아멜리아는 끙끙 거리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들의 긴 삶에서, 마차가 옆으로 누워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과 붉은 공···. 붉은? 불타는? 불타는 공···?

“화염 작렬?! 씨바! 누님! 나와!!!”

-와락!

에버렛은 멍하니 서 있는 아멜리아의 멱살을 잡고 마차 밖으로 뛰어 올랐다.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진 불타는 공은 에버렛이 마차를 벗어나자마자 마차에 직격했다.

-콰아아앙!

에버렛과 아멜리아는 바닥을 세 바퀴 굴러 몸을 피했다. 고급 정장이 황무지의 흙으로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마차가 터져 나가며 불에 타들어갔다. 아멜리아는 씩씩거리며 마을 어귀를 노려보았다.

“이단심문과아안!!!!”

“어 왔어? 편하게 들어와.”

“흡혈귀를 초대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알고 계시는 거겠죠? 좋아요. 좋오오아요! 그 승부 받아들이겠어요!!”

흡혈귀의 민감한 시야에, 저 멀리 2층 건물 위에서 팔짱을 낀 채로 여유롭게 웃고 있는 페르난데스가 보였다! 아멜리아는 두 눈이 붉게 달아오르며 뛰어 들어갈 준비를 했다.

“자, 잠깐 누님! 잠깐만. 진정해봐!”

“···? 왜! 뭐! 뭔데!”

“마을 입구에만 함정이 두개 깔려 있었어!”

에버렛은 마법사였고, 상대방이 적어도 자기보다 반 수 위의, 어쩌면 두 수 정도 위의 마법사라는 것을 인정한 상태였다.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둔 마법사의 진지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저 안에 뭐가 있을 지 모르는데, 그냥 그렇게 들어 가려고?”

“다른 방법 있어?”

“어···.”

“고작 인간 둘인데, 싸우기도 전에 겁먹고 도망쳤다고. 가주님께 보고하고 싶어?”

“으···.”

“야, 누나가 있잖아. 걱정 마. 동생아.”

불안해 하는 에버렛의 팔을 이끌며, 아멜리아는 당당하게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

“쯧.”

두 흡혈귀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혀를 찼다. 그도 고작 저 정도로 놈들이 꼬리를 말고 도주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둘 중 누군가 하나 정도는 유효한 피해를 입었으면 했었다.

절대적인 전력에서 고위 귀족 흡혈귀 둘을 상대하기엔 모자라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전성기 키르하스였다면 지금 프란츠리트로 진격했을텐데···’

-저 계집의 전성기는 적어도 30년 뒤야. 아직 너무 이르지.

‘아쉽군.’

어쨌건 아직 낼 수 있는 수는 충분했다. 페르난데스는 은제 장검을 꽉 움켜쥐고, 이단심문청의 문양이 박힌 카이트실드를 들어 올렸다. 묵직한 무게만큼 신뢰감 있고, 범용성 높은 장비였다.

“키르하스. 플랜 B야. 알지?”

“네!”

키르하스는 재빨리 마을 골목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페르난데스는 마을 광장에 서서, 정면에서 다가오는 흡혈귀 둘을 바라보았다.

“쓸 만한 패는 다 꺼내셨나요? 이젠 아까 낮과 같은 요행은 일어나지 않아요. 이단심문관!”

“아까 낮이 요행이었다고? 글쎄···. 네 동생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은데?”

“큿!”

아멜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대화는 그만! 궁금한 건 시체에 물어보도록 하지요!”

-타다닷

아멜리아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 광원이 극도로 부족한 어두운 밤에, 오로지 희미한 달빛만이 칼의 궤적을 밝힐 뿐이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도, 아멜리아도, 저 멀리 에버렛이나 어딘가에 숨어 있는 키르하스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 정도의 어둠은 대낮처럼 밝게 볼 수 있는 자들.

흡혈귀, 디모니카, 그리고 묘인족. 그들에게 있어서 기습은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채앵!

페르난데스는 방패로 아멜리아의 검을 거두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칼날이 춤을 춘다. 아멜리아는 거의 보이지 않는 속도로 칼을 거두며, 페르난데스의 검에 칼날을 부딪쳐갔다.

-챙! 채앵!

검과 검이 서로를 긁으며 불똥이 튀었다. 어마어마한 힘의 격돌이다. 페르난데스는 팔에 밀려드는 압력을 느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힘에서, 결코 페르난데스의 아래가 아니다. 더불어 기술도···.

-챙!

“하, 하하! 이단심문관! 고작 이 정도였나요?!”

-챙!

아멜리아의 칼이 페르난데스에게 얽히고, 지렛대처럼 비틀리며 목젖을 향해 파고든다. 검술 교본에 나올 것 같은 카운터.

페르난데스는 머리를 젖혀 피하며 방패로 아멜리아의 어깨를 밀었다. 이 또한, 교본과 같은 실드 베쉬!

-투우웅!

“큿! 이 힘만 좋은 사내가! 에버렛! 쏴!”

-콰지지지직!

페르난데스가 지금 아멜리아에게 묶여 있다는 것은, 마법사를 견제할 마법전력이 없다는 뜻. 자유롭게 마법을 영창한 에버렛이 돌연 핏빛 번개를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에 소환했다.

“흡!”

페르난데스는 방패를 머리 위로 들고 떨어지는 낙뢰를 막아냈다. 방패 표면을 타고 붉은 전류가 타닥인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고, 와류로 머리칼이 빳빳하게 섰다. 하지만 아직 유효한 피해는 없었다.

“빈틈!”

-챙!

페르난데스의 자세가 무너지자, 아멜리아가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페르난데스는 저릿한 팔을 휘두르며 아멜리아의 칼을 막아 내었다.

-챙! 채앵!

“어디! 그 묘인족 기집애는 도망쳤나보죠?!”

“아니!”

“···네?”

페르난데스는 돌연 거칠게 횡으로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바실라아아!!!”

“넵! 은공!”

소리가 난 방향이··· 뒤?! 아멜리아는 기겁하며 뒤를 돌았다. 다음 주문을 영창하고 있는 에버렛의 곁에서 칼날이 튀어 나왔다.

에버렛은 칼을 바라보고 당황하며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그의 곁에 나타난 키르하스가 더 빨랐다.

-푸욱!

“크으윽?!”

키르하스의 검이 에버렛의 옆구리를 치고 지나갔다. 키르하스는 치고 간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가 얕다! 그녀의 예상보다 흡혈귀의 신체는 밀도가 높았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바닥을 굴러 자세를 잡았다.

“죽어라, 마법사!”

“이, 더러운, 묘인족, 기집이!”

에버렛은 피가 흐르는 자신의 옆구리를 보더니 귀신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잘생긴 귀족 청년 같은 얼굴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악마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붉은 눈빛을 흘리며, 그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소리질렀다.

“죽여버리겠다! 피를 모조리 뽑아내주마!”

-콰아아앙!

“읏!?”

에버렛이 돌연 지팡이를 휘둘러 육박전을 걸어왔다. 키르하스는 당황하며 칼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에버렛의 근접전 기술은 생각보다 수준이 낮지 않았다.

“하하, 바보들! 이단심문관! 내 동생이 허약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나봐요!”

고위 귀족 흡혈귀. 수백 년을 살아가는 그들이 익힐 수 있는 재주가 어디 하나 둘일까. 아멜리아는 페르난데스의 계획을 비웃었다. 고작 마법사를 암살하는 정도가 끝이었나?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비죽 웃으며 아멜리아의 검을 크로스가드로 막아내고 비틀었다. 잠시간의 힘의 교착. 아멜리아와 페르난데스는 서로를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 날카롭게 치솟은 아름다운 눈매와 새하얀 피부. 이에 대조되는 검은 드레스···. 페르난데스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멜리아로써는, 페르난데스의 저 여유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세는! 이제 당신은 뒤졌어요!”

“그러는 너는, 내가 힘만 센 이단심문관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

아멜리아는 페르난데스의 말에서 본능적인 경종을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빼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근접 상태에서, 힘싸움을 하는 도중 칼을 회수하고 빠지는 것은 극도로 위험했다. 그 빈틈에 검격을 세 번은 더 맞을 수도 있었다.

“이···익?!”

“자, 이거 봐.”

페르난데스는 방패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손목에 가죽 걸쇠를 매어 둔 방패의 뒷면. 페르난데스의 자유로운 왼손은, 천천히 비틀리며 수인을 짚고 있었다.

“마, 마법사!”

너무 가까운 탓에, 이 어둠 속에서도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에 떠오르는 검은 헤일로가 보였다.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치켜 뜨며 칼에 힘을 더했다.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이 새끼 이거 맞아, 마법사였지!

-챙! 챙!

“이이익! 놔, 놔요!”

아멜리아가 페르난데스를 떨어트리기 위해 칼을 휘두를 때 마다, 페르난데스의 칼날이 더 깊게 그녀를 속박했다. 그리고 곧 검은 헤일로가 불타오르는 듯 일렁였다.

플랜 B. 키르하스가 적 마법사를 묶어 주문 방해를 차단하는 동안, 페르난데스가 아멜리아에게 마법을 먹여 전력 비대칭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페르난데스의 손이 마침내 허공에서 마력을 움켜 쥐었고···.

마법이 완성되었다.

-멜리실두르의 여명···.

페이자쉬는 완성된 마법을 보며 감탄했다. 고대 세계수의 빛이라. 페르난데스의 마력량으로는 실체화된 ‘세계수의 빛’을 소환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세상이 한 순간 빛으로 삼켜지고,

뒤섞여 싸우던 네 사람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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