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우리는 거짓의 색을 볼 수 있다.
-콰르르릉···
황야의 밤은 깊고, 길고, 어둡다. 이런 먹구름 낀 날이면 더욱이. 이런 날을 이 근방 주민들은 ‘박쥐 구름’이라고 불렀고, 이는 대단히 사실에 근접한 무미건조한 표현에 가깝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다. 두꺼운 망토를 둘러 쓴 이방인은 모닥불에 손을 녹이며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흡혈귀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녀의 임무는 기록과 정찰이 아니었으니. 아직은.
-콰르르릉!!
저 멀리에서 거대한 빛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순간 백야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선명한 빛이 지평선을 밝혔다. 짙게 깔린 검은 먹구름과 그 아래의 마을이 망막에 잔상으로 남아 아른거렸다.
“멜리···실두르의 여명···?”
어느새, 그녀는 벌떡 일어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소드 벨트에 감겨 있는 세 자루의 장검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절그럭, 부딪쳤다. 사금처럼 반짝이는, 부드러운 은발이 귓가에 쓸려 흩어졌다.
뾰족하고 하얀 귀, 날카로운 턱선에서 날선 눈매. 토파즈처럼, 푸른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물고, 황급히 모닥불에 흙을 끼얹어 껐다.
망토를 휙 감아 몸을 감싸며, 그녀는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그녀의 말이 깜짝 놀라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말의 등을 토닥이고는 박차를 찼다.
-히이이잉!
“가자, 이멜다. 확인 해보자.”
그녀, 레이아 핀 가이메른의 임무는 접선 지역의 확보와 요인과의 접촉, 그리고 호위였다. 접선 지역에서 벌써 닷새 간 노숙한 탓에, 그녀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쨌건 멜리실두르의 여명이 확실하다면 그녀에겐 해당 지역의 사건을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건 모든 바다 엘프들의 의무였다. 설령 하프 엘프에게라도.
*
“크아아아악! 죽이겠어! 죽여 버리겠어요! 당시이인!!!!”
아멜리아는 반쯤 녹아 내린 얼굴을 움켜쥐며 헐떡였다. 세계수의 빛을 정면에서 쏘인 탓에, 아멜리아의 육신과 정신은 천천히 분해되고 있었다. 고위 흡혈귀의 회복력이 간신히 그녀에게 실낱같은 이성을 붙이고 있었다.
“회개 하겠나. 흡혈귀?”
“이이이이!!! 잇! 개 같은 사제! 죽여 버리겠어!!”
페르난데스는 침과 피를 뚝뚝 흘리는 아멜리아에게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이제 완전히 정신력과 마력을 소비해버린 페르난데스로써는, 당장 칼을 휘두를 힘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제기랄, 역시···. 베레일데 학파 마법은 무리군.’
-그걸 진짜 쓸 줄은 몰랐다.
‘기제와 공식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 무리했네.’
고대 마법으로 통칭되는 실전된 마법 학파 중, 전생에 붙잡아 고문했던 현자에게 얻은 비서가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베레일데 학파]라고 불리는 고대 마법을 취미 삼아 연구한 적 있었다.
흑마법과 상궤가 다른, 고대 엘프 오왕국 시절의 마법···. 분명 강력하지만, 흑마법사로써 감당하기엔 부작용이 끔찍했다.
당시 그로써는 감당할 수 없었고, 지금이라면 아직 지옥 마력을 사용하기 전이었으니 얼추 모사까진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그 꼴이 지금 이 모양이다. 페르난데스는 엄청난 탈력감에 비틀거렸다.
하지만 흡혈귀의 체력이 조금만 더 회복된다면, 그땐 정말 승산이 없었다. 사실 고위 흡혈귀를 상대로 이렇게 싸우는 것 조차 대단한 도박에 가까웠다. 이제 도박을 끝낼 차례였다.
-챙!
“윽?!”
페르난데스의 칼을, 아멜리아의 칼이 튕겨냈다. 아멜리아는 얼굴을 부여잡고 온몸을 비틀면서도 자신에 대한 공격을 감지해낸 것이다.
이 흡혈귀를 더 살려두는 건 위험하다! 페르난데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원한이 생긴 흡혈귀만큼 끔찍한 것은, 원한이 생긴 리치나 원한이 생긴 드래곤 정도가 있을 것이다. 즉, 그 정도로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급히 키르하스의 상태를 살폈다.
-콰앙! 쾅!
“큿!!”
키르하스 또한 공세를 잇고 있었지만, 거리가 있었던 탓인지. 마법사였기에 회피할 수단이 있었던 것인지.
에버렛은 키르하스의 공격을 쉽사리 막아내고 있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저릿한 팔을 억지로 피며, 아멜리아의 목을 노렸다. 그떄, 아멜리아의 한쪽 남은 눈이 번뜩였다.
-콰직!
“윽!”
“잡았다. 이 버러지···.”
아멜리아는 어느새 제법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손으로 페르난데스의 검을 움켜 쥐었다.
검신에 살이 베이며,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풀 세인트메탈로 만들어진 장검은 사악한 존재에 대한 대응책이었지만···.
“크으으으···. 간지럽군요!”
-콰지직···.
아멜리아는 손이 엉망으로 부서지는 과정에서, 동시에 손의 형상을 꾸준히 회복시키며 장검을 움켜 쥐고 당겼다. 성문의 도르래처럼, 엄청난 힘이 장검을 쥐고 당기기 시작했다.
“바로 죽이진 않겠어요. 이단심문관! 뼈를 발라내고, 피를 모조리 뽑아 마시고, 영혼을 찢어 발기겠습니다. 두고 봐요. 그 모든 순간에도 당신은 원하는 대로 뒤지지 못할 테니까!”
아멜리아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이제 페르난데스의 턱 밑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저 끌려가지 않는 것이 전부였다.
“은공!! 은공!!!”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위기를 보고 울부짖었다. 당장이라도 페르난데스가 물어 뜯길 것처럼 보였다. 키르하스는 이를 악 다물며 칼을 휘둘렀다.
-콰아앙!
“니년도, 죽여, 주겠다!”
에버렛은 거칠게 지팡이를 휘둘러 키르하스의 칼을 튕겨내며 힘을 모으고 있었다. 마법이야 지금 방해 탓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어쨌건 이 어린 묘인족 계집애한테 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죽어라!!”
-후우우웅.
키르하스가 자세를 채 가다듬기도 전에, 에버렛의 지팡이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키르하스의 눈이 빛났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한 순간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
에버렛이 놀라 뒤로 물러설 때, 이미 그의 심장에 칼이 박혀 있었다. 키르하스는 빠르게 그의 옆으로 돌아,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있었다.
“크으흐··· 이··· 더러운··· 묘인족!!”
“이, 이거 놔!”
에버렛은 피를 토하며 키르하스의 팔을 꽉 움켜 쥐었다. 축성 받은 장검에 심장이 꿰인 에버렛으로썬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그렇다면···.
“네 주인이 죽어가는 꼴을 지켜보거라. 계집!”
시간을 벌어주여야 했다. 그의 누이를 위하여! 저 이단심문관만 쓰러트린다면 승산이 있었다! 임박한 죽음과, 살육에의 광기로 달아오른 에버렛의 머릿속에, 순간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저 놈. 디모니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은공!!!! 안 돼!!!!”
키르하스는 팔을 빼내며 비명 질렀다. 페르난데스의 목젖 바로 아래로 다가온 아멜리아의 턱이 크게 벌어졌다.
거대한 충격이 에버렛의 뇌리를 강타했다. 디모니카 이단심문관의 혈액엔 신성이 흐른다!
"누, 누님!!! 안 돼요!!!"
그의 다급한 목소리는 갈증과 광기에 젖은 아멜리아에겐 닿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다가오는 아멜리아의 송곳니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체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이런 어설픈 공격 쯤은···. 하지만 무리한 마력 운용으로 그의 몸은 이미 거덜나 있었다.
-결국 한 번 죽는군. 아주 어설펐어.
'플랜 B의 마지막은, 내가 피를 빨리는 것이었어. 지금 전력으로 그 정도 희생 없이 고위 흡혈귀를 쓰러트릴 순 없지.'
-콰직!
“컥.”
아멜리아의 턱이 페르난데스의 목젖을 씹었다. 피가 울컥, 하고 튀었다. 아멜리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며 웃음을 지었다.
달콤한, 신선한 혈액. 정결한 사제의 피···. 아멜리아는 점차 온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부서져가던 몸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벌컥, 벌컥. 페르난데스의 목젖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그녀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흡혈귀들은 오로지 이 순간에만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산 자의 체액이 갖는 그 뜨거운 핏물을 마시는 순간에만.
‘아 따듯해. 아니, 뜨거워.’
아멜리아는 홀린 듯 피를 마시는 것에 심취했다. 페르난데스의 몸이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워. 몸이 뜨거워···?’
-화르륵!
“크흐읍?!”
아멜리아의 몸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상처가 수복되고 있는 그녀의 반신에서부터 옮겨 붙은 불길이 점점 더 크게 일어났다.
“으으익!!!! 이게, 이게 뭐야아!!!”
혈액은 생명의 화폐. 디모니카의, 심지어는 성흔까지 박혀있는 디모니카의 혈액 속에 녹이 있는 영성의 격이, 흡혈귀의 영육을 불사르고 있었다!
-푸욱!
“어···?”
아멜리아는 불타오르는 몸을 털며 발버둥치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멈칫했다. 그녀의 가슴에 새하얗게 빛나는 은제 말뚝이 박혀 있었다.
“네···놈···?”
“후··· 한번 죽었더니 좀 낫군.”
“···불사···?”
페르난데스는 뚜둑, 하고 목을 비틀며 웃었다. 마력도, 정신력도, 체력도 제법 돌아와 있었다. 그는 아멜리아의 가슴 한 가운데에 말뚝을 박아 넣으며 천천히 비틀었다.
“커···흑···!”
“내 생각엔, 페이자쉬. 불사의 축복은 시간선을 건드리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에도 그렇군. 체력과 상처가 수복되는 방식이 치유가 아니라 복구였다.
아멜리아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아니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페르난데스의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무감각했다.
“흥미로워. 한 번 죽어본 보람이 있어. 회수에 제한이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면, 다음 실험에 죽는 것 아닌가?
“성흔이 박혀 있는 이상 효과가 지속된다고 가정하는 게 맞지 않아?”
-타당하군.
“지금···큭···무슨 개소리를··· 혼자···. 너, 넌 뭐야···?”
아멜리아의 눈에서 주륵, 피눈물이 흘렀다. 피가, 그리고 생명이 급격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멜리아의 힘 빠진 몸을 밀어 쓰러트렸다.
“이단심문관 안젤로다.”
아멜리아는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페르난데스의 등 뒤를 바라보며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곧, 그녀의 동공이 풀렸다.
“은공! 은공!!!”
“어떻게 살았는지는 묻지 않기?”
“네! 네! 네! 살아계셔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에버렛의 손을 푼 키르하스가 달려와 페르난데스의 품에 안겨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토벌대를 죽였다면 이제 조사단이 파견 될 거야. 내일 밤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해.”
“어디로 가야 하죠?”
“그야 당연히···.”
노래하듯,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인퍼머르지.”
키르하스의 귀가 퍼뜩 놀라며 쫑긋 섰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토닥이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안내해 주시겠소?”
“물론, 아주 흥미롭기도 하구나. 이단심문관.”
바람에 따라 은발이 사금처럼 반짝이며 흐드러졌다. 구름 걷힌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피부는 마치 백사장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 자루의 장검이 절그럭거리고, 소드 벨트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레이아가 걸어 나왔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륙의 옛 패자를 만나 뵈어 영광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의 이름이?”
“레이아 핀 가이메른. 그쪽은?”
“안젤로, 성은 없소.”
“혹시 알아? 우리는 거짓말의 색을 볼 수 있다는 걸.”
레이아는 푸른 눈을 빛내며 미소 지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실례했소. 그런 전설을 들은 바 있지. 용서를 바라오. 우리 종족은 공기와 법과 태양, 그리고 거짓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이해하지. 너희는 언제나 그래왔으니.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좋아, 그렇게 불리길 원한다는 거지. 안젤로?”
“호의에 감사하오.”
“뭘. 박쥐 적은 우리 친구지. 아직은 말야. 자, 우리 사자가 우리한테 남긴 편지가 있을 텐데?”
페르난데스는 품 속에서 밀봉된 편지 봉투를 꺼냈다. 닭의 생혈로 적힌, 프란츠리트의 인장이 박혀 있는 편지. 아마도 이 토벌대는 이 편지를 탈취하기 위해 온 것이었을 터였다.
“어쩌다보니 내가 습득했소만, 사자의 유언은 서펜트 킹에게 직접 전달해달라는 것이었소.”
“나는 서펜트 킹의 딸이야.”
“그 말을 믿고 달라는 거요?”
“우리 종족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럼 지금 거짓말 하는 색깔이 보이겠군?”
페르난데스의 말에, 레이아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위협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지금 나를 조롱하는 건가, 인간?”
“서로 거짓말을 한 번씩 했으니, 이번엔 넘어가기로 합시다. 서펜트 킹을 직접 알현하길 청하오.”
“흠···. 기개가 있군. 좋아. 마음에 들어.”
레이아는 픽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재밌는 인간이로군. 우리 폐하 앞에서도 저 자세를 유지할지 궁금해. 레이아는 페르난데스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