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9화 (30/388)

29. 인퍼머르, 항해자의 도시 (1)

엘프들의 고지식함, 그리고 오만함과는 별개로 그들의 도시는 대단히 유동적이었다. 내륙에 발을 딛지 못하는 엘프들은 배 위에 도시를 올렸고, 따라서 엘프들의 도시는 언제, 어디에서나 절반 이상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가이메른 왕실의 항구 도시, 인퍼머르. 페르난데스는 수평선을 가득 채운 엘프 대상단과 군함들을 볼 때 마다, 전생의 기억이 혼재되어 혼란스러웠다. 그가 기억하는 인퍼머르의 모습은 죽음과 부패, 그리고 흡혈귀들이 가득한 저주 받은 항구였다.

“엘븐 에일 팝니다! 엘븐 에일이요!”

“쌉니다! 엘프 대장장이 특집! 식칼부터 대검까지! 금속 무게로 팝니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그러나 레이아를 따라서 입성한 인퍼머르는 생명의 활기가 넘치고, 신선한 음식 냄새가 행인을 유혹하는 번성한 항구 도시의 전형이었다.

곳곳엔 엘프 특유의 목제 양식으로 축조된 건물들이 얽혀 있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거리를 환기하는 곳이었다.

엘핀 서펜트 킹이 직접 다스리는 도시라는 것이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일반적인 엘프 부족은 왕국이나 수도의 개념이 없다. 그들은 유랑 민족이며, 엘핀 서펜트 킹의 궁궐은 언제나 거대한 선박이었다.

이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서펜트 킹의 기함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친 항만에, 인간과 하프엘프들이 만들어낸 도시가 붙어 있는 형상이었다.

항구에 빼곡히 들어선 선박들은 그 자체로 집이요, 거리요, 상가였으며 동시에 도시였다.

즉, 이 기이한 항구 도시는. 그 절반이 배와 항구로 이루어져 있고, 남은 절반만이 육지에 해당했다.

“신기한가, 이단심문관?”

“대단히 인상 깊군.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도시가 이토록 조화롭겠소.”

도시 기능의 절반이 배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니. 키르하스는 정신없이 도시의 경관을 구경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내륙에 발을 디디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지.”

페르난데스는 인퍼머르의 경관을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어떻게, 흡혈귀들은 이 강력한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인퍼머르는 공격하기 수월하지만, 방어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인퍼머르의 절반인 내륙 도시는 분명 변변한 수비 병력이 없는 자유 무역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세계 최강의 해상 군사력을 가진 엘프들의 영역이었다.

바다 위에서 엘프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도시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품 속에 있는 밀봉된 편지를 떠올렸다.

뭐가 되었든, 이 편지의 내용이 그 실마리가 될 것이다. 프란츠리트의 도망자가 엘핀 서펜트 킹에게 보내는 편지가···.

*

-철컹.

“알현실에선 무장할 수 없다.”

중장갑을 입고 있는 엘프 경비병이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에게 창을 겨누며 말했다. 뭐, 그렇다면 따라야지.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병장기를 풀어 시종에게 건네며 어깨를 으쓱였다.

“레이아 핀 가이메른. 입장하시오.”

“입장하시오.”

거대한 바다뱀이 양각된 새하얀 목제 문이 천천히, 아무런 소음 없이 열렸다. 엘핀 서펜트 킹의 기함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왕성과 다름 없었고. 그 내부에 작은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거대했다.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총 일곱 번에 가까운 검문을 받아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가벼운 튜닉 차림으로, 아무런 무장이 없다는 것을 연신 확인 받은 이후에.

“제법 몸이 단단하네?”

레이아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가느다란 은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리고, 새파란 눈이 반짝였다. 역시 엘프 다운 미모다. 페르난데스는 따라 웃으며 말했다.

“엘프식 칭찬법도 가르쳐 주겠소?”

“뭐? 큭큭!”

레이아는 새하얗게 웃으며 앞서 걸었다.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거렸다. 엘프식 정장을 입은 레이아는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엘프가 보기는 참 좋아.’

-속 안이 안 좋아서 그렇지.

‘속이야 뭐, 까보기 전엔 모르는 거고. 까볼 생각도 없고.’

키르하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페르난데스를 쿡쿡 찔렀다.

“불경해요!”

어···. 얘가 원래 이렇게 신실했던가?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성장 배경이 전생과 달리,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이니까. 신실할 수도 있겠지.

그들은 삼엄한 엘프들의 감시를 받으며, 왕의 전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거대한 아치형 기둥을 지나자, 기둥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돌연 크게 외쳤다.

“경배하라, 일곱 바다와 다섯 왕국의 으뜸을! 대양의 지배자이자 폭풍의 창이시며, 파도의 선지자이신 단 한 분이로다! 경배하라, 위대한 왕을!”

참 장황하기도 하다. 페르난데스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엘핀 서펜트 킹이 저 놈 한 명이 아닌데, 왜 저렇게 거창한 건지 모르겠군.

‘원래 왕이란 것들이 다 그런 족속들이지. 겸손하면 왕노릇 하겠어?’

-하긴 트라이던트 삼 왕국 놈들이 다 저 모양이었으니 멸망했지.

어쨌건 이 시기의 가이메른 왕실은 유랑 민족이 아니었단 뜻이겠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부복하며 외쳤다.

“베이타서스의 검, 안젤로가 위대한 대양의 지배자, 엘핀 서펜트 킹 가이메른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거라.”

나른한 목소리가 전당을 천천히 울렸다. 왕의 알현실은 옥좌를 중심으로 작은 소리에도 메아리가 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었고, 따라서 엘프 왕은 작게 속삭이면서도 알현실 전체에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인간의 솜씨로는 만들 수 없는 건축물이었다.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무 뿌리를 얽어 사슴 뿔을 구현한 듯, 복잡하게 얽혀 있는 왕관이 먼저 보였다. 반짝이는 새하얀 은발과 깨끗하게 뻗은 이목구비, 지혜와 오만함, 기쁨과 성가심. 그 모든 감정의 색체가 뒤섞인 표정을 지은 중년 엘프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한때 모든 이들을 굽어 보는 위치에 있었던 페르난데스로써는, 엘프 왕의 모습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저 표정은 얼마나 연습한거지?’

결코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없는 권위적인 표정이었다! 엘프 왕, 가이메른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여를 위해 먼 길을 걸었구나. 인간 방랑자여. 가진 것을 보여도 좋다.”

그 말에, 시종이 걸어와 페르난데스에게 손을 뻗었다. 시종이 들고 있는 보라색 비단 위로,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올렸다.

시종은 정확한 보폭으로 열여덟 걸음을 걸어 엘프 왕의 발 밑에 엎드렸다. 엘프 왕은 손을 뻗어 페르난데스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잠시 편지를 쥐고 무언가를 살펴보더니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읽어 보았느냐?”

“감히 서펜트 킹의 서한을 제가 읽을 수 있었겠습니까?”

“서펜트 킹이라···. 인간이 그리 말하니 제법 유쾌하구나. 한때 여를 세계수의 왕이나, 포레스트 킹이라 부르던 인간들도 있었고, 초원의 군왕이나 대륙의 패자라 부르던 인간도 있었다.”

가이메른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음 시대엔, 그리고 그 다음 시대엔 여를 무어라 부르겠느냐, 인간?”

“무엇이 되었든, 위대한 왕이라 부르겠습니다.”

“큭큭, 제법 혀가 매끄러운 인간이로다.”

가이메른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뜯었다. 그는 한참 편지를 읽고는 천천히 내려 놓았다.

“재미있는 말이구나. 인간아. 그대는 이 서신의 내용을 예상할 수 있겠느냐?”

“제가 감히 추측컨데.”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란츠리트의 흡혈귀가 제 가문을 피해 전달하려 했으니, 흡혈귀의 공작이 있을 것이며, 엘프의 군왕께 전달하려 했으니 프란츠리트 혈족의 내분과 엘프 왕실의 내분. 그 둘을 말하려 함이 아니었겠습니까?”

“불경하다!!”

엘프 왕실의 내분이라는 말에, 알현실에 시립하고 있는 엘프 대신들이 일제히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덤덤히 가이메른을 올려 보고 있었다.

(1) 결코 쇠락하지 않은 엘프 왕실이 전쟁에 패해 유랑 민족으로 전락한다.

(2) 이 전쟁의 승자인 프란츠리트 혈족에겐 해상 군사력이 없다.

(3) 그렇다면 해상 군사력을 가진 세력을 등에 업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4) 엘프 해군을 이길 수 있는 해군은 엘프 뿐이다.

이 가정의 결론은, 엘프 왕실의 분열 뿐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서신을 굳이 뜯어보지 않음은, 비단 엘프 왕의 심기를 기휘함 뿐만이 아니라,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혀 뿐만 아니라, 머리 쓰는 재간도 매끄럽구나.”

가이메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틀렸다. 이건 그대 인간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노라. 그걸 인간이 들고 오니 썩 유쾌하구나.”

‘함정이었다고?’

-그럴 리가. 함정을 팔 만한 정보가 없었을텐데?

‘편지가 진본이라면, 엘프 왕은....'

-그래, 우리에게 바라는 게 있겠지.

-철컹! 철컹!

알현실의 입구와 기둥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며 페르난데스를 겨누었다. 키르하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날카롭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은공, 어쩌죠?”

“진정해.”

페르난데스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지금 저항해 봤자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 모습에 가이메른은 경쾌하게 웃었다.

“당황하지 않음은 담대함인가, 초연함인가? 생에 미련이 없느냐, 아니면 여가 그대를 죽이지 않으리라 속단한 것이냐?”

“어차피 대왕께서 저를 참하시려 하신다면, 제가 저항함이 의미 있는 행동이겠습니까?”

“그대의 언사가 참으로 곱구나. 옳다. 거두라.”

-철컹!

가이메른이 손짓하자, 엘프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거두고 다시 꼿꼿하게 섰다. 가이메른은 날선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담대하고, 동시에 곧은 인간이로다. 참으로, 이런 종류의 필멸자는 보기 드문 바. 여는 그대를 지금 참하지 않으리라.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한 그대의 식견은 일부 진실에 맞닿은 바가 있었노라.”

가이메른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물리거라. 이 인간과 독대하겠다.”

“하, 하오나 폐하!”

대신들이 대경하자, 가이메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옥좌에 몸을 깊게 묻으며 오만하게 말했다.

“감히 이 인간의 능력으로, 여를 범하려 들 수 있겠느냐?”

“대왕이시여, 신이 한 말씀 올리나이다.”

“오, 딸아. 그래, 무엇이냐?”

“신이 앞서 봐온 바. 이 인간은 잊혀진 마법을 부릴 수 있다 사려되옵고, 동시에 저들 만신전에 받은 축복이 가볍지 않나이다. 대왕께선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레이아는 페르난데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별개로, 왕의 안위는 그 모든 사적 감정에 우선되어야 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싸우는 것을 지켜봤고, 또한 그에 대해 왕에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주 지들끼리 신났네.’

-엘프 왕이 귀엽게 구는 군.

‘그래. 부탁하기 전에 협박을 먼저 한다라.... 아주 전통적인 놈이야.’

엘프 왕은 아마도 인간으로써는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랜 시절 살아왔을 것이다. 그 세월에 얹힌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전략과 책략, 함정과 기책에 있어서 페이자쉬 또한 일가견이 있었다.

‘내 손에 골로 간 소위 영웅들만 해도 열일곱 명에 달했지.’

엘프 왕은 아마도, 페르난데스를 체스말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런 엘프 왕의 꼴이 도리어 우스웠다.

“그리하면 딸아. 그대에게 여의 곁을 허 하겠다.”

“황송하나이다.”

가이메른의 말과 함께, 대신과 병사들이 거리를 두고 천천히 물러나 알현실 밖으로 나섰다. 가이메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페르난데스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기나긴 장포가 그의 걸음을 따라 바닥을 쓸고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가이메른은 창 밖에서 내리쬐는 낮 바다의 햇살을 등지고 서서, 페르난데스를 내려보았다.

“베이타서스의 들개. 그대는 그리 불리는 족속이렸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바를 행하라.”

가이메른은 페르난데스의 눈 앞에 편지를 떨어트렸다. 페르난데스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받아 들었다.

*

1. 군왕의 다섯 장수 중 배신자가 있어, 릭터 반 프란츠리트와 내통 중입니다.

2. 인간 사교도와 프란츠리트가 인퍼머르 전복을 꾀하고 있습니다.

3. [룬레이븐]을 경계하십시오. 군왕이시여.

*

급하게 휘갈겨 쓴 탓인지,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여인의 필치로 쓰인 짧은 글귀엔 왕에 대한 근심이 가득했다.

이 편지가 전생에 엘프 왕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이, 인퍼머르의 몰락에 크게 일조했을 것이다.

‘뭐야, 결국 내 말이 맞았잖아.’

페르난데스는 엘프 왕의 자존심을 비웃으며 편지를 접었다. 결국 의미는 같았다. 엘프의 내분, 프란츠리트의 내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인간 사교도의 존재 뿐이었다.

‘그나저나 룬레이븐이 누구지?’

-이 근처 토착 지파인가보지. 그런 것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수많은 이단 종파들이 발호하고, 동시에 몰락하던 시기였다. 페르난데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정도라면, 전생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종파였을 것이다.

“하오나 대왕이시여. 저는 엘프의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바라는 바를 말하라."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을 올려보며 미소 지었다. 가이메른은 협박을 설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페르난데스는 설득을 협상으로 바꾸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거래는 흑마법사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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