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0화 (31/388)

30. 인퍼머르, 항해자의 도시 (2)

“전설에 이르기를, 대왕께선 일곱 바다의 모든 물길을 알며, 하여 물이 흐르는 모든 대륙의 풍문에 밝다 하였습니다. 사실입니까?”

“만신전과 만마전을 제외한다면, 적어도 바다에서 여보다 속세에 밝은 이는 드물다고 할 수 있지.”

가이메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먼 세상의 수평선이 궁금하더냐? 백사 대신 보석이 알알이 박힌 해변이 궁금하더냐?”

“단지 사람의 행방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호오, 그대가 찾으려는 이가 누구더냐?”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서 영성의 격을 이룬 이가. 그 중에, 격이 오를 전설을 자아내지 않고 이를 이룩한 이가. 즉, 나서부터 자라며 스스로 오롯하게 신위를 노리는 이가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흐음···.”

영성의 격은 살아가며 쌓이는 업적의 더께다. 자신의 힘으로 업적을 쌓아가며 소문을, 전설을, 신화를 이룩할 때 필멸자의 영성은 불멸자의 격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압도적인 격을 지닌 영혼을 찾아야 했다.

전생에 두각을 나타냈던 영웅과 악당들을 거의 대부분 기억하는 페르난데스만이 알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전생에 없던 영웅의 자질이 있을 것이다. 희박한 확률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 물질 세계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초월자에게 단 한 가지 부탁을 한다면 반드시 이것 이어야만 했다.

‘베이타서스의 네 딸들.’

-베이타서스의 네 계집들.

‘추락한 준신들···.’

준신임을 포기하고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들의 격은 여전히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

즉, 이 세상에 활동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 명성이 언젠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했다.

그가 제어할 수 있을 때. 즉 아직 그들이 충분히 성장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전에.

‘베이타서스는 그들을 ‘구원하라’라고 했어. 그렇다면 반드시 그들 모두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거다.’

신이 자아내는 말은 아무리 가벼운 언사라 하더라도 반드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신은 어떤 단어도 쉽게 내뱉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정할 때, 베이타서스의 네 딸들에게 닥치는 운명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구하려면, 빠를수록 쉽다.

“재미있는 조건이로다. 하지만 기이하구나. 여가 보기에, 그대는 찾으려는 이가 누군지 알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이리도 구체적인 조건을 상정하느냐?”

“반드시 대답이 필요한 질문입니까?”

“그렇지 않다. 이를 알아내는 것 또한 여의 여흥이 될 것이다. 그대는 오히려 침묵하라. 즐거운 여가가 되겠구나.”

가이메른은 팔짱을 끼며 페르난데스를 내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짙은 호기심이 담겼다. 그는 페르난데스라는 사람 자체가 궁금해졌다.

어떤 사고를 하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여는 그대에게 조력을 더하겠다. 여의 딸이 그대를 도우리라. 그대는 즐거이 이를 받들라.”

“어···. 그것도 반드시 필요한 겁니까?”

“여의 딸은 와일드프린스다. 필멸자들 가운데에 여의 딸보다 강한 자를 찾음은 지난할 것이다. 거부하는 이유가 있더냐?”

페르난데스와 가이메른의 시선이 맞닿았다.

[감시는 사절인데?]

[닥치고 받거라.]

이런 의미가 섞인 눈빛이 잠시 엉켰다. 페르난데스는 시선을 살짝 내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메른은 그제야 만족스레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현명한 판단이로다. 그대와 같은 필멸자를 만나 담화함이, 여에겐 못내 즐거운 시간이었다.”

“저 또한 영광이었습니다.”

“물러나거라. 여는 딸과의 묵은 이야기가 많다.”

“만수무강 하소서.”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일어났다. 움츠러들었던 키르하스는 거의 도망치듯 페르난데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알현실의 문이 닫힌 후에야, 키르하스는 크게 한숨 내어쉬며 말했다.

“은공! 미쳤어요!? 어떻게 저런 존재한테 그렇게 따박따박···.”

“?? 엘핀 서펜트 킹은 내 왕이 아닌데 뭐가 문제야. 받을 게 있으면 받아야지.”

“은공 참···. 겁이 없는 건지···. 저는 숨도 못 쉬었어요!”

“어···?”

페르난데스는 잠시 멈춰 서서 키르하스의 말을 곱씹었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움츠러들었다고? 대영웅 키르하스 하트테이커가? 아무리 아직 격이 쌓이지···.

‘아.’

그랬다. 페르난데스의 영혼은 여든일곱 먹은 대흑마법사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영혼이 본질 그대로 전생했다면, 초월자의 영성에도 위축되지 않을 터.

‘뜻 밖의 수확인데?’

초월자의 존재감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유용했다. 그런 존재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기초 조건이 같은 시선에 서는 것이었으니까.

*

알현실의 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진 이후까지. 레이아는 가이메른의 앞에 부복한 채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가이메른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레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딸아. 잊혀진 마법이란 대저 무엇이더냐?”

“멜리실두르의 여명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 베레일데의? 하지만 저 인간에게선 마법사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베레일데 학파의 일원이라면, 우리에게 감추는 것이 가능치 않다.”

“하지만 프란츠리트의 추격자들을 한 순간에 녹여낼 정도로 강력한 빛을 보았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아무리 온전치 못하다 하더라도, 우리 종족이 멜리실두르의 여명을 잘못 볼 리가 있겠나이까.”

“그렇긴 하다만···.”

가이메른은 상념에 빠졌다. 레이아는 하프 엘프였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하게 쓰이는 존재였다. 엘프의 검으로서 대륙의 저주에서 자유로우니까.

따라서 가이메른이 내륙에 자신의 수족을 파견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것은 언제나 레이아의 몫이었다. 레이아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가이메른은 그 판단을 믿었다.

“베레일데 학파의 후계자는 말레이른의 딸이다. 인간이 그 아이에게 배울 수 있을 리가 없거늘···. 기이한 일이로다.”

엘븐 트라이던트에서 가장 강성한 왕국 말레이른 왕조의 구중궁궐 안에 있는 이가 어떻게 내륙 문명 사회의 사제에게 마법을 전수해줄 수 있단 말인가?

가이메른은 점점 더 페르난데스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레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인간에게서 눈을 돌리지 마라. 모든 사건을 여에게 보고하거라. 저 인간은 참으로··· 독특하구나.”

그리고 위험하구나. 레이아는 가이메른이 입에 담지 않은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고작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어린 인간이 서펜트 킹을 독대하고, 거래할 수 있을 정도의 담대함과 강인함을 지녔다면.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엘프에 대한 위협이었다.

레이아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부디, 끝까지 적이 되진 마. 죽이기엔 아쉬우니까.’

*

페르난데스는 시종이 안내해준 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벌써 이가 빠지고 있는 장검을 닦았다.

“이거, 마르테리오 형제한테 죽겠는데?”

-고위 귀족 둘을 썰었는데 멀쩡하면 신검이지.

“이번엔 안 부숴 먹고 복귀했으면 좋겠네.”

-이미 글렀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페이자쉬를 바라보았다. 페이자쉬는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육체도 없는데 의자엔 왜 앉는 거지?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를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그나저나, 청동 왕좌는 더 이상 못 쓰겠네.”

-엘프는 흑마법 잔향을 혐오하니까. 쓰면 바로 발각되겠지.

“다른 학파 마법을 써보는 건 어떨까?”

-헤일로 때문에 그것도 추천하긴 어려운데···. 베레일데 마법을 썼을 때를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페르난데스는 침상 위에 정좌한 채로 장검을 무릎 위에 얹었다.

아직 예리함을 잃지 않은 장검의 서늘한 감촉을 즐기며,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창 밖으론 황혼이 들고 있었다. 항구의 황혼은 특별한 멋이 있었다. 끝 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저물어가며, 바다는 그 어느 순간보다 화려한 황금빛 반사판이 된 듯 너울졌다.

다시, 바다가 주홍색으로, 붉은 색으로, 자색으로 변해가고. 이윽고 서늘한 푸른 색을 되찾을 때 쯤에. 페르난데스는 마침내 장검을 납도하고 일어났다.

-끼이익.

바닷바람에 삭은 경첩이 작은 소음을 내며 밀렸다. 창문을 연 페르난데스는 짭짤하고 비릿한 항구의 바람을 맞았다. 항구의 밤은 서늘했다.

“바실라.”

“네, 은공.”

지붕 위에서, 키르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미소 지었다. 키르하스는 아직 여물지 않은 전사였지만, 그녀의 동물적인 감각과 천부적인 재능은 믿을 만 했다.

“사냥하러 가자.”

“네. 은공.”

-탓.

키르하스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뿐하게 뛰어 내렸다.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고 아크로바틱하게 몸을 뒤집으며 균형을 잡은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바람이 그녀의 긴, 검은 머리칼을 흩날렸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귓가를 한 번 쓰다듬고는, 그대로 뛰어 내렸다.

엘핀 서펜트 킹의 궁궐은 넓고, 깊고, 높다. 엘프 건설 기술의 총체이며, 동시에 바다 한 가운데에 정박해 있다는 것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다.

파도에 상하지 않고, 바람에 삭지 않고, 불에 타지 않는 거대한 섬과 같다.

모든 구역은 시가드와 와일드프린스들에 의해 엄중히 지켜지고 있으며, 엘프 마법사들의 결계가 촘촘하게 침입자들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 모든 방비는 적어도 디모니카이자, 마도학의 종주인 이단심문관과, 묘인족이자 불세출의 재능을 지닌 토치맨에겐 돌파할 만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들은 누구의 눈에도 발각되지 않으며 빠르게 배와 배 사이를 타고 넘어갔다. 항구의 그림자 안으로.

*

항구의 야시장 거리에서,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가 쥐여 준 꼬치 구이를 우물거렸다.

“음. 읍, 음.”

“천천히 먹어 천천히.”

“움, 넴. 넵.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어요···.”

키르하스는 여느 소녀들처럼 야시장의 풍경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다른 생각이 있긴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토치맨 교육을 받는 아인데. 페르난데스는 그런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실라, 흡혈귀라면 이 도시에 어떻게 숨어들 수 있을까?”

“···어···.”

“생각해봐. 엘프들은 감각이 예리해. 그럼 엘프 함대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겠지. 당연히 항구 지역에 숨었을 거야.”

“그렇···겠죠?”

“항구엔 온갖 악취들이 섞여 있으니, 피 냄새를 숨기기도 쉽고. 유동 인구가 많으니 실종자를 만들기도 쉽지.”

“네에···?”

키르하스는 아무래도 토치맨 교육 시간을 통째로 졸며 보낸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키르하스는 실전파니까···.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빈민가. 그리고 지하 수로. 이렇게 두 지역을 둘러 볼 거야. 이쪽이 가장 숨기 쉬우니까.”

“어어···.”

전생의 기억을 돌이켜 보자면, 흡혈귀가 도시에 숨어들 때 그 시작은 언제나 저 둘 중 하나였다.

귀족으로 분하고 들어오는 몇몇 담대하고 실력 있는 흡혈귀들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키르하스는 지하수로라는 말을 듣자마자 움찔 떨었다. 아무래도 지하수로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향로를 건넸다.

“흡혈귀를 발견하면 불을 피우고 날 생각하며 새를 날려. 마력이 필요 없는 성유물이니, 너도 쓸 수 있을 거야. 내가 지하수로 쪽으로 갈 테니, 네가 빈민가부터 살펴 봐.”

“네, 은공!”

숨어든 흡혈귀들이 몇이나 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순한 염탐꾼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본격적인 선봉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키르하스라면 살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야시장의 골목에서 키르하스를 앞세워 보내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장검을 소드벨트에 차고, 꼬치 구이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보니 영락 없는 묘인족 소녀 같았다.

-걱정 되나?

‘내가 키르하스를?’

홀로 악마 대공을 대적했다는 소문이 있는, 역전의 명장 키르하스 하트테이커를?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너무 정을 붙이진 마라. 페르난데스. 그녀는 도구야.

‘난 원래 도구에도 정을 붙이는 편이야.’

-···.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골목 구석으로 향했다.

걱정이야 어쨌건, 사냥의 시간이다. 밀사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지금쯤이면 프란츠리트 본성에서도 알아챘을 것이다.

초조해진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릴 지 가늠이 안 되었다.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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