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2화 (33/388)

32. 인퍼머르, 용이 잠든 도시 (2)

용, 드래곤, 아타일라틀. 각 문화권과 각 종족에게 있어서, 이제는 전승 기록으로만 찾아볼 수 있는 고대 종족이다.

고대 천상 전쟁 당시 몰락한 종족들 중 하나로, 천상 전쟁 당시에도 그 개체수가 백 마리가 채 되지 않았었다고 전해진다.

물질 세계가 처음 태동했을 때부터 이 세계에 군림했던 지배종이자 탄생과 동시에 불멸자의 격을 지닌 준신들.

“드래곤? 드래곤이 있다고?”

“네, 넵! 넵!! 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이 안에서 또 길이 나뉘나?”

“아닙니다! 기, 길은 한 방향입니다···?”

페르난데스는 헐떡이는 흡혈귀를 내려보며 고개를 꺾었다.

“그럼 너에게 이제 무슨 쓸모가 남았지?”

“보, 봉인! 이 문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제가 풀 수 있습니다. 사,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이걸···.”

확실히, 이 거대한 관문은 범상치 않은 마력을 품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문을 감싸고 있는 붉은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마력으로 짜여진 사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텔라인의 핏빛 사슬]이로군. 오랜만에 보는데?”

“?!!?! 어떻게?!”

-치지이이익.

페르난데스가 사슬을 살짝 건드리자, 사슬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페르난데스의 손가락을 지졌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손을 떼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주 정석적인 봉인이야. 책을 보고 그대로 따라 그렸나보군.”

“다, 당신···. 마법사였어?!”

무슨 마법사가 칼질로 뱀파이어를 도살해!?! 흡혈귀가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다.

“텔라인 학파의 전서는 나도 거의 외우고 있거든.”

“외, 외부로 유출된 적 없는 비전···.”

-콰직.

페르난데스의 칼이 흡혈귀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흡혈귀의 머리가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을 지으며 바닥을 굴렀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한 번 휘둘러 피를 털고는 웃었다.

“아직은 유출된 적 없지. 아직은.”

-철컥.

페르난데스는 칼을 납도하곤 봉인된 문 앞에 섰다.

텔라인의 핏빛 사슬은 쉽지 않은 마법이지만, 어쨌건 알고 있는 마법에 불과했다. 프란츠리트의 몰락 이후 그 비전을 어렵사리 구해 뜯어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실체화한 페이자쉬가 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드래곤이라···.

‘아마 유해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놀랍군. 인퍼머르에 드래곤의 유해가 있었던가?

‘그런 이야긴 들은 적 없어.’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드래곤의 유해가 발굴되었다면 전생에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가 기억하는 인퍼머르는 그저, ‘프란츠리트 혈족의 전초 항구’에 불과했다. 드래곤의 유해가 있거나, 그 유해를 활용해 무언가 저질렀다면 반드시 기록이 남았을 터.

‘놈들의 계획이 우리 개입 전에도 동일했다면, 드래곤의 유해는 가이메른 왕실과 상잔했다고 봐야 하지 않나?’

-가이메른 왕실이 드래곤 때문에 항구를 포기했다고?

‘그럴 가능성이 높지. 이제 그림이 대강 그려지는군.’

-치지지지직.

페르난데스는 봉인된 문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했다. 용의 유해라.

-치이이이익···.

페르난데스의 수인에 따라, 문에 얽힌 붉은 사슬이 한 조각씩 끊어져 갔다.

[비전 시야]는 마법의 분석에 특화된 유물. 아무리 정교한 봉인 장치라 하더라도, 답안지를 가지고 풀어내는 페르난데스를 막을 순 없었다.

-치직···.

봉인을 얽고 있던 마지막 사슬이 끊어졌다. 페르난데스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밀었다.

-후우우웅.

깊은 지하에서 탁한 마력이 섞인 바람이 솟구쳤다. 봉인이 외부에 마력이 유출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아마도 엘프들의 예민한 감각을 속이기 위해서 였겠지. 마력이 흩어지고 그의 눈 앞에, 어둠에 잠긴 계단이 나타났다.

‘용의 유해. 탐이 나는군.’

-용의 설골···. 갑상설하골 후상면부가 쓸모가 많지. 좋군.

페르난데스는 계단을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

키르하스는 골목에 숨어 있었다. 그녀가 몰래 미행한 ‘이상한 놈’이 처음엔 분명 한 명이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골목 저 골목 할 것 없이 바글거리고 있었던 탓이다.

‘어, 어···. 은공한테 연락해야 할까? 아직일까?’

아직 저 ‘이상한 놈들’. 그러니까 의심스러운 거적을 푹 눌러쓴 채로 번뜩이는 파란 단검을 쥐고 돌아다니는 놈들이 뭔가 특별히 이단적인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막상 페르난데스를 불러다가 난리를 쳐놓고, 놈들이 그냥 평범하게 배곯는 빈민이었다고 밝혀진다면 무슨 낯으로 그를 본단 말인가.

키르하스는 품 속의 향로를 꼭 쥔 채로 놈들을 노려보았다.

골목은 어두웠지만, 묘인족은 인간보다 뛰어난 야간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 어둠은 오히려 대낮보다 보기 쉬웠다.

“C’eaxi? Cohic, Oraion?”

놈들은 처음 듣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은공이었다면 무슨 뜻인지 알고 설명해주셨을 텐데, 키르하스는 귀를 축 늘어트리며 생각했다.

이단심문청의 서고에서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페르난데스의 지혜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헤레티카 형제님들에게 아무리 검술을 사사 받아도, 페르난데스가 ‘디모니카’인 이상 단순 전투력으로 그를 보좌하긴 쉽지 않다.

‘난 쓸모 없는 걸까.’

지난번 임무, ‘사슬 끊기’ 당시에도 그랬다. 얼마나 쓸모가 없었으면 모든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 자신을 다른 장소에 피신 시키고 홀로 적들을 소탕했단 말인가.

후에 보고서를 보니, 은공은 그 짧은 며칠 사이에 리치며, 늑대인간이며, 이단 종파의 수장까지 처리했었다.

“Oraion! Drako Un muck wit Vampirr!”

그때, ‘이상한 놈’이 크게 외쳤다. 키르하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골목 안쪽에서, 덩치 큰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는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근육이 꽉 들어찬 상체엔 푸른 문신이 온통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내는 빈민으로 보이는, 바싹 마른 남자의 목을 한 손에 쥔 채로 질질 끌고 나타났다.

‘뭘 하는 거지?’

“Vampirr? Huh! Crac un wit mact!”

-콰직!

사내는 대뜸 빈민의 목을 꺾었다. 빈민은 신음 한 번 지르지 못한 채로 절명했다.

사내가 빈민의 시체를 ‘이상한 놈들’에게 던지자, 놈들이 푸른 단검으로 빈민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곧, 빈민의 시체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이더니, 곧 검은 연기가 뭉글거리며 솟아 올랐다. 연기는 한 순간 까마귀의 형상을 띄며 허공에 흩어졌다.

‘이단!!! 은공!!! 제가 해냈어요!!!!’

페르난데스에게 보고해야 한다! 키르하스는 황급히 향로를 움켜쥐고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생각했다.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검은 머리칼, 단정한 콧대와 날카로운 눈매, 귀족적인 턱선과 지혜가 가득 담긴, 시니컬한 눈동자까지···.

“···?”

“Chock?”

그때, 허공에 흩어지던 까마귀의 눈이, 키르하스가 숨어 있던 곳을 향했다. 키르하스는 멍하니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놈이 미소를 짓는 것 같은···.

-삐이이이익!!!

“Deck!!!!”

“Deck hum Eld?!”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사교도들이 일제히 키르하스가 숨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고 소리를 질렀다.

근육 거한이 키르하스를 향해 손짓하자 불빛이 펑, 하고 터지며 그림자 속에서 키르하스가 드러났다.

“어, 아, 안녕하세요···? 조, 좋은 밤이네요!”

키르하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사교도들이 잠시 침묵하자, 키르하스는 천천히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그,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전 이만!”

“Xich!”

“CrrrA!!!”

“꺄아아아악!!!”

거한의 외침과 함께, 사교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골목을 빠져나가며 소리질렀다.

“은공!!! 변태들이 쫓아와요!!!”

*

‘음.’

페르난데스는 순간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계단은 끝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극히 제한된 탓에, 이 통로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었다. 함정의 흔적은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왜 그래, 함정은 없는데?

‘아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페르난데스는 목 뒤를 쓰다듬고는 다시 걸어 내려갔다. 대체 얼마나 파들어간거지? 천상 전쟁 말엽에 죽은 용의 유해라고 한다면 거의 이천 년은 족히 지난···.

‘오?’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반쯤 무너진 문 사이로, 통로가 끝나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뭄을 숙이며 문을 빠져나갔다. 벽에 새겨진 그림이 낯익었다.

‘상고 시대 유적이로군.’

-무덤이야. 용케도 이걸 발굴했군. 프란츠리트 놈들.

전쟁 중에 죽은 용의 유해라면 그 일부도 온전히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적까지 만들어가며 보존한 무덤이라면 유해의 상당부분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설형 문자로군. 대단히 가치 있는 유적인데?’

-학술적 가치를 따질 시간은 없어.

‘어리석기는. 마법사는 학자야. 이런 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야 정상이라고.’

-두근거릴 심장이 있었다면 그랬겠지.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말에 피식 웃었다.

유적지의 입구를 지나자, 지하를 향한 절벽이 나타났다. 유적지의 규모가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페르난데스는 절벽의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로 향하는 임시 계단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얽어 만든 계단은 차라리 사다리라고 부르는 편이 나아 보였다.

‘저거 끊어지면 난리 나겠는데?’

절벽은 중간중간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절벽을 타고 등반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즉, 저 계단이 끊어진다면 그대로 이 외딴 지하 유적 안에 고립될 것이다.

-후우우웅.

강대한 마력을 실은 바람이 절벽 아래에서 뿜어져 올라왔다. 지독한 흑마법의 냄새가 났다.

저 먼 아래에서 마법사들이 무언가 저지르고 있었다. 아마도 용의 유해는 절벽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참···.’

유사시에 누군가를 부르려 해도, 향로는 키르하스에게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고민했다.

오직 사교도와 흡혈귀만 알고 있는 정체 불명의 고대 유적지에 외부와 연락 수단 없이 홀로 들어간다라···.

-가이메른에게 보고하고 끝내자. 지원을 받아 오는 편이 현명해.

‘그렇게 한다면, 엘프 왕이 유해를 독식하겠지.’

-용의 유해는 우리 목적이 아니야. 페르난데스.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다.

'우리의 목적이 뭐지? 프란츠리트의 계획을 파악하고, 파훼하는 거야. 프란츠리트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서, 인퍼머르를 차지하고 가이메른 왕조를 내쫓았는지 알아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이메른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대체 무슨 수로 전생에 프란츠리트가 가이메른을 무찌르고 동북부 해상의 재해권을 차지했는 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프란츠리트의 해상 전력은 별볼일 없는 수준이다. 물론 서펜츠아일스의 대귀족으로 군림하며 일군 해군이 있기야 하겠지만, 고작 그 정도로 엘프 함대를 상대할 순 없었다.

이단을 박멸해야 한다. 그리고 흡혈귀 또한 문명 사회의 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엘프가 인류의 아군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인류 문명과 선신 만신전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다면, 흡혈귀와 이단, 그리고 엘프를 동시에 배제하고 동북부 해안선을 문명 세계의 권역으로 삼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 중 가장 아까운 것은 시간이야. 페이자쉬. 용의 유해를 이용한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어.’

-···그렇긴 하지.

고민은 거기서 끝이었다. 모든 계획엔 변수가 존재했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모든 변수를 오히려 이용해야 했다.

종말을 향한 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며, 그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한정적이다.

-끼이익.

페르난데스의 체중이 실리자, 나무 계단이 비명을 내질렀다. 발만 살짝 굴러도 부러지겠군.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

“아직까지 안에 있다고? 확실해?”

“네, 그 인간들은 저녁도 먹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루에 두 끼니 이상을 먹는 종족인데? 이상한데···.”

레이아는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을 알현할 당시, 페르난데스는 당장이라도 흡혈귀를 도륙내고 오겠다는 듯 오만하게 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방 안에 머물러 있다고?

-똑똑.

“들어가도 될까?”

방 안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레이아는 이단심문관처럼 몇몇 특수한 기술을 익힌 자들이 엘프의 감각을 속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냥 열게. 싫으면 지금 말하고.”

-끼이익.

레이아는 문틈 사이로 텅 빈 방을 보자마자, 페르난데스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커튼이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나부꼈다.

“이, 버릇 없는 인간들!”

그녀는 분통을 터트리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짐은 그대로 있으니, 아예 떠난 것은 아닐 것이고, 무장이 없으니 밖으로 나선 것은 맞는데···.

‘아직 자리가 따듯해.’

미약하긴 하지만, 침상 위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레이아는 재빨리 창틀을 밟고 올라서며 외쳤다.

“오늘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네, 네!”

-탓!

그녀는 창 밖으로 뛰어 나가며 항구를 노려 보았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한담. 한심한 노릇이다. 왕이 직접 감시하라고 명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대상을 놓치다니!

‘눈치 빠른 인간이야. 정말.’

그러니, 생각해보자. 인간이라면 어디서부터 추적을 시작할까. 자신의 감시 밖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던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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