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4화 (35/388)

34. 인퍼머르, 용이 깨어나는 도시 (1)

*

-쿠르르릉···.

진동은, 처음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엘프들 중에서도 극도로 예민한 몇몇 만이, 바다가 찰랑이는 것을 느꼈다.

-쿠르르릉···.

이윽고 들려온 진동은 조금 더 크게, 해안선을 흔들었다. 이제 엘프들은 모두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진동 자체보다, 진동이 품고 있는 본능적인 혐오감과 공포가 엘프들을 덮쳤다.

-쿠르르르릉···!

그 이후, 이젠 엘프의 선박들이 요동치며 부딪치는 혼란이 인퍼머르를 덮쳤다.

인퍼머르의 항구에 배들을 이어 놓은 목책들은 급격한 해수면의 상승에 일제히 끊어지고, 선적한 화물들이 나뒹굴었다.

“이게···무슨···??”

왕의 기함으로 달리던 레이아는 귀를 쫑긋 세우며 발길을 멈췄다. 대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저 먼 지하에서 끊임없이, 지독한 압박감과 존재감이 느껴졌다.

레이아는 대륙에 익숙한 몇 안되는 엘프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땅을 짚었다. 그녀의 망막 너머로, 새파란 귀화가 보였다.

“헉!”

레이아는 눈을 크게 치켜 뜨며 뛰어 올랐다. 그녀가 바라본 것은 본능과 공포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와일드프린스에게 그러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는 존재가, 저 지하에 있었다.

“이건···이 느낌은···?”

레이아의 귀가 솟아 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 보았다. 압박감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인퍼머르의 내륙 부분에 속한 건물들이 거센 지진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콰지지직!

-우드득···.

-쿠르르르릉···.

“끼야아아아악!!”

“이게 뭐야!!!”

“지, 지진이다! 지진이야!!”

항구 도시는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인간들은 저마다 집 밖으로 뛰어 나와 머리를 감싸며 골목을 내달렸다. 그들은 지진에서 보다 안전한 공터를 찾아 뛰어 다녔다.

레이아는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대부분의 엘프들은 느끼고 있었다.

감각이 둔한 인간들과 달리, 엘프들은 보다 영적인 존재, 그리고 마력에 민감했다.

설령 마지막 전설이 이천 년 전이었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엘프들이 더 이상 몇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종족의 혈액에 남아 있는 본능이. 지금 다가오는 존재의 정체를 규명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온다···.”

*

-콰지지직!!

“우현!! 상황 보고!!”

“장군!! 피항해야 합니다! 피해가 막심합니다!”

“그럴 순 없다! 아직 물자 이송이 끝나지 않았어!”

아이나드는 거칠게 외치며 배 위를 누비고 있었다. 그의 기함은 복잡하게 얽힌 엘프 군함들에 얽혀 꼼짝 할 수 없었다.

엘프들의 도시는 배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인퍼머르는 그 절반을 내륙에 두고 있었다.

도시의 구획이 아무리 정밀하게 나뉘어 있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모든 엘프 선박을 항구 밖으로 빼낼 순 없었다.

순차적으로, 원양에 가까운 선박들은 피항 작업을 속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항구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지진파가 한 번씩 들이닥칠 때 마다 뒤얽힌 군함이 서로에게 충격을 주며 부서지고 있었다.

침수가 잇따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좌초된 함선이 없다는 것은, 엘프 조선 기술의 일면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일데른 장군은? 가장 먼 바다에 있지 않나! 아일데른 함대는 피항을 마쳤는가?”

“파발!! 파발!! 보고하라!”

“파발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뭐??”

첫 지진과 동시에, 아이나드는 각 함대에 파발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한 엘프였다.

그러나 아일데른 장군에게 보낸 파발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미 도착했어야 했음에도 소식이 없었다.

“···배신···?”

그 순간, 아이나드의 머릿속에 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다섯 장군 중에 배신자가 있어, 프란츠리트 혈족의 가주와 내통을 하고 있다 하옵니다.”

*

“···허···.”

지금 배신한다면, 과연 불의의 기습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나드는 장군들의 배신을 견제하기 위해 가이메른의 기함과 가장 가까운 곳에 호위를 자처했었다.

그리고 가장 의심스러웠던, 노회한 대장군 아일데른을 가장 먼 바다에 배치했었다.

그리하여 아일데른이 설령 외부와 접촉해 배신한다 하더라도, 항구를 중심으로 포격전이 일어난다면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진을 이용하다니? 아이나드의 오랜 전쟁 경험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폐하의 기함은 고작 지진에 쇠하지 않는다.”

“···네?”

아이나드는 멈춰 서서, 가이메른의 기함을 바라보았다. 모든 선박보다 거의 두 배는 더 높은 선고를 지닌 거대한 배였다. 아니, 차라리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성이라고 보아야 맞았다.

실제로 그 배의 기능 또한 성과 같았다. 영원왕 가이메른이 지배하는 고고한 바다의 요새. 아이나드는 생각에 빠졌다.

‘폐하의 기함을 공격할 수단은 단 셋 뿐이다. 직접 도함하는 것이 아니라면···.’

고대 드워프의 화염, 용의 숨결, 그리고 대악마의 저주···. 아이나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뒷통수를 노려보는 푸른 귀화가 여실히 느껴졌다.

처음엔 망상이나, 있을 수 없는 공포로 인한 환상이라 여겼다. 공포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이젠, 점점 더 놈의 기척이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다른 엘프들은 모를 지라도, 가이메른의 오른팔이자 유일한 적자인 아이나드는 알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직접 살아온 그는, 이 인퍼머르의 깊은 지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가이메른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가 인퍼머르를 다스리는 이유는, 자신에게 유일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영토 안에서 감시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엘프들은 대륙을 밟을 수 없으니까.

인퍼머르의 지하엔, 죽은 용의 유해가 있었다.

과연, 가이메른은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었을까. 프란츠리트의 밀사가 가져온 편지를 본 순간, 가이메른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위협이 될 것이 뻔한 요소들을, 어째서 고작 인간 이단심문관에게 맡긴 거지?

아버지. 어째서?

“장군! 장구우운!!! 아이나드 장군님!!!”

“···보고하라.”

상념은 끝이었다. 아이나드는 피로와 혼란이 얽힌 눈으로 장루 위에 서서 소리 지르는 그의 부관을 바라보았다.

부관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일데른 장군의 함대가 항구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돌파는?”

“지진으로 진영이 허물어졌습니다! 지진이 멎어야 군세가 설 수 있습니다!”

“그건 아일데른 또한 마찬가지다.”

적어도 바다 위에서라면, 아일데른 함대는 결코 이로운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항구의 봉쇄가 고작이었고, 그들이 공격 태세를 잡을 수 있게 된다면, 그건 곧 아이나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엘프 군함은 고작 해일과 지진 따위에 좌초되지 않는다. 그는 배의 견고함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인퍼머르 내륙 안에서 다가오는 존재에게도 대적할 수 있기를.

“···용이 온다.”

“네??”

“전 함대, 화포를 내륙으로! 피항을 멈춰라! 전투를 준비하라!!”

“저, 전투 준비!!!!”

아이나드는 자세를 잡고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곧 황급히 그의 군대는 전투 태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으아아아악!!!”

“화, 화포를 잡아! 떨어진다!!!”

아이나드는 선미로 뛰어 나가며 외쳤다.

“왕의 기함을 호위하라!!! 용이 온다! 용이 오고 있다!!!”

“어, 어딜 가십니까, 장군!!”

“폐하를 지키러!! 제군들! 항구에서 눈을 떼지 말아라!”

용이 오고 있다. 가이메른은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겠지. 어쩌면, 아일데른 장군의 배신도 알 고 있을 수도 있다.

아이나드는 가이메른의 기함이 천천히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왕은 분명, 용의 부활을 묵인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시체에서, 무엇을 얻을 생각이셨습니까. 아버지.

*

-위이이잉. 위이이잉.

시끄러운 소음이 페르난데스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실존하는 소음이 아니다. 이건 영적인 경고음에 가까웠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복잡한 수인을 얽고, 풀고, 다시 맺고 있었다.

[침출], [강하], [결속], [봉쇄], [압박]. 다섯 가지 수인이 거의 동시에 허공을 짚는다.

그러나, 뛰어난 마학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들었을 이 강대한 소환 술식은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았다.

-포기해. 어차피 이제 마법진의 시동은 멈출 수 없다.

‘지금 포기한다면? 살아 남을 수 있나?’

-물론! 설령 용이 부활한다 하더라도, 우리 몸에 있는 축복은 불사야. 페르난데스. 한 번 죽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

‘익숙해져선 안된다.’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깨물며 연신 손을 얽었다. 한번 수인을 짚을 때 마다, 몸과 영혼에 걸리는 부하가 심상치 않았다. 공동을 가득 채운 밀도 높은 지옥 마력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그 다음은? 죽음에 익숙해지고, 부활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 그때가 우리의 정신이 진정으로 죽는 순간이야. 선신 만신전의 노예로써, 영혼을 저당 잡히겠지.’

-단 한 번으로 그렇게 될 리가 없어.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가이메른과 키르하스. 그리고 인퍼머르는 장담할 수 없지.’

-지옥 마력에 타락하면 본말 전도야. 그들은 도구지, 네가 희생하며 지켜야 할 존재들이 아니다.

페이자쉬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게 육신이 있었다면, 당장 페르난데스의 헛짓거리를 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계획에 따르면, 우리 자신 또한 도구에 불과해.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자체가 아니다. 이 세계의 구원과 우리 아들의 영혼이야.’

-지옥 마력에 오염된다면, 네가 지금 그렇게 아끼는 아들도 더 이상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어.

지옥 마력의 오염은 정신의 구조를 뒤틀고, 인격을 타락시킨다. 그러한 마력이 페르난데스의 영혼을 거세게 옥죄고 있었다.

[탈속]. [폐쇄], [베일]. 페르난데스의 손이 거기까지 수인을 짚고, 잠시 허공에 멈췄다.

[지배]? 지배의 술식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물 속에서 사탕이 녹듯이, 마력의 급류 안에서 회로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포기한다면 전생과 다를 게 없이 흘러가겠지. 용이 부활하고, 가이메른과 상잔하고, 인퍼머르는 프란츠리트의 손아귀에 떨어질 거야. 그럼? 동북부 평야와 항구 도시들 대부분이 흡혈귀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우리의 계획이 십년은 퇴보한다.’

-제기랄. 페르난데스!! 왜 모르는 거냐. 우리의 계획은, 우리가 멀쩡할 거라 가정한 뒤 진행하는 거야!

페르난데스의 눈이 뜨였다. 붉은 마력들이 온 사방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마력 회로는 지옥 마력의 격류에 휘말리며 천천히 타오르고 있었다. 점차 그가 숨을 쉴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고 있었다.

‘페이자쉬. 넌 육체가 없어.’

-제기랄. 제기랄! 그래서 뭐!

‘그래서 모르는 거야.’

-뭘!

‘이 육신으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페르난데스가 허공을 움켜 쥐며 수인을 쥐었다. [해방]. 그가 얽은 마력이 지옥 마력의 격류 안에서, 타들어가는 [지배의 술식]을 건드렸다. 유리조각처럼 술식이 깨졌다. 그리고 동시에-

-화르르륵.

그의 정면에 놓인 드래곤의 두개골 안에서, 그 내부의 깊은 곳에서 푸른 귀화가 불타 올랐다.

-쿠르르르릉!

대지를 찢어 발길 듯 뒤흔들던 지진이 그 순간 정점에 도달했다. 공동에 휘몰아치던 마력이 마치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용의 두개골 안으로 스며 들었다.

-쿠르르릉!!!

지배의 술식을 직접 끊었다. 그리고 그 실낱 같은 매듭을, 페르난데스는 고삐를 쥐듯 손으로 움켜 쥐었다. 이 매듭이, 용의 영육을 얽매고 있는 유일한 가닥이었다.

-너 몸이···?

페르난데스가 자신을 보호하던 수단을 모두 내려 놓고, 지옥 마력 안에 직접 손을 뻗어 지배의 술식을 움켜쥘 때, 그의 육신을 타고 지독한 타락의 마력이 흘러 들어갔었다.

그의 하얀 피부에 혈관들이 검게 도드라졌다. 팔뚝을 중심으로 혈관이 피부를 불태우며 검은 화상 자국을 새겨 넣고 있었다. 마치 문신처럼, 그의 팔은 순식간에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뒤덮였다.

페르난데스는 붉게 물든 눈을 크게 치켜뜨며 용의 두개골을 노려보았다.

-타락이···?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거대한 마력을 지니고, 모든 흑마법에 정통했던 대종사.

그런 그 조차도 지옥 마력의 타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진데, 하물며 열여섯 여린 몸으로 견딜 수 있을 리가 없거늘....

-화르르륵!

그의 팔뚝을 타고 내달리던 마력이, 새파란 불꽃과 함께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가슴에서 찬란한 빛이 스며 나왔다. 성흔. 두 번째 성흔이다!

*

[내가 네게 임하였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너는 나와 만신전의 대리인이 되었노라. 너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협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으리라. 이것이 내가 네게 부여하는 나의 두 번째 권능이다.]

*

-불굴!!

‘맞아. 불굴의 축복. 내 생각에, 불사보다 강력한 축복이야.’

페르난데스는 충혈된 눈으로 드래곤의 두개골을 노려보았다. 심장이 박동 하듯이, 두개골 내부에 자리 잡은 푸른 불꽃이 두근거렸다.

‘용이 부활했어.’

-쿠르르릉!!!

용의 두개골 안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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