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인퍼머르, 용이 깨어나는 도시 (2)
*
아이나드의 얼굴은 혼란과 공포, 그리고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엘프 왕실 법규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아이나드는 거의 내달리시피 왕궁을 주파하고 있었다.
“자, 장군! 궁중에서 무장은···.”
“폐하는 어디에 계시나!”
“폐, 폐하께오선 지금 성소에···.”
“비켜라!”
아이나드는 왕실 씨가드의 어깨를 거칠게 밀며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가이메른의 왕궁은 깊고, 넓었다. 왕의 성소는 왕궁의 심처에 있었고, 무장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씨가드들은 분노한 왕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 또한 지금 이 대기를 뒤덮고 있는 압박감과,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느끼고 있었다.
“왕자 저하. 이 앞은 그 누구도 들일 수 없습니다.”
“···멜라디아 경. 비키시오.”
“급보라면 폐하께 전달하겠습니다. 송구하오나, 저하께오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왕실 성소는 폐하와 폐하의 인가를 받은 이들을 제외한다면 설령 왕자 저하라 할지라도 들일 수 없습니다.”
“감히, 내게 명령을 한단 말인가?”
“왕명이옵니다. 따르시지요.”
“감히!!”
아이나드의 머리칼이 올올이 곤두섰다. 전사의 극에 도달한 이들은, 몸에 마력을 품게 된다.
잔잔한 바다와 같이, 언제나 정돈되어 있던 그의 마력이 한 순간 격노로 용솟음치며 대기를 찢어 발겼다.
그러나 멜라디아 또한 그 못지 않은 강자. 왕의 수신호위이자 처형인. 단 한 사람의 엘프로 따지자면, 그녀보다 강한 엘프는 가이메른 씨족엔 존재하지 않는다.
멜라디아는 위협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고 몸을 도사렸다. 아이나드는 멜라디아의 모습에 격분하며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두 검사의 자세가 정렬되었다.
감정과 별개로, 그들은 정점에 도달한 전사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그들의 시선이 서로의 간합을 잡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고정하시지요. 왕손을 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옵니까.”
“무례하고, 참람하도다! 내 사사로이는 일국의 왕자이며, 달리 보더라도 함대의 원수로다! 감히 너, 집 지키는 개 따위가 날 막으려 든단 말이냐?”
“네, 번견에겐 번견 나름의 법과 도리가 있사옵니다. 저 주인에게 이를 드러낸다면, 이를 막아내는 것이 번견의 법도가 아니겠사옵니까?”
“감히 왕실의 혈육을 겁박한단 말이냐!!”
아이나드와 멜라디아는 설전을 벌이면서도 섣불리 칼을 뽑지 않았다. 엘프 검술의 기본은 한 합의 승부에 있다.
후발선제(後發先制). 그들 정도의 경지에 있는 엘프 검사들은 적의 검술을 눈으로 보고, 그 틈을 노릴 수 있었다.
서로의 실력이 동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간합의 싸움은 먼저 치고 나가는 쪽에서 반 수 이상 밀리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세를 잡은 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때, 성소의 문이 열리고, 제의를 갖춰 입은 시비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폐하께오서, 왕자 저하를 들라 하십니다.”
“···좋다. 멜라디아. 이 일은 후에 내 반드시 따져 묻겠다.”
“그리 하옵소서.”
멜라디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칼을 놓고 물러섰다. 아이나드는 이를 빠득, 갈며 성소 안으로 들어섰다.
*
-쿠르르릉···.
멀리에서, 거대한 진동이 들이닥쳤다. 항만의 모든 배들은 서로 부딪치며 부서져 가고 있었지만, 가이메른의 기함은 거대한 파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어떠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함의 내부는 마치 외부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듯 평온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건물과 가구 등의 손실 없이 평화로웠다.
하물며 그 비처 안에 위치한 성소는, 오히려 따사로울 지경이었다. 가이메른 왕은 성소의 한 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다가오는 아이나드를 내려보고 있었다.
가이메른의 앞에 놓인 새하얀 테이블에, 다기를 준비한 시비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아이나드의 앞에서 물러섰다. 가이메른은 나른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와서 들거라. 아들아. 성소엔 처음 오더냐?”
“···그렇습니다.”
성소의 천장엔 태양을 모사한 빛이 내리 쪼이고 있었다. 성소는 푸르른 초원에 덮여 있었다. 아이나드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흙바닥을 밟았다.
‘아···.’
대륙의 감촉이 이러할까. 아이나드는 잠시 전율했다. 순혈 엘프는 결코 대륙을 밟고 설 수 없었고, 아이나드는 엘프들이 바다 위로 쫓겨난 이후 태어났었다. 그에게 흙의 감촉은 낯설기만 했다.
“그래, 대륙은 이렇지. 이보다 단단한 곳도 있고, 이보다 포근한 곳도 있다. 아쉽지 않으냐? 엘프들이 저 드넓은 땅을 포기한 채로, 흔들리는 나무 관에 매달려 하루하루 소비하는 나날이?”
가이메른은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웃었다. 아이나드는 곧 정신을 차리며 가이메른의 앞에 섰다. 아이나드는 가이메른을 내려보았다.
“폐하. 용이 깨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노라.”
“···아일데른 장군은 프란츠리트와 손을 잡고 엘프를 배신했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이었든, 용인할 수 없는 대역입니다.”
“대가는 간단했다. 흡혈귀의 권속이 되어 내륙에 진출하고 싶다는 욕망이었겠지.”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이 밀서를 누가 보냈다고 생각했느냐?”
가이메른은 닭의 피로 적힌 프란츠리트의 밀서를 꺼내 들었다. 아이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제법 의미 있는 실험이었노라. 여가 가장 신뢰하는 여인을 프란츠리트의 박쥐들에게 던져 주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했노라. 이올란데는 내륙에서 살아가고 있지.”
“···어머니를···. 흡혈귀에게··· 넘겨 주었단··· 말입니까?”
아이나드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외쳤다.
“대체, 대체 무엇 때문에?”
“네 어미이면 아니될 이유가 있더냐? 네 어미가 아닌, 비루한 하급 노동자의 혈육이었다면 괜찮단 말이냐? 여의 관점에서, 네 어미와 그 외의 다른 엘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 여는 왕이며, 왕은 백성을 편애하지 아니하노라.”
더군다나, 이올란데는 믿을 수 있기까지 하지. 가이메른은 웃으며 아이나드를 바라보았다. 아이나드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왕은, 사람을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엘프를 ‘종족’으로 대하고 있었다. 마치 개미처럼.... 개미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처럼.
“이 사실은 적어도 아일데른, 그 아이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직접 이올란데를 프란츠리트에게 데려 갔으니. 그때였겠구나. 그 아이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된 것이.”
“···함대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아일데른 장군은 항구를 봉쇄했고, 내륙에선 드래곤의 부활이 임박해 있습니다. 왕이시여. 대피해야 합니다. 내륙은 위험합니다.”
“내륙을 포기하고 싶더냐?”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 백성들을 사지로 몰고 갈 순 없습니다!”
아이나드는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엘프는 땅을 밟지 못한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 비루한 항구에 발이 묶여 용의 먹잇감으로 그들의 소중한 백성들을 내어 주어야 한단 말인가?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 종족이 땅을 밟지 못하는 지 아느냐?”
“···만신전의 전당에서, 우리의 신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엘프 전설에 따르면, 천상 전쟁이 끝날 무렵에 엘프의 신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고, 가호를 잃은 엘프들은 대륙의 패권을 잃고 선신 만신전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다.
인간들의 전설에 이르기를, ‘오만의 대가’. 대륙의 패자였을 시절 그들이 가졌던 오만함의 대가라고.
억울하고 비통했다. 오만함이란 대가가 종족 전체에게 영겁토록 이어지는 천형이 될 사유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신을 죽였다.”
“···그 무슨···?”
“말 그대로. 천상 전쟁 시절, 우리는 우리의 신을 죽인 후에 우리 모두가 신격을 나누어 가지고자 했다. 신의 영성을 종족 전체에 나누어 가지고,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자고. 그렇게 결의한 세 엘프가 있었다.”
가이메른의 눈에 고통이 서렸다.
“뛰어난, 종족의 모든 가능성과 힘, 그리고 축복을 한 몸에 몰아 받은 듯한 세 젊은 엘프 영웅들이었지. 육대평원의 가이메른,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구만장천의 제르올렌. 이 세 영웅들은 마침내 엘프 만신전의 전당으로 향하는 물질 세계의 입구를 뚫고, 엘프 신들을 참살했다.”
고대 천상 전쟁의 마지막이었다. 엘프는 쫓겨나고, 드워프는 사라지고, 드래곤은 묻혔으며, 악마들은 지옥에 봉인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다.
세 엘프 영웅들은 엘프 만신전을 무너트리고, 그 신성을 강탈했다. 그러나 엘프들의 신은 찢겨 사라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직접 저주를 내렸다.
[너희는 다시는 역사를 딛지 못함을 알라.]
그 날 이후, 엘프들은 천천히 쇠락해갔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역사를 자아낼 수 없었다. 나라 없이 영원히 방랑하는 몰락한 종족. 그것이 지금 엘프들의 위치였다.
세 영웅은 서로를 탓하며 떠나갔다. 서쪽으로, 동쪽으로, 남쪽으로. 세 바다의 지배자가 되어, 영원히 동족들을 속이며.
그리하여 엘프 트라이던트. 세 명의 서펜트 킹.
[나쁜 것은 사라진 우리의 신이다.]
그들 스스로도 그리 믿게 될 때 까지.
가이메른의 말이 끝났을 때, 아이나드는 비틀거리며 주저 앉았다. 그는 불타오르는 눈으로 가이메른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우리 모두에게 파멸을 가져왔어!”
“너는 영민하다. 여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구나. 아들아. 네 도움 덕에 최악의 상황은 막아내었다. 만일 드래곤이 부활한 상태에서 아일데른의 기습을 대비하지 못했다면 여 또한 다소 위험에 처할 뻔 했구나.”
가이메른은 손끝으로 밀사의 편지를 만지며 웃었다. 그 ‘인간 이단심문관’이 제법 큰 일을 해주었다.
이 밀사가 끝내 가이메른의 손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그가 드래곤에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기습을 당할 뻔 했다.
가이메른은 부드러운 눈으로 아이나드를 내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묻지. 가이메른 왕. 어찌하여 용이 필요 했나?”
“이 나무를 보아라.”
가이메른은 성소의 초원 한 가운데에 곧게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를 가리켰다. 아이나드의 퀭한 눈이 가이메른의 손길을 따라 나무에 닿았다.
“세계수의 마지막 가지에서 살아난 나무다. 또한 저 빛을 보아라. 무엇이 느껴지느냐?”
“···아무것도.”
“하하. 바로 그것이다.”
가이메른의 눈이 가학적인 즐거움을 담으며 휘어졌다. 성소의 천장에 매달린 저 빛. 저 빛이야 말로-
“우리의 ‘신’이다. 아들아. 내가 직접 죽였던 우리의 신. 그 존재의 몰락한 모습이다. 어찌하여 선신 만신전이 속세의 신앙을 수확하려 드는지 아느냐? 신앙을 잃은 신은 영성의 격을 잃고 추락한다. 바로 저렇게! 아무런 이성도 지혜도 남지 않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그저!”
“당신은, 당신은 미쳤어!”
아이나드는 발작적으로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혼란과 공포, 슬픔으로 뒤얽혀 있었으나, 그의 자세는 언제나와 같이 날렵하고 깔끔한 공세의 형태를 띄었다.
가이메른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어찌하여 용이 필요했느냐? 용의 영혼은 신성을 지니고 있고, 용의 육신은 신성을 담을 수 있도다! 아들아. 아들아! 우리는 우리의 신을 부활시킬 수 있다!”
“그 미친 계획에 우리 백성이 얼마나 죽어날지 아느냐!!”
“1,732명. 또한 여는 얼마나 살아남을지도 알고 있지.”
“···뭐?”
아이나드는 가이메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이메른의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공허했다.
“천상 전쟁 때 잘 무장한 병사가 한 마리의 용을 죽이는 데에 희생된 병력이다. 1,732명. 여는 그 당시 희생된 모든 엘프들의 이름을 기억하노라. 지금 시대에 엘프들은 그 절반만큼 나약해졌지. 하여 3,464명. 넉넉하게 3,500명의 정병들을 희생한다면 용을 저지할 수 있다. 그리하면? 남은 만 명의 백성들은 내륙에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이다.”
가이메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뒤를 돌아, 찬란하게 빛나는 천장의 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여 다시 우리의 신이 우리의 곁으로 돌아 온다면. 아무런 기억도 가지지 못한 저 비루한 신을 마침내 우리의 시종으로 삼고, 우리의 저주를 해주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다시 내륙을 밟고 호령하리라! 죽음? 아니, 아니다. 이 모든 일은 희생이었음에. 여는 그 영웅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겠노라.”
가이메른은 미친듯이 웃으며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한, 슬픔, 광기, 사랑, 애착. 그가 가진 모든 감정의 편린이 휘황찬란하게 흩어졌다. 아이나드는 그 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콰득.
“커···흑?”
“당신은 미쳤어. 당신의 손에 우리 백성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가이메른.”
가이메른의 가슴에, 아이나드의 검이 파고 들었다. 검은 정확히 가이메른의 심장을 관통하고 뚫고 나왔다.
가이메른은 영생자였지만, 불멸자는 아니었다. 피륙의 상처에 의해 얼마든지 소멸할 수 있는 엘프였다.
-콰드득.
“컥···.”
“엘프는 자신의 자식을 희생 제물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영육을 타인의 저울에 올리지 않아. 가이메른.”
-콰직.
아이나드는 검을 한 번 비틀고, 뽑았다. 붉은 선혈이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나드는 칼을 한 번 털고 납도했다.
가이메른은 천천히 허물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초원이 왕의 피를 머금고 붉게 물들었다.
“어리석구나···. 아직 때가 아님에···.”
“엘프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가이메른 왕. 엘프는 희생하지 않아. 네 오만함과 욕망이 만들어낸 저주를, 나의 대에서 반드시 끊어 내겠다. 나의 방식으로.”
가이메른은 바닥에 누워 헐떡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아직 때가 아니긴 하지만···. 훌륭하게 자라났구나.
“고맙구나.”
“뭐?”
“잘 자라 주었다. 아들아. 잘 자라 주었어.”
-우드득.
왕의 육체가 기이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아이나드는 황급히 물러서며 그 끔찍한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엄청난 압박감이 그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용처럼, 아니. 마치 신처럼.
[세 영웅은 엘프 만신전의 신성을 나누어 가졌다.]
[엘프 왕은 영생자였으나, 불멸자는 아니었다.]
[엘프 왕조에겐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왕위 계승도 없었다.]
[그러나 왕실 혈육은 아이나드가 유일했다.]
아이나드의 머릿속에 정보들이 휘몰아쳤다. 대체 어떻게? 왜? 왜 내겐 형제가 없지?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이메른 왕은 단 한 사람의 자식도 낳지 않았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수천 년간 왕위를 유지하는 방법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콰직!
뒤틀린 가이메른의 얼굴이, 순식간에 아이나드의 몸 속을 파고 들었다.
*
-쿠르르릉···.
“아직 불안정하군.”
아이나드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가에 머금었다. 잔을 내려 놓으며,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왕실의 가장 깊은 곳. 성소의 비처에 있더라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용이 나타났다. 용이 돌아왔다. 드래곤이 도래했다.
인퍼머르가 불타오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용의 공포에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로 머리를 감싸 쥐고 헐떡이고 있었다.
용은 그들을 무시한 채로 바다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거체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용의 입에선 끊임 없이 불길이 흘러 내렸다.
파괴의 화신이자 세상의 포식자. 태초의 지배자. 드래곤, 용, 아타일라틀. 사랑스러운 우리의 성배여.
“어서 여에게 오라. 여는 이천 년을 기다렸노라. 드래곤이여.”
아이나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가이메른 왕을 닮아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