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인퍼머르, 용이 깨어나는 도시 (3)
*
-두근, 두근, 두근···.
용의 두개골 안에서 일어난 귀화는 천천히, 그러나 강인한 박동을 이어갔다. 페르난데스는 제어의 술식을 꽉 틀어쥔 채로 두개골을 노려보고 있었다.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의한 압박감이 페르난데스를 휘감았다.
그러나, 불가해? 페르난데스는 다섯 대악마 중 하나를 직접 소환했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 그는 선신 만신전의 투사들을 하나 하나 꺾으며 자신의 삶을 증명해왔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언제나 생존을 위해 타인의 목젖에 단검을 쑤셔 박았던 대흑마법사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일이었다.
[너는 다인 왕의 후계자더냐?]
“···?”
돌연, 두개골 안쪽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수천 년을 관통한 세월의 흐름에 그것의 영혼은 깎이고 쇠락해 있었다.
천천히, 두개골을 중심으로 그것의 몸에 살과 비늘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수육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마력이 그것에게 가장 익숙한 형상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인 왕과 흡사한 냄새가 난다. 너는 다인 왕의 자식이냐? 아니면, 아들이냐? 다인. 그 놈의 최후는 어떠했느냐.]
-후우웅.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로, 용의 날개뼈가 솟구쳤다. 이윽고 근육과 살점, 그리고 비늘이 마치 거미줄처럼 날개뼈 사이를 타고 빈 공백을 칠해 가기 시작했다.
[후후후, 녀석은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내가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노라. 아아, 베르단, 베르단···. 그 아이도 보고 싶구나. 그 아이의 소식은 아느냐?]
-쿠르르릉.
용의 앞발에 살이 달라 붙었다. 거대하고 강인한 근육이 용의 팔뚝을 타고 올랐다.
-쿠우웅.
용은 앞발을 내려 바닥을 짚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순간 페르난데스를 덮쳤다. 먼지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침묵하며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륵.
그의 눈 앞에, 푸른 불꽃이 번쩍였다. 곧, 먼지가 가시고-
-그곳엔 용의 눈이 있었다.
용은 새파란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내려보고 있었다. 귀화가 안저에서 비치는 눈은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찌하여 말이 없느냐? 인간의 언어를 할 줄 모르느냐? 나는 궁금하다. 전쟁은? 전쟁은 어떻게 되었지? 아, 목이 마르구나. 머리가 울려. 너무 오래 잠들었구나. 너무 오래 잠들었어. 아직 나의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없으면 아니 된다.]
-콰드드드득.
용의 하반신은 여전히 지하에 파묻혀 있었다. 용은 천천히 몸부림치며 바닥에서 하체를 뽑아내려 하고 있었다. 기암괴석 같은 근육이 꿈틀거리며, 놈의 앞발이 바닥을 으깨고, 부수었다.
[나쁜 꿈을 꾸었다. 아주 못된 악몽이었지. 지하 매장 교단 놈들이 결국 데인, 그 어린 녀석의 나라에 마수를 뻗는 꿈을 꾸었다. 내가 나섰지. 모두 쫓아냈다. 그래. 언제나 너희 어린 인간들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 꿈 속에서조차!]
용은 우습다는 듯이 흐흐, 하고 바람 소리를 냈다. 페르난데스는 최대한 용의 이 두서 없는 말 속에서 정보를 뽑아내고 있었다.
용은 자신의 죽음을 꿈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용을 죽일 수 있는 ‘지하 매장 교단’이라···.
뭄토의 여섯 사제들이 다스리는 네크로폴리스 언더 카타콤? 언더 카타콤이 페르타스의 ‘사자 비서’로 풀려나기 전이라면.
데인 왕국의 건국 시조, 기사왕 데인의 시절 이야기다.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느냐. 작은 아이야. 인간의 아이야. 나는 너희 왕국의 수호룡이자, 이 물질 세상의 마지막 살아 남은 드래곤이니라. 경배는 바라지도 않거늘, 어찌하여 나를 경계하느냐?]
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나의 모습이 네게 두려움을 준 모양이구나. 가엾고 딱하지만, 언제나 너희 인간은 그래왔지. 후후.]
“드래곤. 그대는 잠에 든 것이 아니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언제라도 지배의 술식을 당길 준비를 하며, 천천히 용의 눈을 바라보았다.
“물질 세계는 더 이상 드래곤을 원하지 않소. 그대의 이야기는 어린 아이를 겁내기 위한 전설에 불과하지. 그대의 영면은 방해 받은 것이오.”
페르난데스는 수인을 짚으며 지배의 술식을 팔에 감았다. 실낱 같은 마력이 용과 그를 잇고 있었다.
“이름을 말하시오.”
[무슨 헛소리를···. 무례함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어린 인간아. 내 너를 벌하지 아니함은 네 왕의 얼굴을···.]
“이름을 말하라!”
페르난데스는 거칠게 술식을 조작했다. 용의 동공이 크게 뜨이며, 한 순간 거체가 비틀거렸다. 아직까진 성공이다. 용은 자신에게 걸린 [지배]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넌 누구고! 네 왕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고대의 망령아. 네 이름을 말하라!”
페르난데스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신성이, 그의 목소리에 권위를 부여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어쨌건 죽음에 속해 있었다.
-어찌 성공하는가 싶긴 하군.
페이자쉬는 피식 웃으며 용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전생에 망령 계열 소환체들은 일반적으로 사제들의 이러한 수법에 당하곤 했다. 페르난데스가 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모사에 가까웠다.
이름은 힘을 갖는다. 진부하고 오래된 전설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에 닿아 있었다. 자신의 진명을 걸고 하는 맹세. 그리고 자신의 진명을 바치는 복종은 영혼의 격을 담보로 한다.
하여 성직자들은 임무에 나설 때에 자신의 이름을 감춘다.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안젤로와 바실라로 서로를 부르는 것처럼.
[고대의 망령이라니! 참담한 언사로다! 나는 너희 왕국을 위해···. 머리, 내 머리가 울리는구나!]
그 순간 용은 몸부림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곧 그것은 허공을 거칠게 노려보며 고함쳤다.
[넌 또 누구냐! 누구기에 나를 부르느냐?! 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도다!]
-콰지직!
용은 파묻힌 하체를 꺼내기 위해 거칠게 발버둥쳤다. 용의 눈이 천장 너머의 공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은 지금 페르난데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누가 더 있나?’
-쉿.
페이자쉬는 용이 바라보는 방향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용은 지금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방향에서 용을 부르는 존재가 있다면···.
-엘핀 서펜트킹 가이메른. 그 녀석이군.
‘놈이 용을 부르고 있다고? 놈이 용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인퍼머르는 놈의 영역이야. 당연히 그 지하에 무엇이 매장되어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전생에 놈이 용을 부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적이 없는데···.
전생에 가이메른 왕조는 엘프 트라이던트 중에서도 크게 세력이 약한 축에 속하던 유랑 민족이었다. 놈들이 용을 부렸다면 결코 그렇게 쉽게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하물며 동북부 재해권 전반을 프란츠리트에게 빼앗겼는데?
‘드래곤과 가이메른이 상잔했다는 가설은 폐기하자.’
-아직 시기상조 아니야?
‘다른 조각이 더 있어. 가이메른은 결코 실패할 도박에 목숨을 걸 놈이 아니야. 놈이 용을 불렀다면 놈에게 자신이 있단 뜻이겠지.’
천상 전쟁 당시엔 용이 지상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 시절부터 살아온 왕이 용의 힘을 과소평가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가이메른이 인퍼머르를 프란츠리트에게 빼앗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건 어때?’
-음?
‘프란츠리트 흡혈귀 놈들은 네크로맨서들을 통해 용을 부려 가이메른을 공격하려 했지.’
-그렇지.
‘정황상 가이메른은 그걸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고. 용을 부활시켜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겠지?
-콰지지직!!
-쿠르르릉.
마침내, 용의 다리가 바닥에서 빠져나왔다. 앞발의 배는 크고 굵은 근육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그 위로 검붉은 비늘들이 빼곡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용은 자신의 수육을 ‘부활’이나 ‘소환’이라 여기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지반에 파묻혔다고 여기고 있었다.
‘전생에 가이메른이 프란츠리트의 밀서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내부에 있었던 배신자를 예측하지 못했다면. 용을 부리려 병력을 집중한 순간에 기습을 받았다면? 이런 추측은 어때?’
-타당하군. 그럼 지금 놈은 배신자와 용을 동시에 대비하고 있다는 뜻인가?
‘놈이 용을 통해 무얼 얻으려 하는지 알아야 해.’
가이메른 왕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은 높은 확률로 인류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엘프들은 다른 종족의 일에 대해 배타적인 놈들이니. 흡혈귀의 계획을 방해했으니, 이제 엘프의 계획을 방해할 차례였다.
저 두 세력이 서로에게 칼부리를 겨누고, 심계와 전략을 나누고 있을 때. 그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한 조각.
지배의 술식을 지니고, 용을 확보한 이단심문관의 시간이다!
‘도박을 좀 해야겠군.’
-뭐, 그게 오늘 하루 일인가.
용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는 듯 했다. 놈의 두 날개가 크게 펼쳐져 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용이 날아오를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그 전에 용의 통제권을 확보해야 했다. 그는 재빨리 뛰어, 정신을 가다듬는 용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아앗!! 무례한 놈! 이게 무슨 짓이냐!]
용은 갑작스런 페르난데스의 기습에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페르난데스는 거의 부서져 가는 장검을 들어 올리고, 빠르게 내리 찍었다.
-콰직!
용의 비늘 틈 사이로, 장검이 힘겹게 박혔다. 신성의 출력을 더한 페르난데스의 완력으로도, 용의 비늘과 근육, 그리고 뼈를 관통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이 정도면 되었다.
용의 머리를 뚫고 용을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었으니. 어차피 그런 짓은 불가능했다. 페르난데스는 한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 쥔 채로,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려 수인을 엮었다.
용의 머리에 박힌 칼날을 타고, 용의 마력과 페르난데스의 마력이 뒤엉켰다. 엄밀히 말하자면, 용의 육신은 지금 살아있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었다.
정교한 술식과 마법으로 자아낸 인공적인 수육에 불과했다. 그 말은 곧, 그가 침투할 가닥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완성되기 전이라면 그 거대한 마력에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완전히 안정화된 이후의 마법 구조물은 오히려 파고들기 수월했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용의 마력을 청동 옥좌로 이끌었다.
-고오오오···.
그의 머리 뒤에 검은 헤일로가 떠올랐다. 마법이 완성되었다. 섬세하게 짜여진 부활 주문에 마력 쐐기를 박아가며, 페르난데스는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네크로맨시를 할 수 있었던 거지? 인간에게 주어지는 지식 수준이 아닌데···.’
페르난데스는 용의 표층 의식을 이루는 마법 술식에 역주술을 걸며 상념에 잠겼다. 곧 그의 시야가 암전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