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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화 (38/388)

37. 불길의 시대

*

인퍼머르는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가로등을 비롯한 도심의 광원은 지진의 여파로 파괴되어 기능을 상실했다. 각 가정은 불을 끄고 대피한 이후였고, 사람들은 횃불에 의지한 채 흩어져 있었다.

“후···.”

레이아는 비틀거리며 무너진 담장에 등을 기대고 섰다. 마침내 지진이 멎었다. 항구를 지배하던 압박감과 존재감이 더 이상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아는 거의 발작적으로 칼자루를 잡고, 놓으며 생각했다.

“사라진 게 아니야.”

드래곤의 부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정말 이미 벌어진 사건이라면 지금의 침묵은,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았다.

대기를 휘몰아치던 압박감이 해소되자, 공포에 휩싸여 거리를 내달리던 인간들이 점차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평화를 즐길 시간이 아니었다. 레이아는 항구를 향해 달렸다. 모든 엘프들이 느끼고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이나드를 찾아가야 했다.

엘프 다섯 장군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장수이자, 왕의 오른팔. 그를 찾아야 한다. 그와 왕이라면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

-캬오오오!!!

“무슨!!!”

레이아는 급히 멈춘 채로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골목의 어귀에, 담장 위에 기괴한 괴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이아를 내려보고 있었다.

놈의 노란 눈과 레이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쥐를 닮은 넓게 솟은, 거의 사람 머리 만한 큰 귀, 새파랗게 질린 피부와 노랗게 뜬 동공 없는 눈동자···. 굽은 등으로 담장 위에 매달려 있는 괴물에겐 심해의 비린내가 흘렀다.

“흡혈···귀?”

“캬르륵?”

놈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작스럽게 웃었다. 놈의 큰 입이 가로로 찢어지며 면도날 같은 이빨이 줄지어 드러났다.

-탓!

-챙!

놈은 아무런 전조 없이 레이아에게 달려 들었다. 민간인이었다면 방금 그 한 수로 몸이 갈라져 죽었을 공격이다. 레이아는 순식간에 칼을 뽑아 놈의 손톱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챙! 챙!

“캬아아악!!!”

엄청난 괴력, 그리고 속력이었다. 괴물은 연신 손톱을 휘둘러 레이아를 압박했다. 레이아는 몸을 눕혀 놈의 손을 피하며 칼을 올려 쳤다.

-스겅!

“캬아아악!!!!”

놈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레이아의 머리칼이 물결 치듯 흔들렸다. 그녀는 옆으로 한 바퀴 구르며 칼을 쳐냈다.

-촤아악!

놈의 반응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오랜 세월 연마된 엘프 검사의 반응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레이아의 칼날이 달빛을 흐트렸다. 번뜩이는 새파란 빛과 함께,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스르릉···탁.

레이아는 자세를 잡으며 검을 검집에 납도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몸이 허물어졌다. 레이아는 입술을 깨물고 담장을 박차고 올랐다.

담장을 차올리고, 맞은 편 담장 위를 밟은 레이아는, 공중에서 허리를 꺾으며 몸을 튕겨 반파된 건물의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탓.

그녀는 자세를 낮춘 채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녀의 귀가 쫑긋 서서, 주위의 혼란 속에서 소리를 수집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괴물이야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흡혈귀. 프란츠리트···. 박쥐 놈들!”

인퍼머르의 항구, 그 바다 아래에서 흡혈귀와 시체들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저 멀리 엘프 함대 위에서는 도함한 흡혈귀들을 상대로 함상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진의 여파로 아직 군세를 정비하지 못한 엘프 해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편—

인퍼머르의 항만에서부터 이어지는 공세는 아무런 방비 없이 방치된 항구를 유린하고 있었다. 이건,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내륙이 아니라, 바다에서부터 기습한다고?’

엘프 해군의 해상 전투 수행 능력은 세계 최강이다. 따라서 레이아는 감히 바다에서 항구를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부활은 흡혈귀의 소행인가···?’

그때 지붕의 한 귀퉁이에서, 검은 털이 돋아 있는 손아귀가 올라 왔다. 곧 사람의 팔을 입에 물고 있는 괴물이 나타났다.

“크릅??”

왕이시여, 죄송합니다. 레이아는 칼자루를 움켜 쥐며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와일드프린스로서 그녀가 왕의 곁을 지켜야 했지만, 엘프 해군은 내륙을 방어할 수 없었다. 시가전 상황이 일어났다면, 그녀와 같은 하프 엘프들이 나서야 했다.

-스겅.

괴물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놈은 곧 눈을 뒤집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미 도시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항만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흡혈귀와 괴물들이 도시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캬오오오!!!!

멀지 않은 건물에서, 한 인간이 괴물의 손아귀에 찢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괴물은 인간의 몸에 얼굴을 처박고 게걸스럽게 피를 빨았다.

레이아의 표정이 혐오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칼자루를 잡고, 밤하늘을 뛰어 올랐다.

-쿠르르르릉.

저 멀리에서, 다시 진동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피로 물든 설원이 펼쳐졌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거대한 기암괴석으로 둘러 쌓인 분지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심상 세계···.”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발 아래에 덮인 눈을 쓸었다. 딛고 있을 때엔 바위라고 생각했던 바닥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돌? 눈 사이를 파고 든 그의 손이 무언가 기묘한 감촉을 느꼈다.

“묘비로군.”

바닥에 누워 있는 묘비였다. 페르난데스는 바닥을 덮고 있는 눈을 발치로 치웠다. 바닥이 묘비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 내리는 눈은 바닥에서 스며 나오는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

-후우우웅···.

저 멀리, 이 설원의 한 가운데엔 거대한 비석이 서 있었다. 바닥에 있는 묘비들은 그 비석을 향해 누워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설원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사박, 사박.

핏물 든 눈이 그의 발걸음에 따라 흩날렸다. 어떤 묘비는 우뚝 서 있었고, 또 어떤 묘비는 반쯤 부서져 있었다. 모든 비석에서 붉은 선혈이 새어 나왔다. 거대한 비석을, 수의를 차려 입은 여인이 끌어 안고 있었다.

“···무례한 인간.”

새하얀 눈처럼, 빛나는 피부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파란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밀밭처럼, 그녀의 황금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따라 흩어졌다.

“나를···방해하지 말거라. 나는 피로하다.”

“당신은 죽었소.”

“알고 있다. 다시 말 할 필욘 없지. 나는 드래곤이다. 내 어찌 모르겠느냐?”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비석을 바라보았다. 비석엔 투박한 석화가 빼곡히 각인되어 있었다.

-용을 만나는 기사.

-언데드를 무찌르는 기사.

-늪지의 괴물을 참살하는 기사.

-언덕의 거인을 물리치는 기사.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기사.

-엄숙한 대관식.

-검은 갑옷을 입은 군단에 맞서는 기사.

-용의 발치에서 울고 있는 기사.

-용을 위한 묘지를 세우는 기사.

기사왕 데인의 일대기를 세긴 그림이었다. 여인은 희미하게 풍화된 석화를 어루만지며 슬프게 웃었다.

“다인, 그 꼬마는 웃으며 죽었더냐?”

“···그렇소.”

“그 말을 듣고 싶어 내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 아이의 나라는, 바람대로 지금 굳건한 강국이 되었더냐?”

“데인 왕국은 동부 왕국 연합의 핵심 전력이 되었소. 하지만 제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

“제국? 아, 아아···. 샤를···. 그 아이가 있었구나. 그 아이의 나라가 있었어.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여인은 키득거리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씻을 수 없는 피로와 슬픔이 비쳤다.

“나는 어찌하여 일어났느냐? 내 분명 매장 교단의 손에 스러졌거늘.”

“네크로맨서들이 그대를 일으켜 부리려 했소.”

“나를? 후후, 어리석구나.”

그래, 어리석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 하고도 수백여 년을 더 지난 영혼이 이토록 강건하거늘. 감히 필멸자의 마법으로 이런 존재를 부릴 수 있을까.

페르난데스의 손에 얽힌 지배의 술식은, 말 그대로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여인은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민한 아이로구나. 너는···. 사제더냐?”

“지금은,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이오.”

“아아. 베이타서스. 그 녀석도 있었지. 그래. 카라드펠린은 잘 지내느냐? 녀석은 여전한가?”

“사다르켈리사의 봉인을 지키고 있소. 아직까지는.”

천상 전쟁 이래로 살아남은 용은 공식적으로 단 두 개체 뿐이었다. 천상룡 카라드펠린. 비늘 덮인 여제 사다르켈리사. 카라드펠린은 선신 만신전의 소신(小神)으로 승천했고, 사다르켈리사는 다섯 대악마 중 하나가 되었다.

여인의 눈이 분노와 슬픔으로 찌푸려졌다.

“사다르켈리사. 그 계집은 참···. 안타깝구나.”

돌연 그녀의 아름다운 눈썹이 비틀렸다.

“그나저나, 누가 나를 이리 부르고 있는 것이냐? 내 그 전까진 그저 사령술을 부리는 어린 인간이라 여겼거늘,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엘프 서펜트 킹, 가이메른이오.”

“가이메른···. 그 늙은 괴물이 아직까지 정정하다니. 너희 인간들의 고민이 크고도 깊겠구나. 어찌하여 나의 무덤가까지 다가왔더냐? 녀석들의 영역은 바다가 아니냐?”

“그대의 무덤은 지하에 매장되어 있었소. 그 위로 엘프들의 항구가 올라왔지.”

“···? 인간의 영토에 어찌 엘프들이 나타났느냐? 왕국의 기사들은 지금 무얼 하느냐?”

“뿐만이 아니오. 흡혈귀들 또한 그대의 부활에 관여되어 있소.”

“흡혈귀라···. 흡혈귀. 어리석은 인간들이었지. 그래. 이 근방이 그런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다, 이 말이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천천히 비석에서 물러서, 피로 물든 설원을 밟았다.

-사박.

바람이 흩어지며 그녀의 발길에 닿은 눈을 밀어냈다. 전장에서 스러져간 기사들의 묘비가 눈 아래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에게 다가섰다.

“네가 내게 바라는 바가 있겠구나. 인간 신의 사제야. 어린 인간아.”

“도와주실 수 있소?”

“네 정체를 말해준다면. 너는 그저 ‘어린’ 아이는 아니로구나. 네 지식 뿐만이 아니라, 네 영혼이 말이다. 네가 가진 육신에 비해 영혼의 나이가 깊다.”

페르난데스는 상념에 빠졌다. 이 용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고민의 시간을 짧았다. 그는 곧 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베이타서스와 거래했소. 80년 후에서, 과거로 돌아왔지.”

“제2계를 뒤로 돌렸느냐?”

“수평 세계에 한해서, 물질 세계를 자아냈소.”

“재밌구나. 재밌어. 내가 세상을 꿈결과 같다 여겼거늘···. 후후, 세상은 오히려 너의 꿈에 속해 있었구나.”

용은 고운 손을 뻗어 페르난데스의 어깨에 쌓인 눈을 쓸었다. 용의 손은 차가웠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팔뚝에 손가락을 얹으며 말했다.

“나를 아벨레사스라 부르거라. 네가 쥐고 있는, 이 마법을 허하겠다.”

페르난데스의 오른팔에 감긴 지배의 술식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지며 검붉은 마력이 날뛰었다. 부서져 가던 술식에 비로소 힘이 깃들었다.

이름이 담긴 맹세. 용의 영혼은 준신의 격에 달한다. 그런 그녀가 직접 자신의 영성을 걸고 새긴 마력이다. 페르난데스는 청동 왕좌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이름은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요.”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네 이름 또한 나의 정원에서 기억하겠다. 이제, 놈들에게 보여주자꾸나.”

그녀는 허리를 굽혀 페르난데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희 어린 인간들이 어째서 대륙의 주인인지 말이다.”

천상 전쟁 이래로 드래곤과 엘프, 드워프가 사라졌지만. 그게 곧 인간에게 친근한 세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악마는 그 후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속이고, 유혹했다. 천상은 그저 인간의 신앙을 수확하고자 할 뿐이었고, 정글과 늪지, 숲과 황야, 사막과 산맥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연과 괴물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대륙의 패자였다. 짧은 수명, 연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영혼과 생명을 불사르며 나아갔다. 결코 멈춤 없이, 느리더라도, 약하더라도, 쓰러지더라도. 한 발자국씩.

하여 ‘불길의 시대’라.

그리하여 인간의 시대라.

어째서 이 시대가 그리 불리는지, 알려주자꾸나.

인간들의 수호룡이 푸른 눈을 빛내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순간에 우습게도, 마치 저 어렸던 시절처럼 그녀의 미소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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