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이 세계는 여전히, 그 시절 처럼.
*
박쥐 구름. 릭터 반 프란츠리트는 배의 좌현에 앉은 채로 달빛 한 점 닿지 않는 어두운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 주머니들이 공포에 질려 속삭이는 저속한 표현이다. 해도, 달도, 그 어떤 천상의 빛도 파고들지 못하는 이 성스러운 주문의 기원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하찮은 것들. 릭터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의 희게 바랜 곱슬머리가 밤바다에 흩날렸다. 릭터는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캬아아아악!!!!
-샤아아아!!!
그의 움직임에 맞춰서, 반수(半獸)가 되어버린 그의 혈족들이 울부짖었다. 박쥐와 거인의 가장 사악한 부분을 따로 떼어 합쳐 놓은 듯한 생김새의 괴물들이었다.
놈들은 릭터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혈족들의 굶주림과 야성이 릭터의 핏줄에 울리며 공명했다. 릭터는 비릿하게 웃었다.
“왔느냐?”
“예, 대공 전하.”
“좋구나. 준비는 어찌 되어가느냐?”
“아일데른, 그 늙은 엘프가 제법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가이메른의 계집종들은 지금 항구 안에 발이 묶여 쩔쩔 메고 있습니다.”
“까마귀 놈들은? 녀석들은 무얼 하고 있더냐?”
릭터의 뒤에 부복하고 나타난 청년이 잠시 머뭇거렸다. 대답이 멈추자, 릭터의 시선이 청년의 목덜미를 스쳤다. 청년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룬레이븐 학회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릭터가 눈살을 찌푸리자 청년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하, 하지만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지, 지진과 이 마력··· 이 존재감을 보십시오. 대공. 요, 용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은 분명 성공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계획대로, 지진 덕에 지금 선봉대가 항구에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용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 가이메른, 그 노괴의 기함은 오로지 용의 숨결에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청년이 머뭇거리자, 릭터가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청년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감히 그를 떨쳐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곧 동이 튼다. 아들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다는 말이냐? 첫 지진 이후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제, 제가 직접···. 직접 노괴의 기함에 도함하겠습니다. 기, 기회를 주십시오. 대공.”
“하하, 기회라. 아들아. 아들아. 내 너에게 언제나 기회만을 주었거늘···.”
릭터는 청년의 턱을 꽉 틀어쥐고 끌어 올렸다. 청년의 몸은 마치 종잇장처럼 허공에 들려 매달렸다.
“커, 커흑!!”
“내가 두려우냐?”
릭터의 붉은 눈이 청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흡혈귀의 야간 시야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청년의 눈을 가렸다. 그 사이로, 오로지 릭터의 핏빛 동공만이 빛나고 있었다.
-캬아아아악!!!!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부짖던 반수들의 괴성이 희미하게 멀어졌다. 흡혈귀의 예민한 청각은 지금 이 순간 오직, 릭터의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대, 대공. 대공···.”
“그래. 아들아. 내가 두렵다면. 네가 나를 두려워한다면.”
“커흑!!!”
-털썩.
릭터의 손아귀가 풀어지며, 청년은 바닥을 굴렀다. 청년은 숨 막힌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누워 웅크렸다.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웃는 릭터의 얼굴이 보였다.
“나보다 나약한 피 주머니들에게 겁을 먹지 마라. 가거라. 프란츠리트의 군율을 보여라. 쿠르트 반 프란츠리트.”
“네, 네! 대공!”
-퍼드득.
청년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어둠 속에 녹아 사라졌다. 릭터는 그 모습을 보며 큭, 하고 웃었다. 곧 그는 고개를 비틀며 바다를 향해 속삭였다.
“가서 녀석을 도와라. 가이메른의 기함을 타고 올라라. 일흔셋을 허락하겠다.”
-쿠르르륵.
-첨벙!
밤바다에 소리 없이 떠 있던 검은 함선들에서, 일제히 시체와 흡혈귀들이 뛰어 내렸다. 릭터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지기스문트, 놈이 성공할 거라 생각하나?”
“구울도 그런 생각을 하진 않을 겁니다. 아버지.”
“하하하, 그래. 그렇겠지. 놈은 미끼에 불과해.”
“정말 드래곤이 우릴 돕겠습니까? 룬레이븐 놈들을 그렇게 신뢰 하시는지요?”
“내가? 나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아들아. 드래곤이 우릴 돕지 않는다면? 엘프는 돕겠느냐? 인간을 돕겠느냐? 놈이 어떤 방식으로 날뛰든, 저 항구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 모든 것은 나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다.”
-쿠웅.
장루 위에서, 전신 갑옷을 둘러 입은 거한이 뛰어 내렸다. 두꺼운 투구 안에서, 릭터를 닮은 붉은 눈이 빛났다.
“항구가 모조리 불타올라도, 엘프 놈들만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승리다. 이 바다에서, 엘프를 제외한다면 나의 함대를 막을 수 있는 세력 따윈 없다. 피 주머니들은 이제 모든 바다를 두려워 하리라.”
“모든 것은 송곳대공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릭터는 공손이 고개를 조아린 지기스문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가학적인 빛을 담으며 비틀렸다.
“이올란데를 데려 와라. 그 계집에게도 자격이 있지. 제 남편이 불타 죽는 꼴을 볼 자격 말야.”
“후후, 그 여자도 기뻐할 겁니다.”
릭터는 피식 웃었다. 그 엘프 계집의 통곡 소리를 반주 삼아, 불타는 항구를 바라보는 것도 제법 운치 있는 여흥이 될 것이다.
그녀를 실험용 들쥐 취급한 엘프 왕에게는 과분한 정절이다. 릭터는 이올란데를 비웃었다. 그 계집은 프란츠리트 혈족이 된 이후로도 엘프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가당치 않게도.
-쿠르르르릉···.
저 멀리에서, 항구 너머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풍랑이 바다를 휩쓸고 지나갔다. 릭터의 하얀 곱슬머리가 바다바람에 흩날렸다. 릭터는 항구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았다.
-콰르르르릉!!!!
불기둥이 순간 밤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강렬한 화염이 순간 온 바다를 대낮처럼 비췄다. 프란츠리트 함대를 감추고 있던 검은 구름까지 한 순간 밝게 빛났다.
-캬아아아악!!!
함대의 흡혈귀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려 움츠러들었다. 영성이 격에 압도된 것이다. 용이 가진 압도적인 존재감이 저 멀리 떨어진 바다에까지 닿아, 영혼 없는 시체들조차 움츠러들었다.
릭터 또한 온몸이 저릿하게 울리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불기둥 사이에서, 포효하는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놈이다. 그리고 이 불길은—
그래, 이 불길은 봉화다. 가이메른의 오랜 치세에 마침표를 찍는 우리의 봉화다. 릭터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가라! 가라! 가! 내 자식들아! 이 쓸모 없는 버러지들아! 엘프 놈들을 찢어 삼켜라! 가라! 프란츠리트의 군율을 보여라!”
-부우, 부우우!!!
-캬아아아아악!!!
-퍼드드득!
뱃고동이 크게 울렸다. 누군가는 날아 올랐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다. 프란츠리트의 군함에서 수많은 시체들이 쏟아졌다.
천상 전쟁 당시, 감히 영생을 탐내 태양 신을 죽인 마법사들이 받은 세 가지 저주가 있었다. 릭터는 귓가에서 흐느끼는 죽은 신의 환청을 들었다.
[너희는 산 자의 온기를 담을 수 없으리라.]
그래, 산 자들은 밤의 냉기를 두려워 하리라.
[너희는 산 자의 혈액 만을 삼킬 수 있으리라.]
고맙군. 기꺼이 그리 하겠다.
[너희는 산 자의 시간을 걸을 수 없으리라.]
지금은 죽은 자들의 시간이다.
꺼져라 망령아. 릭터는 자신의 혈액에 타고 흐르는 신의 저주를 비웃었다. 감히 어떤 누가 있어 죽음을 피할까. 저 영원왕, 가이메른조차도. 저 위대한 드래곤마저도!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
거대한 화염이 인퍼머르의 한 가운데에서 치솟았다. 침투한 흡혈귀들과, 혼란에 휩싸인 인간들. 그리고 저 먼 바다의 엘프들마저도 한 순간 서로에게 겨누던 칼날을 멈추고 인퍼머르를 바라보았다.
-콰르르르릉!!!
지진파가 항만을 휩쓸었다. 그 여파에 몸을 낮추고 충격을 견디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다가올 존재를 경배하는 것과 같았다.
불길이 천천히 희미해졌지만, 이제 인퍼머르 항만의 모든 이들은 선뜻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인퍼머르의 하늘 위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검은 밤하늘로 향했다. 고개를 조아린 필멸자들의 위에, 용이 군림하고 있었다.
-퍼드득.
수천 장의 돛이 일제히 펄럭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용은 하늘 위에서 대지를 굽어 보고 있었다.
“크으읍···.”
[후후, 힘든가?]
용의 목덜미를 끌어 안은 페르난데스는 하늘 위의 풍압을 온몸으로 견디며 신음을 흘렸다. 용은 쿡, 하고 목덜미를 울렸다.
[아아, 자유롭구나. 달콤하구나. 보거라. 페르난데스. 저기 저 수평선을 바라보아라. 저 하늘의 별빛을, 저 아래 무릎 꿇은 인간들을···. 아름답구나. 이 세계는 여전히, 그 시절처럼.]
“흡···. 아벨···레사스.”
말을 하려 할 때 마다 폐를 찢어 발길 듯한 바람이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애써 고개를 틀며 바람에 저항했다.
[후후후, 어찌나 다인, 그 녀석과 같은 반응인지. 즐겁구나.]
“아벨레사스. 장난은 이쯤이면 되었소!”
[장난이라? 얄밉구나. 나는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하에 묻혀 있었다. 내 어찌나 이 풍경이 그리웠는지 아느냐?]
“큽···!”
-후우웅!!
아벨레사스는 장난치듯 공중에서 몸을 틀어 한 바퀴 돌았다. 페르난데스는 숨을 멈추고 그녀의 등에 바싹 붙어 균형을 잡았다.
페르난데스가 헐떡이자, 아벨레사스는 쿡, 하고 웃으며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용의 등이 바람을 막아주자 그제야 숨을 들이킬 수 있었다.
이 용은, 오래 묵은 현자 같다가도, 금새 이렇게 철 없는 아이처럼 굴었다. 페르난데스는 두통을 느끼며 자세를 잡았다.
[음? 저것들은 무엇이냐?]
천천히 지상이 가까워졌다. 그녀의 발치에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들이 모여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에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대를 깨운 사령술사들이오. 아벨레사스.”
[흐으음. 사례를 해 주어야 마땅하다.]
-쿠우우웅.
용의 발이 바닥에 닿자, 지축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흙먼지가 가시자 마자, 로브를 쓴 마법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용이여! 복종할 지어다!!!”
[음?]
아벨레사스가 멈칫하자, 사내들은 낄낄 웃으며 푸른 날이 선 단검을 꺼내 들었다. 드래곤의 존재감을 견뎌낸 것은 칭찬해줄 만한 일이다. 그게 광기의 결과였든, 자신감의 산물이었든.
그러나, 무례하구나. 아벨레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은 황급히 무언가가 빼곡히 적힌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양피지에서 보랏빛 불똥이 튀며 마력이 흘렀다.
[저 조잡한 자들이 정녕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단 말이냐?]
“저 녀석들은 하수인에 불과했고, 진짜 마법사는 한 놈이었소. 그 자는 아무래도 도망친 것 같군.”
[하아···. 어린 인간들아. 지금 나는 기분이 썩 좋은 편이다.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말···.]
아벨레사스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에도 사내들은 멈추지 않았다. 곧 선두의 사내가 들고 있던 양피지가 보라색 불꽃을 피우며 타올랐다. 검은 연기가 까마귀의 형상을 그리며 아벨레사스의 머리로 날아 들었다.
[무례함이 도를 넘었다.]
-쿠우우웅.
대리석 기둥 같은 꼬리가 허공을 찢으며 날아와 바닥을 으깼다. 아벨레사스는 꼬리를 휘둘러 사내들을 휩쓸어버리고는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들리느냐?]
“음?”
[늙은 엘프가 나를 부르고 있구나.]
아벨레사스는 고개를 들어 인퍼머르 항만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정면, 저 먼 곳에 거대한 함선이 정박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예의와 존중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구나. 저 하늘의 별자리와, 저 먼 바다의 물비늘은 여전히 아름답게 반짝이건만. 필멸자들은 마땅한 경외를 잃었다.]
아벨레사스는 짓궂게 이죽거렸다.
[나를 트로피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많구나. 어디 드래곤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처럼 보이더냐?]
“내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어린 꼬마들을 겁주기 위한 전설 정도로만 남았노라고···.”
[좋다.]
-쿠우우웅.
아벨레사스는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국 걷고는 눈을 떴다. 푸른 귀화가 그녀의 눈 안에서 번쩍였다.
[내 친히 이 어린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전설이 무엇인지 일러주겠다.]
아벨레사스의 입에서 불길이 녹아 흘러 내렸다. 그녀의 눈이 악동처럼 빛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뒷목을 최대한 세게 붙잡았다.
곧, 용이 바다를 향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