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다섯 왕좌의 손아귀
용의 거체에, 담장과 건물이 파괴되고 있었다. 용은 그저 올곧게, 항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가도가 부서지고, 충격에 건물이 주저 앉았다.
-쿠웅. 쿵.
“용이, 용이 온다!!!”
“함포 준비!”
“함포 준비 완료!!!”
“발포!!”
-콰아아앙!!
항만의 군함들이 일제히, 화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화약이 폭발하며 어두운 항만을 밝혔다. 철탄이 날아들어 항구의 시가지를 파괴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항상 그랬지. 언제나 이렇게 굴었어.]
-촤아아악!
아벨레사스의 날개가 크게 펼쳐졌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탄환을 무시했다. 단순한 질량의 충격은 그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그저 잠시 속도를 늦출 뿐.
-콰아아앙!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엘프 군함이 발포한 철탄 하나가 도심지에 틀어박힐 때마다 인간들의 건물이 박살나고, 그 사이에서 사람의 피륙은 산산조각이 났다.
언제나, 엘프들은 그랬다. 고결한 것처럼, 그 누구보다 청렴하고, 결백한 것처럼 굴었지만. 항상 다른 종족들을 희생물로 삼아 종족을 부지해왔다. 아벨레사스는 그런 모습을 수 없이 봐왔다.
-콰아아앙!!
엘프 군함이 발포한 포환이 그녀의 날개에 막혀 떨어졌다. 그녀는 도시로 향하는 포환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항만을 향해 질주했다. 그런 그녀의 곁에, 한 엘프 검사가 나타났다.
“드래곤이시여! 진정하십시오!”
[너는 누구냐?]
엘프 검사는 파괴된 가도를 내달리며 아벨레사스와 보폭을 맞춰 뛰고 있었다. 그녀의 은발이 거친 바다바람에 흩어졌다. 레이아였다.
“레이아 핀 가이메른! 서펜트킹 가이메른 폐하의 와일드프린스입니다! 진정하십시오!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탓!
레이아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포환을 가볍게, 몸을 굴러 피하며 외쳤다.
“어찌하여 당신이 깨어났던 간에, 이 항만은 저희 가이메른 왕조의 도시입니다! 이것은 불합리한 침략입니다!”
[이곳은 다인이 나를 위해 마련한 나의 영토다! 게다가, 어린 엘프야. 너희의 왕이 나를 부르고 있노라. 너는 어찌 나를 막으려 든단 말이냐?]
“하면! 저 또한 동행하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외치는 레이아의 말에, 아벨레사스의 눈동자에서 호의가 빛났다. 그녀는 레이아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포환을 날개를 펼쳐 막아내며 말했다.
[네 마음이 가상하다. 충절을 아는 엘프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동행을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평화로운 방향으로 사태가 진정되길 바랍니다!”
[나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두고 보자꾸나.]
-콰아아앙!
항만이 눈 앞에 다가왔다. 아벨레사스의 비늘은 포환에 상해 부서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세와 체력은 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게 부두를 박차고 날아 올랐다.
“용이 날았다!!”
“마법은? 아직인가?”
“준비 되었습니다!!”
-콰지지직!
가이메른의 기함. 아벨레사스는 밤하늘을 날아 오르며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요새를 바라보았다. 함선의 외벽에서 일제히 색색의 빛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벨레사스의 등허리를 붙잡고 있던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허리를 비틀어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섰다.
[페르난데스, 위험하다. 숨거라.]
“마력을 빌리겠소!”
[뭐, 잠깐. 잠깐만!]
페르난데스는 오른팔에 감긴 지배의 사슬을 잡아 당겼다. 아벨레사스의 목덜미에 이어져 있던 마력 사슬이 거칠게 그녀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흐읏!!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이 못된 꼬마야! 나, 나는···.]
-파지지직!
페르난데스는 두 발로 거칠게 흔들리는 아벨레사스의 머리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수인을 짚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청동 왕좌를 붉게 달구며 타올랐다.
지옥 마력. 용의 육신은 그녀의 유해에 마법사들이 마련한 지옥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그녀는 그걸 수육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녀의 몸은 마력의 실체와 다름 없었다.
지배의 사슬로 그녀의 육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상태! 즉, 지금의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마력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고 있다.
-아, 좋군. 이 느낌. 이 감각. 이 전능감!
페이자쉬가 미친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페르난데스의 뒤에 나타났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페르난데스의 몸에 박힌 성흔이 미친듯이 달아올랐다. 상극의 기운에 맞서서,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신성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력의 주체는 아벨레사스였고, 그 회로는 청동 왕좌를 통해 발현되는 것! 페르난데스의 역할은 그저 조율과 매듭 뿐이었다. 신성은 지금 그의 마법에 개입할 수 없다.
그래. 이 전능감!
페르난데스는 영혼을 울리는 격렬한 희열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 뒤로 검은 헤일로가 불타 올랐다. 마법이 완성되었다!
“마르크다인의 하락. 제일’카르단의 황동 방패. 그리고-.”
-콰직! 콰직! 콰지직!
날아드는 불덩어리를 떨어트리고, 떨어지는 번개를 비껴 쳐내며, 페르난데스는 흥겹게 웃었다. 마법전. 마법전에 있어서 그는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페르난데스···. 너는···.]
그의 발밑에서, 아벨레사스의 숨막힌 신음이 들렸다. 그녀의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단단하고 강인하던 그녀의 근육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가 가진 마력량을 계산하며 주의 깊게 수인을 짚었다. 그녀의 힘은 아직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영혼에 타격이 가지 않는 선에서.
마치 외과의의 수술칼처럼. 마치 보석 세공사의 실톱처럼. 정교하게, 섬세하게.
이제 곧.
페르난데스는 마지막 수인을 짚으며, 손등을 물었다. 짜릿한 고통이 쾌감으로 승화되며, 피가 흘렀다.
성자의, 디모니카의, 신성이 흐르는 혈액. 페르난데스의 발 밑에서 검은 불길을 내뿜는 마법진 위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주문, 의식, 그리고 제물.
마법의 삼요소가 완성되며, 페이자쉬의 억눌린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래. 이 전능감. 세계가 그저 장난감으로 보이는. 그 전능감이 그리웠다.
그의 머리 뒤에 떠 있는 검은 헤일로가, 밤하늘의 별빛을 삼키며 타올랐다.
“페이자쉬의, 다섯 왕좌의 손아귀.”
페르난데스의 오른손에 핏줄이 돋아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콰드득!!
-파지지직!
가이메른의 기함에 있던 수많은 보호 주문들이 한 순간 부서지며 흩어졌다. 잠시 항구에 고요가 내려 앉고—
-촤아아아악!!
해저에서 검은 손이 나타나, 가이메른 왕의 기함을 틀어 쥐고, 으스러트렸다.
*
“저게 대체 뭐지···?”
릭터의 함대는 인퍼머르 근해에 멈춰 서서, 용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이 가이메른 왕의 기함을 파괴한다면, 그 순간부터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릭터는 갑판 위에 서서, 허공에 맺히는 거대한 마력을 느꼈다. 처음엔 용의 마력이라 여겼다. 이따금씩 용들은 상상도 못할 마법을 부리곤 하니까.
그러나, 그의 오랜 삶에 거쳐 쌓아온 직감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가이메른의 기함에서 날아가는 마법들을 바라보았다.
과연 천혜의 요새였다. 정면으로 해상에서 맞부딪쳤다면 결코 돌파할 수 없었으리라. 정교한 마법의 연계, 그리고 엄중한 함대의 호위가 지진으로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용을 막아내고 있었다.
-콰지지직!
그러나 용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가 손을 휘두르자, 그대로 마법들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설령 릭터의 스승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결코 해내지 못했을 것 같은 섬세한 역주술과 파훼였다.
“인간···?”
인간이 엘프 왕실의 마법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하늘이 일그러지고, 바다가 일렁이며—
-촤아아악!
-콰지지지직!!!
엘프 왕의 함선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뭐!!!”
저게 저렇게 부서지는 거였어? 저게 뭐야? 릭터는 당황하며 순간 선상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수많은 보호 주문과 축복으로 축조된 가이메른의 요새가, 부서지고 있었다!
“아, 아버지. 후퇴할까요?”
“뭐라고?”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정지되었던 릭터의 사고가 그 말에 생기를 찾았다. 릭터는 화들짝 놀라며 뒤에 서 있는 지기스문트를 바라보았다.
지난 이백 년 간 단 한번도 지기스문트가 ‘겁에 질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야심차고 강력한 흡혈귀 대귀족마저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마법이라니!
릭터는 재빨리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 또한 두려움에 비틀려 있었다. 곧, 그는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왕의 요새가 무너졌다! 어찌 되었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하, 하오나···.”
“닥쳐라!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마라! 전 함대에 일러라! 쓰레기 놈들! 공격해라!!”
-부우우우우!!
릭터의 기함에서, 공격 나팔이 울려 퍼졌다. 릭터는 애써 선두로 나서며 생각했다.
저게 대체 무엇이든, 어찌 되었든 모든 일은 아직,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본능적인 불안감 속에서 릭터는 밤바다로 향했다.
*
-콰지지지직!!!
[이게 무슨!!]
아벨레사스는 급히 날개를 펼쳐 활강에 제동을 가하며 멈춰 섰다. 바다가 갈라지며 나타난 거대한 손아귀가 가이메른 왕의 기함을 틀어 쥐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마력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커흑!”
[괘, 괜찮으냐? 괜찮아? 페르난데스, 대답해라!]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핏물이 쏟아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려 애썼다. 페르난데스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정하시오. 백래시 치곤 견딜 만 하니.”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대체 어떻게···.]
“인간의 시대를 보여주자 하지 않았소?”
[인간의 시대! 그래 인간의 시대 말이다. 이게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냐?]
가이메른 왕의 기함이 반파되었다. 왕의 배가 천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맺은 마법의 여파로, 엘프 군함들은 서로 뒤엉키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수준의 마법이다. 피해?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모여 수십 일간 대마법을 자아낸다면 가능한 수준의 피해다.
마력? 대단히 많은 양의 마력을 잡아 먹었더라도, 어쨌든 육신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의 마력을 삼키고, 그 짧은 시간에 자아내어, 온갖 축복으로 보호 받는 가이메른 왕의 기함을 홀로 파괴하다니!
“시간이 없소. 지금 가야 엘프 왕을 잡을 수 있소.”
[···너와는 할 말이 많겠구나. 후후, 정말이지. 못된 꼬마야.]
-퍼드득.
아벨레사스는 힘겹게 날개를 펼쳐 부서져가는 왕의 기함에 올라섰다. 엘프 씨가드와 와일드프린스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뛰어 들었다.
-쿠우웅!
아벨레사스는 꼬리를 휘둘러 그들을 튕겨내며 외쳤다.
[가라. 가이메른을 사로잡아 오거라. 내가 이 곳을 맡겠다.]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등 뒤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도, 가이메른의 궁궐 지리는 이미 익혀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