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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40화 (41/388)

40. 누구도 믿지 말라.

가이메른 왕의 기함은 파괴를 염두하고 건조된 배는 분명히 아니었다. 애초에 배의 기능보다 도시, 또는 요새의 기능에 방점을 둔 선박이었으니. 기함이 반파된 순간 가이메른 왕의 기함은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거대한 선체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가라앉고는 있었으되, 배는 여전히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진탕이 된 속을 억누르며 불 꺼진 선내를 뛰어 다녔다. 기울어지고, 뒤틀렸지만. 흑마법사의 기초 소양은 미궁의 탐색! 이정도의 정보 혼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실시간으로 머릿속으로 그려 둔 지도를 수정해가며 선내를 돌파했다. 다행히, 갑판 위에서 날뛰는 아벨레사스 덕에 특별한 적이라 할 것이 없···.

-캬오오오오!!!

“···하.”

페르난데스는 급히 멈춰 서, 그의 눈 앞에서 붉은 눈을 빛내는 괴수를 노려 보았다. 흡혈귀 혈족 중, 오랜 세월 영혼의 뒤틀림을 견디지 못한 자들은 저런 괴물이 되곤 한다.

오로지 야성과 흡혈 갈증에 지배된 존재. 레드 헝거와는 전혀 다른 증상이다.

레드 헝거가 단순히 흡혈 행위를 중단함으로서 찾아오는 금단 증상이라면, 저런 뒤틀림은 오로지 시간과 경험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뎀드 원 뱀파이어(Damned One vampire). 흡혈귀의 강점과 오우거의 강점을 뒤섞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소드벨트에서 거의 부서져 가는 풀 세인트메탈 롱소드를 뽑았다. 앞으로 한 번? 두 번? 어쨌건 이 칼의 수명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것이다.

세인트메탈 특유의 은빛 섬광이 괴수의 이목을 끌었다. 놈은 눈을 찌푸리며 페르난데스에게 몸을 돌렸다. 누런 이빨이 번들거렸다. 놈의 턱에 끈적한 침이 흘러 내렸다.

-캬흐으으으으!!!

괴물이 날았다. 말 그대로, 반쯤 비틀린 선내 복도에서, 천장과 벽을 입체적으로 박차며 페르난데스에게 달려 들었다. 놈의 거대한 손아귀에 달린 흉흉한 손톱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쿵, 쿵, 쿵.

마물을 앞에 두고, 그의 핏줄에서 잠들어 있던 신성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며 신성을 담은 혈액이 전신 근육에 동력을 전달한다.

일시적으로, 몸에 쌓인 피로와 누적된 데미지가 사라졌다. 이틀 밤을 지새워 격렬한 전투를 지속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는, 디모니카의 출력을 감쇠할 수 없다.

-스겅.

하여, 머리 위로 달려드는 흡혈귀의 손톱을 피하는 데에 반 호흡. 칼날을 뒤로 틀어 흡혈귀의 배를 가르는 데에 다시 반 호흡. 몸을 틀어 떨어지는 흡혈귀의 목을 치는 데에 한 호흡하고도 반.

-철퍽.

세 호흡을 마치기 전에, 흡혈귀의 몸이 산산조각나며 바닥을 굴렀다.

-챙강!

그리고 마침내, 풀 세인트메탈 장검이 파괴되었다. 애당초 아슬아슬하긴 했다. 첫 교전이 고위 흡혈귀였고, 그 이후 구울과 흡혈귀들을 썰며 손질할 시간도 없었다. 끝내는 용의 두개골에 힘으로 꽂아 넣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후우···.”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이거, 돌아가면 또 혼나겠군.

-알현실로 갈 텐가?

‘아니, 성소로.’

엘핀 서펜트킹의 기함에는 반드시 성소가 있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자면 그랬다. 페르난데스는 피로한 눈매를 꾹 누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한 놈 잡아다 물어보는 게 제일이긴 한데···.’

그가 직접 눈으로 본 기함의 구조는 대부분 외부의 것에 한했다. 알현실에서 숙소로 이어지는 길과, 숙소에서 갑판으로 나가는 길까지.

‘시간이 없어. 프란츠리트가 공세를 시작한 것 같아.’

-채앵!

-캬아아악!

-대열을 갖춰···으아아악!!

저 멀리에서, 비명과 괴성이 들리고 있었다. 왕의 기함이 파괴된 틈을 노린 것일까?

-전생에서, 일이 어떻게 흘러갔을 지 선하군.

‘그래. 아벨레사스와 가이메른이 상잔하고 프란츠리트가 인퍼머르를 차지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가이메른 왕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용을 부활시켰다는 뜻이잖아.’

가이메른 왕이 이렇게 허술한 계획을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용을 부활시킨다는 위험부담을 떠안을 가치가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선내는 복잡한 미궁과 같았다. 그러나 흑마법사의 기초 소양 중 하나는 미궁 탐색이었고, 심지어 그에게는 비전 시야가 있었다.

-키이이잉!

간단한 수인을 짚자, 비전 시야에서 옥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시계에 혼란이 오고, 곧 그는 이 복도를 흐르는 마력의 격류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가이메른 왕의 기함은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저 먼 아래, 흘수선의 밑에 있는 장소에서 무언가 거대한 마법이 준비되고 있었다.

*

모든 광원이 사라진 어두운 복도 안, 페르난데스는 디모니카의 예리한 감각과, 비전 시야의 시계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점점, 마력의 흐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선상에 있을 땐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가이메른 왕이 만일 이 정도의 마력으로 준비한 마법을 사전에 사용했다면 다섯 왕좌의 손아귀라 할 지라도 단숨에 이 배를 파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크흐흐, 이제 후회가 좀 되나?

‘···확실히 아쉽긴 하지.’

속이 울렁이며 연신 걸쭉한 핏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다섯 왕좌의 손아귀는 그가 말년에 만들었던 마법 중 가장 직관적인 파괴력을 가진 마법이었다.

설령 만신전의 신이라 할지라도, 물질 세계에선 결코 피할 수 없는 파괴의 힘이었다. 급조된 주문과 제물로 구현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오로지 페르난데스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마력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이 만들어낸 기적과 같았다.

하여, 마법은 원전의 절반에 불과한 힘을 구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도 페르난데스는 심각한 백래시를 겪고 있었다.

청동 왕좌는 거의 기능을 정지했고, 마력이 날뛰며 비틀어 댄 탓에 내장기관의 손상이 적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그의 핏줄 안에서, 신성이 날뛰며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지만. 디모니카의 육신을 입지 않았다면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몸이나 다름 없었다.

“···은공···?”

저 멀리, 복도의 끝에서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키르하스였다. 페르난데스는 인기척에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키며 웃었다.

“은공!! 은공!!”

-타다닷.

키르하스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페르난데스의 가슴팍에 파고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숨막힌 비명을 내질렀다.

“바, 바실라. 진정해. 괜찮아. 괜찮아.”

“은공! 대체 어디에··· 어디서··· 세상에! 피 냄새?!”

아, 피를 한 바가지 뱉긴 했지.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복슬한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왜 꼭 귀족놈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웠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의 안정이다. 마음의 안정.

“괜찮아요? 어디 다치셨나요? 이단심문청으로 철수할까요?!”

“아냐, 괜찮아. 바실라. 아직 일 다 안끝났어.”

“일은 무슨! 지금 우리 완전 망했어요!! 은공! 용이 나타났어요! 흡혈귀도요! 지진이며, 난리며. 아주 그냥!”

키르하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제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아세요? 무려 이단들을 찾았다고요!”

“이단을?”

“네! 네!”

그녀는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 귀를 쫑긋거리며 페르난데스에게 파고들었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르하스는 잠시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눈을 감았다.

“헤헤. 그러니까. 옷 벗고 돌아다니는 이상한 변태였는데, 이상한 말을 쓰더라구요. 씨치? 카르치? 찰카? 이런 식이었는데··· 혹시 아세요?”

“북부 야만인 언어로군. 쓰라쉬, 칼취아, 차르카. 잡았다. 죽어라. 불타라. 대단히 화난 상태였나 본데?”

“와! 맞는 것 같아요! 역시 따오기··· 모르는 게 없어요!”

따오기···? 페르난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부족이 서부 황야 출신이긴 하지. 키르하스는 재잘거렸다.

“그래서 그 마법사가 그렇게 난리치는데, 뭐···. 탓치? 오라이온? 이런 말을 하는 사내가 나타나고···. 레이아 공주가 나타나고···. 흡혈귀도 나타나고···. 지진이 나질 않나, 용이 나오질 않나, 불길이 치솟질 않나.”

텟츠, 대사교. 오라이온. 룬레이븐 학파 뿐만이 아니었나? 이 도시에 숨어든 이단이 하나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사교 오라이온. 대사교 오라이온···. 페르난데스는 입 안에서 북부 야만인 출신 종파를 떠올려 보았다.

대사교 오라이온···. 그럴 리는 없지만. 키르하스의 말이 맞다면 그 자는 아마도. [체인질링]의 대사교, 오리온 위빙렛이 아닐까.

-그것 또 참. 거물이로군.

‘이 시대에 여기에 놈이 왜?’

-놓친 이상 알 수 없군. 그리고 놈이 맞는 지 확실하지도 않아.

‘이런 상황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정보가 불투명한 상황만큼 짜증나는 것은 없었다. 전생에 그는 정보를 틀어쥐고 용사들을 농락하던 흑마법사였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아요? 은공, 그냥 철수하시는 것이···.”

“그럴 순 없어. 갑판 위의 용은 아군이야. 엘프 왕과 프란츠리트 놈들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

“엘프 왕이요? 엘프 왕은 우리 편 아니었나요?”

“우리 편? 바실라. 명심해.”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손을 꼭 쥐고 눈을 맞췄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한 순간 크게 뜨이더니,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손아귀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우리에게 ‘편’은 없어. 바실라. 인간에겐 인간을 제외한 ‘편’이 없다. 엘프도, 흡혈귀도, 괴물도, 악마도, 신도. 모두 마찬가지야. 언제나 누구도 믿지 마라.”

“···은공. 손이 좀 아파요.”

“아, 미안.”

페르난데스가 손을 놓자, 키르하스는 얼굴을 붉히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곧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구도 믿지 말라. 은공도요?”

“···음. 그렇지?”

“그건 싫어요. 그럼 은공은요? 절 믿어요?”

-아니라고 대답해. 이 사기꾼아.

‘닥쳐.’

“당연히 믿지.”

“뭐에요. 은공. 말이 달라요.”

키르하스는 기쁜지 헤헤, 하고 웃었다. 그 티 없는 맑은 웃음에 페르난데스도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페이자쉬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무시하며, 그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키르하스는 곧 앗, 하며 등 뒤로 손을 돌렸다.

“이거, 은공 숙소에서 가져 왔어요!”

그의 풀 세인트메탈 대검이었다! 키르하스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품 속에서 향로를 꺼내 들었다.

“이것도요! 그거 아세요? 이거 사람 찾는 데에도 쓸 수 있어요!”

“···그런 기능이 있던가?”

“네! 전령을 부르고, 전령이 가는 방향으로 달리면 되더라구요!”

물론 그렇겠지. 전령의 속도를 쫓을 정도로 빠르게 뛸 수만 있다면. 어쨌건 키르하스는 대영웅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로서는 생각도 못한 기능이었지만, 키르하스에겐 가능한 수준의 기예에 불과했나 보다.

“어쨌건 고맙군. 큰 도움이 되었어.”

“드디어!”

키르하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디어다. 드디어, 이제 최종장이다.

마력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이제 곧 왕의 성소가 나타날 것이다.

엘프 왕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직접 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수로 용을 사로잡으려 했는지. 대체 용을 이용해 무엇을 꾸미고 있었는지.

흡혈귀와 엘프를 물리고, 동북부 해안선의 재해권을 다시 문명 사회가 가져가도록.

인류의 내분을 이용해 세력 확장을 꾸리던 전생의 엘프나, 동북부 해안선을 중심으로 문명 사회를 좀먹던 흡혈귀들은 이번 생에선 이 판에서 물러나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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