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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41화 (42/388)

41. 군왕의 황혼 (1)

*

신과 영웅의 전설이 화려하게 양각된 복도의 벽이, 비전 시야의 녹색 불빛에 불온한 기색을 띈 채로 일렁거렸다.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거침 없이 복도를 나아갔다. 인기척이 없었을 뿐더러, 마력의 농도가 짙어지며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밀한 자연 마력으로 인해 복도는 마치 안개가 낀 듯 자욱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시계를 차단한 채로 비전 시야에 의지해 사물을 조명하고 있었고, 키르하스는 천부적인 감각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기울어진, 흘수선 밑의 어두운 복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흘수선을 넘어 아래로 내려온 순간부터, 깊은 심해의 어둡고 둔탁한 물소리가 청각을 채우고 있었다.

“···은공.”

키르하스의 동공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소드벨트에 얹은 손에 힘을 주며 페르난데스의 앞으로 나섰다.

그때, 푸른 섬광이 그녀의 발치를 긋고 지나갔다.

-스겅.

복도의 끝. 성소의 거대한 문 앞에, 한 엘프가 서 있었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차고 있는 그녀는, 언제 칼을 뽑아 휘둘렀냐는 듯 칼자루를 쥔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정에 달한 검사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그리고 엘프 검사 특유의 날카로운 검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심상으로 체내의 마력을 구현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검사였다. 엘프 검사의 눈이 뜨였다.

녹색으로 빛나는 날선, 무감각한 눈동자가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를 훑어 보고는, 다시 감겼다. 그녀는 천천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선을 밟는다면, 베겠다."

“서펜트킹이 직접 하달한 명령을 수행하고 왔다. 와일드프린스. 나는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 안젤로다.”

그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얇게 뜨였다.

“네 이야기는 들었던 바 있다. 너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지. 서한이 있다면 나에게 건네라.”

“서펜트킹의 친서를 확인할 권한이 있나?”

와일드프린스. 엘프 최강의 기수들. 인간으로 친다면 그녀는 왕실 근위 기사단에 준하는 권한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자를 맞서서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그 자신이 가진 수를 계산했다.

백래시로 인해 컨디션은 최악이었고, 내상은 치유되지 않았다. 청동 왕좌는 지금 거의 과부하에 가까운 상태. 반면 키르하스는 아직 저 경지에 닿기엔 멀었···.

-저벅.

키르하스가 한 발자국 더 내딛어, 엘프 검사가 베어낸 금을 밟았다. 그 모습에, 엘프 검사의 눈섭이 움찔거렸다.

“···내 경고가 허장성세 같았더냐?”

페르난데스가 가진 디모니카의 반사신경으로도 미처 따라 잡지 못할 검격이 키르하스의 목덜미로 날아 들었다.

-챙!

불똥이 비산하며, 깨끗하게 이어지던 검격의 선이 키르하스의 손목 어림에서 끊어졌다. 엘프 검사는 순식간에 칼날을 납도하고는 자세를 도사렸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키르하스는 거의 보이지 않을 속도로 칼집에서 칼날을 살짝 뽑아 그녀의 검격을 막아 섰다.

힘으로, 또는 기술로 우위를 점하는 이들을 상대로, 키르하스는 아직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에겐 없는 ‘재능’이 그녀에겐 잠들어 있었다. 전생에,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쌓아 경지를 높인 절대자의 씨앗이 그녀의 심상 한켠에 분명히 위치해 있었다.

대족장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이단 종파의 노예에서 시작해 끝내 서부 대황야의 대호족으로 성장할 때까지. 그녀에게 삶이란 언제나 투쟁과 같았다.

그녀의 경지는 경험의 산물일 것인가. 재능의 소산일 것인가. 페르난데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키르하스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그녀의 기술은 아직 미숙하다. 따라서 그녀는 기술로 압도하는 적수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녀의 힘은 아직 미진하다. 따라서 그녀는 근력과 체구로 압도하는 적수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사신경. 그녀의 재능과 감각은 이제 막 트기 시작한 봉우리와 같았다. 그녀가 가진 천부적인 자질은···.

오히려 한 합의 겨루기로 검술의 경지를 결정짓는 엘프 검사의 완벽한 상성 관계에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엘프 검사의 입술이 비틀렸다.

“훌륭한 기도로군. 내 이름은 멜라디아, 와일드프린스의 삼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대는?”

키르하스는 잠시 불안한 눈동자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불타오르는 자존심과 욕망이 보였다.

‘허락해 주세요.’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하스의 입술에 경쾌한 미소가 걸렸다.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이단심문청의 토치맨. 그리고···.”

다시금,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눈동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여기 이 분의 가신입니다.”

“···따지고 보자면 나 또한 왕가의 가신인 바.”

멜라디아의 눈에서 호승심이 빛났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라. 군주여. 군왕을 영접함을 허하겠다.”

-차륵.

그녀는 큰 숨을 천천히 내쉬며 자세를 낮췄다.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맹수의 표정으로, 그녀는 키르하스를 노려보며 시선을 고정했다. 무거운 검기가 내려앉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은공. 곧 따라가겠습니다.”

“다치지 마라. 키르하스. 네 몸은 나의 자산이니.”

“···네.”

페르난데스의 말에 키르하스의 낯이 잠시 붉어졌다. 따듯한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어림에 걸려 간질거렸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 멜라디아가 비켜선 성소의 입구를 밀었다.

-탁.

-챙!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날카로운 검성이 문 너머로 들려왔다.

-쓸모 있는 도구로군.

‘다신 그녀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페이자쉬.’

-왜, 군왕 노릇이라도 하고 싶나?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성소 내부로 들어섰다. 외부의 사태와 전혀 관계 없다는 듯이 성소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따사로운 햇살이 푸른 초원을 내리 쪼이고 있었다. 상쾌한 향기를 품고 있는 자욱한 마력이 태양을 중심으로 부드럽게 몰려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의를 갖춰 입은 시비들이 성소의 중심을 향해 기도하며 무릎 꿇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 엘프 사내가 수인을 짚어내고 있었다.

‘서펜트킹···?’

그 정도 되는 존재라면 분명 물리적인 형상에서 자유로울 수야 있었지만···. 그가 가진 분위기와 형태가 무언가,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비전 시야가 날뛰며, 그의 몸을 조명했다. 압도적인 영성과 존재감에 흐려진 시계가 점차 익숙해지자, 곧 진실이 보였다.

-허, 이거 설마?

‘그 설마가 맞는 것 같군.’

-저벅.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의식에 집중하고 있는 서펜트킹에게 다가섰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그의 핏줄 안에서 꿈틀거렸다.

“···좋지 않은 순간에 찾아 왔구나. 여는 분주하다.”

“저는 당신의 요구를 이행했습니다. 제가 얻을 보상은 준비 되었는지요?”

“아,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더냐? 물론이다.”

가이메른은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도 이따금씩 그의 눈가와 입술이 경련하고 있었다.

기묘한, 기이한 비틀림이 그의 얼굴에 비쳤다.

-쿵. 쿵. 쿵.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역겨움과 분노로 심장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이메른은 그 모습에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먼 서쪽에서 너희 인간들의 나라가 벌이는 전쟁. 그 틈바구니 안에 있구나. 그녀에겐 아직 먼 일일지라도, 그녀의 삶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도다. 이에 여는 추측했노라. 과연 그녀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할지.”

서부의 전쟁. 레바인테르 제국과 키라자트 술탄국의 백 년 전쟁을 의미할 것이다. 아직 이 시기라면 서부 전쟁은 ‘오십 년 전쟁’이라 불리고 있겠지.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베이타서스의 사제다. 그런 네가 ‘태어날 때부터 영성을 지닌 존재’를 찾는다면, 은유가 다소 노골적이더구나.”

가이메른의 눈에서 탐욕이 흘렀다. 신살자. 페르난데스는 전생에 엘핀 서펜트킹들의 별명을 떠올렸다.

문명 사회가 멸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엘핀 서펜트킹들은 자신의 영역에 존재하는 만신전의 소신(小神)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하여 붙은 별명이 신살자라. 신의 영성을 탐하여 위기에 처한 물질 세계에서 종족을 탈출 시키려 했었다.

그들의 시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엘프들은 어느 순간 세계에서 사라졌으므로.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가이메른에겐 신성을 수집할 능력도, 욕망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이 시대 물질 세계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었으니까.

“베이타서스의 신성을 품은 채 태어나는 존재겠더구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존재겠지. 후후. 여는 그리하여 그대에게 포상을 내리고자 함이라. 그대는 여에게 정보를 요청함이 아니라, 오히려 제공하려 하였구나. 자, 원하는 바가 있느냐?”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목젖에 걸려 나오지 않는 말을 간신히 씹어 뱉었다.

“하면 묻겠습니다. 용의 부활을 획책함은, 신성을 탐하였기 때문입니까?”

“후후. 눈치 챘느냐? 과연, 여상한 인간이 아니로구나. 그래, 나는 프란츠리트의 하찮은 계략을 묵인하고 있었다.”

가이메른의 입가에 광기가 걸렸다.

“그렇다. 그대는 그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노라. 여를 위하여 용을 부활시켰고, 프란츠리트의 방해꾼들을 훼방했노라.”

-그렇군. 그런 거였어.

‘아직 아냐. 아직 하나가 더 필요해.’

페이자쉬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프란츠리트의 계획대로 용이 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면, 당연히 가이메른에겐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프란츠리트의 계획을 무너트렸다. 전생과 달라진 점이라면 바로 이 부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페르난데스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가이메른 왕이 가진 분위기, 그 비틀림에 무언가가 있다. 페르난데스는 힘겹게 말했다.

“가이메른 대왕. 그건 누구의 몸입니까.”

“···후후. 후후후. 과연. 과연 즐겁구나. 그대와 대화함은 여에게 큰 유희가 되었다. 정녕 인간이 맞느냐? 그대의 사고는 여에게 크게 뒤쳐지지 않는구나. 훌륭하다.”

가이메른의 눈빛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그는 페르난데스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가치는 여기까지였다.

가이메른이 그리고 있는 체스판 위에서, 페르난데스라는 기물은 더 이상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나의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 아이나드의 것이다. 인간 이단심문관이여.”

가이메른은 그리 말하며, 수인을 마저 짚었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그의 수인을 읽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마법의 구현을 파악하는 마법사로서의 본능.

-스르릉.

그러나 페르난데스의 이성은 대검의 칼자루를 쥐고 뽑아 올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 페르난데스.

‘그래. 페이자쉬.’

그 기이한 비틀림. 육신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페이스리스나, 그와 같은 기생 종족들은 이따금씩 저런 모습을 보이곤 한다.

본능은 차갑게 가라앉고, 이성은 뜨겁게 타올랐다.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전력을 분석하고, 자신의 전력과 대조하며, 자신의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이메른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아들아. 내 불쌍한 아이야.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았다.

네 비명이 여전히 내 귓가에 선하거늘. 너와 나는 육십 년을 등지고 있다.

네가 태어난 날을 기억한다. 네가 나의 품에서 식어가는 순간조차도.

-오로지 후회 뿐이었지.

페르난데스는 감긴 눈을 떴다. 그는 상처 받은 짐승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도하시오. 가이메른 왕.”

“무어라?”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간절히.”

페르난데스가 그리고 있는 체스판에서, 가이메른이라는 기물 또한 더 이상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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