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군왕의 황혼 (2)
*
“···여의 앞에서 칼을 뽑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알고 있느냐?”
가이메른은 페르난데스의 자세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누가 보아도 위협적이지 않은, 상처 입은 몸. 설령 베레일데 마법 학파를 정복했다 하더라도, 놈의 몸엔 남은 마력이 없었다.
놈이 디모니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도살자’들이란 별명을 가진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저런 나약한 몸에서 나올 수 있는 한계는 명백한 바!
-탓!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을 향해 달렸다. 대검을 쥐고 뛰는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속이었다. 그러나, 가이메른은 엘프였다. 엘프는 찰나의 검격으로 승부를 내는 종족이다!
-카드득!
아무것도 없는 가이메른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고, 칼날이 솟아 올랐다. 이 정도 저급 술수는 숨 쉬는 것보다 간단했다.
페르난데스와 가이메른의 검이 맞부딪쳐 서로의 칼날을 긁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가이메른의 지척에서 불타고 있었다.
-카드드득!
잠시간의 힘의 길항, 페르난데스가 크게 칼을 떨치며 뒤로 물러설 때, 그의 칼날은 이미 군데군데 파먹힌 흔적으로 가득했다.
풀 세인트메탈은 내구도에 치중된 금속은 아니었다. 축복 받은 강철. 악마를 사냥하는 것에 방점을 둔 검이었다.
-캉!
가이메른의 검이 번쩍이며 빛을 흐트러트렸다. 물결치듯, 파도처럼. 거대한 압박감이 페르난데스의 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받아 칠 수 있다. 아직 받아낼 수 있다!
가이메른은 지금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건 그가 이전까지 준비하고 있던 의식 때문이었을 터. 지금이 가이메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가이메른의 약점은—
-캉! 캉! 캉!
페르난데스는 정신없이 가이메른의 공세를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가이메른은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고작 이 정도였더냐? 고작 이 정도로 여에게 대항했느냐? 어린 인간아. 인간 신의 대행자여! 우습고, 비참하구나! 네 꼴을 보아라!”
-캉! 캉!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깨물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가이메른의 검격은 막을 만 했지만, 대검의 길이 차이로도 파고들 수 없는 강격이었다. 엘프 주제에 속도전을 포기하고 힘 겨루기를 선택하다니!
-길군.
‘그래. 최악의 5분이야.’
5분. 계산 상 청동 왕좌의 과부하가 진정될 때까지의 남은 시간. 대검의 날이 점차 뭉그러지고, 부서졌다. 그 전까지 칼날이 버텨줄까.
-캉! 카드드득!
가이메른 왕의 검격이 공세의 방식을 바꾸었다. 페르난데스의 몸을 노리던 공격이, 이젠 명백히 칼날의 균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후후후, 어디까지 버틸 지 두고 보자꾸나. 여는 그대를 죽이진 않으리라!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참 많으니. 그대는 여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것 같구나!”
-카드득!
가이메른의 눈이 흉포하게 빛났다. 그래. 말벗에겐 팔이나 다리가 필요 없다. 가이메른은 입술을 핥으며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향해 칼을 내리그었다.
-콰직!
강렬한 일격이었다. 대검의 자루를 쥔 손이 충격으로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칼날이 내지르는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이제 칼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가이메른은 씩 웃으며 칼을 크게 휘둘러 그었다.
-촤악!
“···?!”
피가 튀었다. 칼날에 얽히는 둔탁한 타격감. 가이메른은 살점을 갈랐음을 직감했고,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커···흑.”
제단을 향해 의식을 펼치던 시비가 어깨부터 가슴까지 깊게 베여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가이메른은 황망히 칼날을 수습했다.
“이, 이런?”
“가이메른 왕. 주위를 잘 살피셨어야지.”
어느새 그들은 제단의 한복판까지 들어가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입술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공세에 너무 신이 나셨어.
“이놈!!”
“나는 한번에 한가지 수로 착수하지 않소. 대왕.”
-촤아아악!
청동 왕좌? 그 또한 그가 가진 수 중 하나에 불과했다. 페르난데스는 다급히 달려드는 가이메른의 칼날을 옆으로 흘려, 또 다른 시비를 베었다.
“그만!! 그만둬라!!”
가이메른 왕의 얼굴에 다급함이 얽혔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칼날을 세웠다. 칼날은 이미 부서지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뛰어난 검술일수록 칼날에 가해지는 부하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격검을 나눈다. 더군다나 롱소드 검술과 달리 투핸디드 검술의 경우,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적의 공세를 흘리는 것에 최적화 되어 있다.
그럼에도 칼날이 상하도록 격렬한 격검을 주고 받았다는 것. 그것은 비단 그가 수세에 몰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촤아아악!
가이메른의 공격이 점점 더 빠르고, 강렬해지고 있었다.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이메른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점점 더 자주, 천장에 매달린 태양을 바라보았다.
한 번. 또 한 번의 공격에 한 명씩. 엘프 시비가 가이메른의 손에 의해 참살되었다. 페르난데스는 교묘히 물러서며 칼날을 크게 돌렸다.
-카드드득!
가이메른의 칼날이 대검의 혈조를 타고 미끄러졌다. 교본을 그대로 그린 것 같은 완벽한 흘리기! 엘프 검술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검술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칼날을 흘려 옆으로 돌려 치며 양손을 교차로 얽었다. 지렛대를 튕기는 감각으로, 그의 손목이 탄력적으로 감겨 들어갔다.
-챙!
비단폭이 바람결에 너울거리듯이, 가이메른의 검신을 타고 페르난데스의 칼이 칼끝으로 가이메른의 턱 밑을 노려 들어갔다.
가이메른은 다급히 칼날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어느새, 제단을 이루던 마법의 절반이 비틀리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마법을 유지하던 시비들이 절반가량 죽어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남은 시비들을 등지고 씩씩거리는 가이메른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 준비 되었다.
‘아,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큭. 웃기는 군.
페르난데스가 투덜거리자 페이자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청동 왕좌가 준비 되었다. 과부하가 진정된 청동 왕좌는 다시 짙푸른 암청색 빛을 내며 반짝였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교차로 쥐고, 가이메른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남은 시비들을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마법은 가이메른이 직접 다스리지 않는 한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정도의 대마법이 파탄 났을 때, 그 백래시가 어디로 향하게 될 지는 뻔했다. 이미 반파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이 기함의 운명은 그 순간에 결정지어질 것이었다.
“이노오옴!!!”
-캉!
가이메른 왕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페르난데스의 공격에 맞서서, 올곧게 직선으로.대검의 칼날을 벼락처럼, 가이메른의 검이 파고들며—
-콰지직!
칼날 사이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고—
-챙그랑!
조각난 대검의 검신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가이메른의 눈빛에서 희망이 번쩍였다. 마침내, 놈의 검이 부서졌다!
‘아 결국 부러졌군.’
페르난데스는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가이메른 왕의 칼날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페이자쉬는 큭큭, 하고 웃었다. 가이메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놈은 희열에 젖어 있었다.
-뭐, 검은 어차피 소모품이니까.
-푸욱!
가이메른의 칼이 페르난데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짧고 격렬한 통각이 한순간 페르난데스의 뇌리를 지졌다. 커흑, 핏물이 목울대를 지나 입술 틈으로 비집어 나왔다.
“후, 후후, 후후후!! 어리석은 놈! 감히 영원왕에게 대적한 이 순간을 후회하거라!”
-콰직!
가이메른은 가학적으로 칼날을 뒤틀어 페르난데스의 몸을 헤집었다. 페르난데스의 폐가 칼날에 얽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호흡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숨 막힌 신음이 페르난데스의 입술에서 흘렀다.
‘그래. 검은 육신처럼. 소모품이지.’
페르난데스는 희미해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들며 가이메른 왕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페르난데스의 손이 천천히 칼자루를 놓쳤다.
그리고 빈 손이, 허공을 수 놓았다.
-촤아악!
가이메른 왕의 칼이 페르난데스의 몸을 빠져나가고, 핏물이 그의 얼굴에 튀어 올랐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허물어지며 무릎을 꿇었다.
페르난데스의 옷 사이로, 성흔이 빛났다.
과중한 백래시로 인해 진탕이 된 장기가 순식간에 제 위치를 찾아가고.
손실된 혈액을 신성이 대신하여 흐르며.
-쿵. 쿵. 쿵.
멎어가던 심장이 다시 묵직한 맥박을 치기 시작할 때.
허공을 휘젓던 페르난데스의 손이 마침내 얽히며. 수인이 완성되었다.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로, 불길한 검은 헤일로가 터져 나오며 불타 올랐다!
“불사!! 베이타서스, 여에게 그대가 어찌! 약조와는, 약조와는 틀리지 않나!!”
가이메른은 황급히 물러서며 페르난데스의 마법에 역주술을 시도했다. 천천히, 성소의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빛이 꺼지기 시작했다.
가이메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선 아니된다. 지금 그가 준비하고 있던 이 의식이 완성되기도 전에, 다른 마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마법의 균형이 어긋나고 있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왕의 얼굴에서 희망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의식을 이루는 마력이 불길에 타오르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미 백래시가 시작되었다. 가이메른의 몸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크흑!”
“나는 단 한 수에 착수하지 않아. 가이메른 왕.”
페르난데스의 감긴 눈이 천천히 열렸다. 이성은 뜨겁게 타오르고, 본능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속에서도 명확하게, 한 수 한 수 정밀하게. 결코 흔들림 없이.
마법사로서 쌓아 올린 경험의 소산. 그의 마법은 그 어떤 순간에도 정교함을 잃지 않은 채. 마치 수백 번 반복했던 익숙한 작업처럼, 가이메른의 의식에 마력 쐐기를 박아 넣었다.
“아들을 죽일 때, 어땠나?”
“···뭐?”
“아들을 제 손으로 장사 지낸 기분이 어땠냐는 말이야. 가이메른 왕. 내가 느꼈던 감정을 너도 느꼈나?”
내 손으로 아들을 죽였던 때처럼. 너의 세계도 그 날 한 번 죽었던가?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이메른은 치욕에 흐트러진 얼굴로 외쳤다.
“여를 조롱할 순 없다. 그 누구도 여를 비웃을 수 없어. 여는 오로지, 오로지 여의 민족을 위해 행했다. 오로지 여의 종족의 안녕을 위해 행했어!”
“그렇다면 네 신의 영성을, 네 그 소중한 동포들과 나누었어야지. 가이메른. 육대평원의 가이메른 대왕!”
페르난데스는 수인을 짚으며 외쳤다.
“내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나? 이 주문, 이 의식을 내가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어? 네 계획을, 오로지 너 홀로 조율하고, 너 홀로 수행했다 생각했나? 저 존재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거라 기대했나!”
천장에 매달린 태양은, 그 자체로도 신성 모독과 같았다. 죽은 신의 마지막 영성을 끌어 모아 자신의 영생을 유지하는 용도로 독점했던 탐욕스러운 왕.
처음 이 성소를 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페르난데스가 가진 비전 시야의 힘이 없다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구조의 주문을 사용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만류귀종? 아니, 차라리 수렴진화에 가까웠다. 종족과 학파가 다르더라도, 원하는 결과가 동일한 이상 그 구조에 유사점은 차고 넘쳤다. 이 주문은 신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였다.
“종교 재판 사법권. 이단 즉결 처형권. 구마용 군이양지권. 교단성사 대리지권. 만신전이 보장하는 위 권한으로 이단재판을 시행하겠다. 가이메른 왕.”
페르난데스는 한 발자국씩 가이메른에게 다가갔다. 백래시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며, 가이메른의 몸이 점차 왜소해졌다. 그는 비틀린 얼굴로 피를 토하며 페르난데스를 올려 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가이메른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가벼웠다. 영혼에 얽힌 죄업이 이다지도 무겁거늘, 그의 육신은 티끌처럼 가볍고, 보잘것없었다.
“너, 너에겐 그런 권리가 없다. 왕을 처벌할 권한이 없다! 이단심문관! 이게 어떤 여파를 만들어낼 지 생각했나? 여가 죽게 된다면 가이메른 왕조는 끝이다! 동북부 해상의 재해권은 흡혈귀가 차지하고, 너희 인류는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페르난데스의 손아귀가 천천히 가이메른 왕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앙상하게 마른 가이메른 왕은 피를 흘리며 몸부림쳤다.
“제 신의 영성을 강탈한 죄. 만신전의 권역을 범한 죄. 신의 권한을 자처한 죄. 그리고, 아비된 자로써 감히 제 아들의 영육을 탐한 죄!”
“사, 살려다오! 여가, 여가 잘못했다. 여가 틀렸다.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이 더 있지 않은가? 그대의 욕망이 보인다. 여는 이루어줄 수 있다!”
천천히 손아귀에 담긴 힘이 더해졌다. 디모니카의 신성이 혈관을 타고 맥동하며, 거목을 맨손으로 으스러트리던 그의 손이 점점 더 강하게 가이메른 왕의 목을 옥죄어갔다.
-콰직.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피고의 죄값은 사형이다.”
-내 욕망은 네가 이루어줄 수 없다.
‘그래. 신도, 악마도 불가능하지.’
짧은 경련 후에, 가이메른 왕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쿠르르릉!
제단에 남이 있던 시비들도, 의식이 실패하며 덮쳐온 백래시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다. 뒤틀린 주문이 마력을 빨아들이며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법진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더 이상 주문 쐐기를 박아 넣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과부하가 시작되었으니까. 용해되는 용광로의 노심처럼, 천장에 매달린 태양이 새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성소의 태양이 저물고 있다.
거대한 진동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왕의 성소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침몰하던 기함은 이 순간,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될 터였다.
“후···.”
피로가 페르난데스의 두 눈가 맺혀 흘렀다. 대마법의 백래시. 격렬한 전투와 동시에 벌어진 마법전.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페르난데스의 체력은 모두 소진되었다.
페르난데스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제 인퍼머르를 매듭지어야 할 때였다.
페르난데스는 성소의 문고리를 잡고, 비틀어 열었다. 그는 평생 안주하며 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