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43화 (44/388)

43. 신이 부활하는 땅, 인퍼머르 (1)

*

-끼이익···.

성소가 붕괴되기 시작하며, 어그러진 경첩으로 인해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르난데스는 힘겹게 문을 밀어 젖혔다.

-오···.

‘···오.’

드물게도,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의 의견이 여러 번 겹치는 날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야말로 분쇄기에 갈린 것 같은 몰골이 된 복도를 바라보았다. 영웅과 신의 전설이 양각된 아름답던 복도는 이제 없다.

“후욱···.”

페르난데스의 옆엔, 상처투성이가 된 멜라이다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엔, 역시 상처투성이가 된 키르하스가 같은 몰골로 헐떡이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 은공! 은공! 빨리 이쪽으로 건너 오세요!!”

키르하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안 그래도 나갈 생각이었다. 가이메른의 시체와 함께 정답게 수장 당할 생각은 없었으니.

페르난데스가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멜라이다의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군. 네가 나온 걸 보니, 폐하께선 승하하셨나?”

“그래.”

“···폐하의 마지막은 어땠나.”

“추했다.”

페르난데스는 망설임 없이 단언했다. 그 말에, 키르하스가 당황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은공! 미쳤어요?’

키르하스의 입모양을 읽으며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멜라이다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스며 나온 피가 천천히 그녀의 정복을 적시고 있었다.

“하아···.”

“날 베지 않나?”

“무엇하러?”

멜라이다는 피로와 슬픔에 찌든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한쪽 남은 눈은 메말라 있었다.

“아이나드, 그 아이가 우리 일족의 마지막 불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막지 못했지. 네가 그걸 해냈구나. 인간 이단심문관.”

“알고 있었나?”

“내 이름은 멜라이다 핀 가이메른이다. 본디 나의 운명 이었을 일을, 내 동생에게 떠넘긴 셈이지.”

멜라이다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라. 우리 일족에게 얽힌 죗값이 죽음이라면. 그리하라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멜라이다는 눈을 감았다. 뿌드득, 선체의 용골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붕괴가 코 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않고, 키르하스와 함께 복도를 떠났다.

‘고맙구나.’

페르난데스의 뒤로, 바람결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

레이아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전신은 흡혈귀의 피로 가득 적셔져 있었다. 눈 앞에서 가이메른의 기함이 붕괴하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기함을 향해 다가갈 수 없었다.

“비켜라!”

-캬아아악!!

뎀드 원, 괴수 한 마리가 또 레이아의 칼날에 조각나 떨어졌다. 전황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바다 밑에서 습격해온 흡혈귀들로 전장엔 유의미한 전선이 형성되지 못했다.

모든 선박은 포위된 채로 괴물과 흡혈귀들에의 도함에 맞서고 있었다. 따라서, 가이메른 왕의 기함으로 향하는 모든 선로는 끊어진 지 오래였다.

레이아가 발이 묶인 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겅.

레이아의 칼날이 달빛에 번쩍일 때마다 한 마리의 괴수가 시체가 되어 어두운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첨벙!

-캬아아아악!!

그리고 한 마리의 괴수가 바다 속에 가라앉을 때 마다, 적어도 세 마리의 괴수와 흡혈귀가 바다 위로 솟아 올랐다.

천천히, 시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흡혈귀들이 펼친 박쥐 구름이 밤하늘의 별빛을 살라먹으며 덮어갔다.

-퍼어엉!!

저 멀리, 엘프 군함 하나가 폭발을 일으키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흡혈귀에게 나포된 군함이 자폭을 택한 탓이다. 그러한 광경이, 제법 오래 전부터 항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끝이구나.’

엘프의 치세는 이제 끝났다. 가이메른 왕의 기함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저 멀리 갑판 위로, 분노한 용이 날뛰는 것이 보였다. 응당 전선에 투입 되었어야 했던 와일드프린스들이 용에 맞서 싸우고, 바다로 떨어져 내렸다.

장렬한 낙화(落花)였다. 떨어져 내린 엘프 군사는 다시는 바다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레이아는 그들이 익사했기를 간절히 바랬다. 바다 밑의 시체들에게 뜯어 먹히며 죽어 가기엔 너무나 귀한 존재들이었으니.

-챙!

레이아의 칼날이 검은 대검에 막혀 튕겨나갔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레이아는 재빨리 몸을 틀어 자세를 다잡으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흑갑을 두른 거인이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투구 아래에서 붉은 눈이 형형히 빛났다. 레이아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선이 무너졌다. 이 군함에 있는 유일한 전선이 그녀였고, 그녀의 활약이 멈추자마자 혼란에 휩싸인 엘프 해군은 쉽사리 흡혈귀들의 도함을 허락하고 있었다.

-챙! 챙!

-막아! 막···아아아악!!!

-캬아아악!

함선 전역에서 비명소리와 격검의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레이아는 입술을 깨물며 거한을 바라보았다. 투구 아래에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건만, 거한은 어쩐지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훌륭한 검세다. 엘프 검사. 그대의 이름은?”

“···레이아 핀 가이메른.”

“왕족이었군. 가히 격이 맞는다. 나는 지기스문트 반 프란츠리트. 송곳대공의 적자요, 프란츠리트의 대장군이다.”

-후우우웅!

흥겹게 말하던 거한은, 어깨 너머로 대검을 들어 올려 얹었다. 복부를 완전히 드러낸 자세로, 그는 오만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 너를 참해 프란츠리트의 군율을 보이겠다.”

“···어처구니가 없군.”

레이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와일드프린스. 왕의 기수들. 그 중 가장 강한 검사를 따지자면, 물론 멜라이다다. 그러나 실전으로 생사결을 벌인다면 과연 누가 이기게 될까.

레이아는 항상 궁금했다. 자신의 경지가 과연 멜라이다의 밑일까? 그녀는 대륙을 향한 왕의 눈이요, 왕의 의지였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검.

하프 엘프. 내륙을 밟을 수 있는 엘프로써 쌓아 올린 오랜 경험으로 감히 추측해보건데. 자신은 결코 멜라이다의 밑이 아니었다.

-철컥.

레이아는 칼날을 검집에 납도했다. 바닥에 몸을 도사리며, 그녀의 양손이 소드벨트에 닿았다. 칼자루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누르며, 그녀의 눈이 반쯤 감겼다.

그녀의 허리에 묶인 세 자루의 칼이, 떨리듯 울렸다.

*

아벨레사스의 거체는 그 자체로도 폭력이었다. 그녀의 생전, 그러니까 기사왕 다인의 시절에도 그녀가 날뛰면 왕국 대의회의 여덟 기사를 제외하곤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벨레사스는 다소 미안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연신 선체의 밑으로 향하는 통로를 힐끗거렸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정말?’

아벨레사스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엘프 해군을 갑판 위에서 밀어내며 고민했다. 엘프들의 피해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반면 흡혈귀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해상 최강이라는 엘프 해군들은 과연 이런 와중에도 제법 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함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와일드프린스가 그녀를 막아내기 위해 나선 이상 엘프의 승기가 너무나 희미했다.

‘누가 이기는 편이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지금 물질 세계의 정세나, 정치 구조에 대해 거의 완벽히 무지한 아벨레사스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달가운 것인지, 위험한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쿠우웅!

또 한 명의 엘프가 날았다. 그녀의 비늘 덮인 근육에서 점차 처음과 같은 힘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구성한 마력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그렇게 넉넉한 시간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흡혈귀들은 그저 그녀가 가이메른의 기함을 파괴하고 기능을 정지하길 바랬고, 가이메른은 그저 그녀가 자신의 기함까지 당도할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저 잠시, 길어도 반나절이 되기 전이면 그녀의 육신은 흩어질 것이었다. 설령 페르난데스가 자신에게서 마력을 가져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페르난데스.

아벨레사스는 그 이름을 입에 담고 피식 웃었다. 짧지만,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 이천 년이 지난 하늘, 이천 년이 지난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이 정도의 추억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다시 싸늘한 묘비의 세계에서, 먼저 떠난 이들을 영원히 애도하리라. 그 묘비의 이름 중엔 페르난데스의 이름 또한 있을 것이다.

무어라 할까. 아벨레사스는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다. 페르난데스의 비석은, 밤바다가 좋겠다.

놀랍고 새로운, 그래서 오랜만에 그녀의 싸늘하게 식은 심장마저 뛰게 만드는 사건들이었다. 항상 변하는 밤바다처럼. 언제나 아름다운 이 바다의 풍경처럼.

“그만!”

기함의 왕성 입구에서,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페르난데스는 아벨레사스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벨레사스는 웃었다. 성공할 것을 믿었지만, 직접 보니 더 없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 가이메른 왕을 홀로 대적하고 살아 돌아오다니.

[왔느냐?]

“이 정도면 충분하오. 아벨레사스.”

[만족스러운 결말이더냐?]

페르난데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아래, 밤바다에 어지러이 흩어진 엘프 군함과 흡혈귀의 군세를 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결말은 아니지만. 만족스럽긴 하지.”

[그거면 되었다.]

가이메른 왕조의 엘프는 이제 해상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프란츠리트는 흡혈귀이니, 적어도 낮 동안은 인간 세상을 침략할 수 없다. 그러니, 이 항구의 절반은 인간의 손에 돌아왔다고 봐야겠지. 아벨레사스는 이 결말에도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었다.

아벨레사스의 검붉은 비늘이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아직 급격하게 붕괴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그녀가 수육했을 때의 활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녀에게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페르난데스의 시선을 바라보며 아벨레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이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대는 만족하시오?”

[아무렴. 페르난데스.]

아벨레사스가 큰 숨을 들이켰다.

[이 공기를 맛보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 아느냐? 그리고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기를···. 게다가 그게 너와, 어린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웃으며 눈을 감겠다.]

내가 죽었던 그 순간처럼. 난 항상 웃으며 눈을 감는단다. 아벨레사스의 파란 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아직 만족하지 마시오. 혹시 사막이라고 들어 보았소?”

[지평선 너머까지 모래로 덮인 곳 말이냐? 들어는 보았지. 그런 곳이 있다고는 하더구나.]

“그곳에서 바라보는 별들은, 붉고, 파랗고, 노랗게 반짝이지. 혹은 정글이라는 곳은 아시오?”

[온통 나무와 숲으로 가득 찬 따듯한 곳이라지. 나름대로 즐거운 곳이겠구나.]

“아쉽지는 않으시오?”

페르난데스의 말에, 아벨레사스는 처연하게 웃었다.

[잔인하구나. 페르난데스.]

“나는 아쉽소. 그대는 충분히 희생했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절뚝이며 아벨레사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희생은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충분히 희생한 이의 결말이 슬프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렇다면 그 또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처럼.

-이건 자기위로에 불과하다.

‘나도 알아. 감정 이입이 과했지.’

아벨레사스와 그의 입장은 분명히 달랐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쌓아 올린 악업에 삼켜져 후회하는 악당에 불과했다. 반면 아벨레사스는, 고귀한 이상과 자비심을 가진 선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의 행적을 동경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천 번을 더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그녀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그녀처럼 고결하게, 그녀처럼 올곧게는 살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 이 강대한 용이 나의 수족이 된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들을.’

-···.

이 또한 일종의 자기변론에 불과할 것이다. 페이자쉬가 보기에 페르난데스는 피로와 고통에 젖어 과하게 감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은 육신이 있는 존재에게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

페이자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아벨레사스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 풍경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소.”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페르난데스는 아벨레사스의 시무룩한 말에 미소 지었다.

“마법 '같은' 일은 없소.”

아벨레사스의 상처 받은 눈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놀리듯 말했다.

“여기엔 마법사만 있지.”

아벨레사스는 페르난데스의 품에서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것,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것’이냐?]

“맞소. 가이메른 왕이 그대를 필요로 한 이유였지.”

용의 육신은 신성을 담을 수 있고, 용의 영혼은 신성을 띄고 있다. 비록 지금 지옥 마력으로 이루어져 천천히 흩어져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본질은 용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엘프 신이 남긴 마지막 흔적을 쥐고 웃었다.

-두근.

흘수선의 밑, 저 먼 심해에서 ‘신을 부활시키는 주문’이 맥동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