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44화 (45/388)

44. 신이 부활하는 땅, 인퍼머르 (2)

*

-후우우웅.

페르난데스는 피로와 통증에 흐려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으며, 바스라지는 아벨레사스의 비늘에 손을 얹었다. 그의 품 속에 있는 신의 잔재가 두근거렸다.

가능할 것을 믿는다. 가능하리라 믿는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수인을 짚으며 되뇌었다. 청동 왕좌의 회로는 한계에 가깝게 혹사당한 끝에, 단 한 줄의 마력을 잇는 것도 벅찼다.

오로지 한 번의 기회. 두 번의 시도는 불가능했다. 마력이든, 체력이든, 상황이든. 모든 지표는 최악을 그리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의 유해를 취하고 대피하자. 페이자쉬의 목소리인지, 그 자신의 생존본능이 속삭이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청각은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육신은 소모품이야.’

전생과 달리, 지금 그에겐 죽음의 위협이 없었다. 피로와 고통은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두근.

맥동하는 것은 그의 심장이 아니면, 저 아래에서 가이메른이 만들었던 대주문의 잔재일 것이다. 떨리는 손이, 허공에 수를 놓는다. 한 획, 다시. 한 획.

수인이 만들어지며, 그의 머리 뒤로 검은 헤일로가 타 들어간다. 꺼질 듯이, 희미하게 명멸하며. 천천히. 그 의미는 [치환]. 기초 마도학 이론에서, 마력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시동어.

망아 상태에 빠진 채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경험. 그의 본능이 스스로 마법을 자아낸다. 떨리는 손으로, 멈춤 없이.

-화르륵.

헤일로가 내뿜는 그림자가 더욱 넓어지며, 완연한 왕관의 형상을 띄었다. 페르타스. 전생에서 그가 마법을 쓸 때 불리던 이명이 있었다. 가시왕관의 페르타스.

내 오랜 친구. 페르난데스는 그 순간에 우습게도, 다시 태어난다면 그를 이끌 수 있을지 생각했다. 우정이 깊은 사이라 할 순 없었지만. 오히려 서로를 적대한 세월이 더 길었지만.

이번 삶은 다르리라. 그래. 구원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들의 구원을 바라보며, 나 또한 구원 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아들아. 만약에 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숨을 쉰다면. 또 다시, 만약에 네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실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만일 네 삶이 충만해질 수 있다면. 전생과 달리, 전장과 죽음 뿐인 세계 말고, 보다 나은 세계를 네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내 두 발을 지옥에 담그고, 웃으며 걸어갈 수 있다.

페르난데스의 떨리는 손이 두 번째 수인을 짚었다. [구축]. 멈춤 없이 다시 한 번. [고리]. 또, 한 번. [신].

우로보로스. 자신의 꼬리를 집어 삼키려 들던 우둔한 전설 속 용. 페르난데스의 마법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전설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떨리며, 멈췄다. 마침내 힘이 다했다. 페르난데스의 몸이 휘청이고,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흐려져가는 시야 속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나 그의 상처 덮인 거친 손을 감싸 쥐었다. 허공을 수 놓던 손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얽혔다. 그 차가운 촉감에 페르난데스의 청각이 순간 깨어났다.

[너는 그저 이끌거라. 내가 따르리라.]

허물어져가는 청동 왕좌의 회로에 새로운 마력이 스며들었다. 페르난데스의 손이 마침내 마지막 획을 그었다. [나침반]. 전설을 넘어 신화로 향하는, 그리하여 신의 되살릴 나침반이다.

*

가이메른의 기함. 바다 위를 떠 다니던 엘프 왕의 궁궐. 지금 그 반 이상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본디 있던 흘수선의 저 아래. 선체의 심처에 위치한 성소에서 빛이 흘러 나왔다.

엘프 왕이 이천 년간 준비한 대주문. 그의 모든 심력과 마력을 살라 먹던 의식은 파괴되어 불타오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박아 넣은 주문 쐐기들이 마법진을 검게 물들이며 타 들어갔다.

[치환] [구축] [고리] [신] [나침반]

다섯 수의 수인이 만들어낸 마법에 주문 쐐기가 반응하며, 마침내 거대한 마법진이 완전히 타오르고—

우로보로스의 형상이 바닥을 맴돌며 터져 나갔다.

*

드라마틱한 변화나, 소리. 또는 빛 같은 것은 없었다. 반쯤 뜬 눈이 완전히 풀린 채로, 페르난데스는 고요히 서 있었다.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의 몸을 날개로 감싸고 있던 아벨레사스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몸 안에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성공했구나. 정말. 아벨레사스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허물어지는 페르난데스를 느꼈다. 그녀의 차가운 뼈가 이제 소년의 뜨거운 육신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작고 연약한 생명체에게 어떻게 그런 의지가, 그런 힘이 있었던 것일까. 아벨레사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그들은 그 약하고 조그마한 육신으로 언제나 기적을 만들어냈다.

[편히 쉬어라. 페르난데스. 네 뒤는 내가 맡겠다.]

엘프 신의 잔재? 아니, 이건 잔재가 아니었다. 약하고, 바스러졌다 하더라도 이건 엘프들이 한때 섬기던 신 그 자체였다. 자애의 여신 ‘멜리실두르’. 세계수를 수호하던 운명의 세 여신 중 하나.

천상 전쟁 당시, 아벨레사스 또한 알고 지내던 신들 중 하나였다. 인간들을 적대하지 않던 보기 드문 이종족 신이었으니까.

부드러운 섬광이 갑판 위를 새하얗게 덧칠해갔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기울어진 갑판을 중심으로 인퍼머르의 항만을 가득 채워갔다.

-쿠르르릉···.

진동이 가이메른의 기함을 중심으로 터져 나갔다. 흡혈귀, 엘프, 그리고 항만의 전투를 지켜보던 인간들까지도, 신의 강림에 몸을 떨며 몸을 조아렸다.

적게는 만신전이 봉문한 이후 30년. 크게는 엘프들의 신이 자취를 감춘 지 2천 년. 천상 전쟁 이래로 무감각하게 식어간 엘프들의 신앙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아벨레사스는 자신의 눈 앞으로 다가오는 존재를 느꼈다. 따듯하고 포근한 영성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안녕, 멜리실두르. 내 오랜 친구.]

[반갑구나. 아벨레사스. 내 친구.]

[우스운 상황이야. 그렇지? 죽은 두 존재가 물질 세계에서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것 말야.]

그녀의 말에, 멜리실두르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내 친구, 아벨레사스. 잠시 몸을 빌려 주겠니? 나의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기꺼이.]

사그라드는 아벨레사스처럼, 멜리실두르 또한 존재의 죽음에 더 없이 가까워져 있었다. 신화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부서진 영성을 지닌 채로 이 황량한 물질 세계에서 살아남기엔, 2천 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아벨레사스의 눈이 뜨였다. 그녀의 눈은 녹색 섬광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멜리실두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넓게, 항구의 모든 이들의 귓가에.

[나의 아이들아. 나는 너희의 어미이며, 또한 너희의 빛이었다.]

*

엘프 검술의 경지는 한 합의 겨룸에 따라 정해진다. 레이아는 그 말이 싫었다. 한 합에 쓰러트릴 수 없다면? 적의 갑옷이 두텁거나, 적의 방비가 단단하다면?

한 번에 할 수 없다면 두 번을, 두 번이 부족하다면 세 번을. 하여 레이아는 언제나 세 자루의 검을 쥐고 있었다.

-챙!

레이아의 칼날이 지기스문트의 대검에 막혀 튕겼다. 그 강력한 기세에 지기스문트 또한 대검을 뒤로 물리며 충격을 흘렸다. 한 번이 모자라다면 두 번을.

-철컹!

레이아는 그대로 칼을 놓고, 순식간에 다른 칼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장검의 칼자루를 살짝 누르고, 거의 동시에 칼날이 검집에서 쏘아져 나갔다.

-챙!!

지기스문트는 대처할 틈도 없이 가슴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의 흉갑이 거칠게 긁히며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아직 피륙의 상처는 없었다.

“이, 계집이!!”

분노한 지기스문트가 대검을 크게 들어올릴 때, 레이아는 다시금 손에 쥔 칼을 놓았다. 그녀의 손이 소드벨트에 걸린 마지막 장검에 닿았다. 두 번으로 부족하다면 세 번을.

-후우웅!

지기스문트의 대검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대검이 그녀의 정수리로 꽂히며, 그 중압이 레이아를 짓눌렀다.

레이아는 피하지 않았다. 지금이 승부의 순간이다. 그녀의 마지막 장검. 칼자루에 얽힌 손에 힘이 들어가며, 칼집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피로 물든 정복이 펄럭이며 허공을 나부꼈다.

-스겅.

소리는 없었다. 단지 촉감만 있었을 뿐. 칼날의 궤적이 지기스문트의 양 팔과, 드러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고, 그대로 다시 칼집 안으로 들어갔다.

-스르륵. 탁.

레이아는 깊은 숨을 내쉬며, 칼날을 납도했다. 그와 동시에—

-콰드득.

지기스문트의 몸이 가로로 갈라지며 갑판 위에 흩어졌다. 둔중한 전신 갑주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갑판 위를 굴렀다.

지기스문트의 죽음은 전황을 바꿀 수 없다. 레이아는 어느새 기어 올라오는 괴수들을 바라보며 으스러지도록 칼자루를 쥐었다. 손목이 뻐근하고, 손바닥에선 피가 흘렀다. 한계에 닿은 육신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물러설 순 없다. 레이아는 입술을 깨물며 다음 괴수를 향해 칼을 뻗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미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이야 내륙으로 도주해서 삶을 도모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가이메른 왕조의 엘프들은?

내 백성들은? 레이아에겐 왕실의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이들의 귀감이 되어야 했다. 설령 옥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항상 당당하게.

-쿠르르릉.

한 순간, 해상의 모든 전투가 멎었다. 이 바다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춘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어느새 하늘을 가득 덮은 두꺼운 구름이 달빛 마저 가려낸 이 밤 하늘 위로. 신이 내려온다면 당연히 하늘 위에서 올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진동은 가이메른의 기함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진동이 마침내 인퍼머르를 모두 뒤흔든 직후, 레이아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들의 신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신의 존재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엘프도, 흡혈귀도. 신의 존재를 느끼며 경외심을 담아 바다 한 가운데에서 가라앉는 궁궐을 바라보았다.

갑판 위에선 신성한 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눈이 부신 한낮의 태양이 아닌, 떠오르는 여명처럼 포근한 어스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레이아의 뺨에서 눈물이 흘렀다. 신이 돌아왔다. 모든 엘프들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얼마나 이 순간을 그려 왔던가. 지난 이천 년간 그들은 부모 잃은 고아들이었고, 집을 잃은 유목민들이었다.

[나의 아이들아.]

신의 옥음이 울렸다.

[나는 너희의 어미이며, 또한 너희의 빛이었다.]

레이아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피로한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의 귓가에, 그녀의 곁에, 그녀의 영혼에 신이 함께 하고 있었다.

[레이아. 가이메른의 딸. 나는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아아.’

그녀의 신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하고 있었다! 저 거칠고 황량한, 메마른 내륙에 저 홀로 방황할 때에도, 그녀의 신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아는 벅찬 숨을 내쉬었다.

[나의 아이들. 너의 백성들을 구하라. 이는 네 핏줄에 얽힌 죗값에 대한 나의 형벌이다.]

‘···?’

폐하는, 그리고 오라버니는? 레이아가 고개를 들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죽음은 가이메른의 죄악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업에 묻혔다. 이제, 너의 백성들에게 어버이는 오로지 네가 되어야 하리라.]

‘하지만 여신이시여, 저는. 저는···. 저에겐 힘이 없습니다. 적들을 이기어 내고, 피 흘리는 백성들을 구원할 힘이 없나이다.’

[너의 여신이 너에게 임하였으니, 네 치세의 근거가 부족하더냐?]

‘하지만 저 악적들은. 심해의 아귀들은 어찌 하오리까?’

[너는 그저 간구하라. 빛이 부족하다면, 너의 여신이 너희의 빛이 되어 주리라.]

세계수를 밝히던 고대의 여명. 모든 삿된 것들을 정화하는 가장 순수한 힘. 이 시대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화 시대의 빛에 순간 항구가 삼켜지고—

세계가 그 순간 멈춘 것처럼 보였다.

“멜리실두르의 여명···.”

레이아는 몸을 떨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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