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작전 보고서 : 쥐 잡이
*
-그워어어억!!!
한 여름에 사탕이 녹는 것처럼, 바람에 잿더미가 쓸려 나가듯이. 밤바다와 항만, 그리고 항구의 골목에서 날뛰던 흡혈귀와 시체들이 사그라들었다.
한 여름 밤의 악몽처럼 찾아왔던 흡혈귀들은, 동녘에 깨어나 잊혀지는 꿈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천상의 신들이 직접 물질 세계에 임하고, 고대의 악마들이 이에 대적하던 시절. 대륙이 아직 엘프와 드워프의 땅이던 시절의 빛이 지금 다시금 물질 세계에 도래했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수는 없어!!!”
릭터는 녹아 내리는 피부를 수습하며 가이메른의 기함을 향해 고함쳤다. 천 년을 살아온 흡혈귀. 그 업의 깊이가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혈액은 생명의 화폐다. 흡혈귀들의 힘은 곧 그가 취한 혈액의 양에 정비례한다. 천상 전쟁 이후 탄생한 흡혈귀들 중 가장 오래된 흡혈귀에 속하는 릭터는, 태양 아래를 거닐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함대는 그렇지 못했다. 프란츠리트의 해상 전력이 바다 위에서 한 순간에 흩어지고 있었다. 혈족의 결합이 깨어지는 순간에, 릭터는 마침내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느꼈다.
“지기스문트! 필릭스! 헤이든!! 누구든! 돌아와라! 안돼! 안 된다. 이 쓰레기들아!!”
릭터의 눈에서 피가 흘렀다. 새하얀 곱슬 머리가 분노에 치솟아 너울졌다. 그는 건틀렛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며 사라져가는 자신의 아들들을 바라보았다.
해저에까지 뻗은 빛에, 바다 아래 잠복하고 있던 그의 군단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혈족의 사슬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돌아오는 거대한 상실감이.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릭터는 부르튼 입술을 깨물며 되뇌었다. 흡혈귀들마저도, 죽음은 공평하게 다가왔다.
-끼이이이익···.
-콰지지직···.
인퍼머르로 향하던 함대가 빛에 휩쓸려 비틀리며 가라앉았다. 싸구려 관을 수장시키는 것처럼, 그의 함대가 심해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리라. 릭터는 침몰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기함을 만지며 생각했다. 다시는,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리라. 프란츠리트의 모든 병력이 지금 이 순간에, 놀라울 만큼 어처구니 없이···.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없다!
릭터의 망토가 펄럭였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가이메른은 결코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올란데의 밀서가 도착하지만 않았다면!
‘밀서···. 사냥개들이 실패했었지.’
룬레이븐 녀석들과 연락이 끊긴 것은 그 직후였다. 그 전까지 이어지던 정기 보고는 언제나 긍정적인 지표만을 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용의 부활이 있었다. 계획보다 다소 이르게. 하지만 어쨌건 대처 가능한 수준의 변수에 불과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가 예상할 수 없던 것이 있다면···.
‘···인간.’
드래곤의 등 뒤에서, 가이메른의 기함을 파괴하던 인간! 릭터의 의심은 그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이올란데의 밀서에서부터, 지금 상황에 이르기까지.
신의 부활을, 그로 인한 함대의 괴멸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동화를 납득할 수는 없었다. [옛날에, 심보 고약한 흡혈귀들이 신의 징벌을 받아 사라진 항구다.] 따위의 우스운 전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은 아니었다.
빛이 사그라든다. 천천히, 장막을 걷어내 듯. 릭터는 어느새 자신의 발치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느끼며, 오로지 자신만이 살아남았을 깨달았다.
그의 눈이 저 멀리, 가이메른의 기함에 닿았다. 거대한 용과, 그 품 안에 기대어 잠든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그를 향해 뛰어가는 수인족 여자까지도.
신의 존재감이 점차 사라지고, 답답하게 짓누르던 빌어먹을 신성이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릭터는 그제야 입을 벌릴 수 있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천상의 대신도 결국 우리의 손에 찢겨 죽었다. 가이메른의 기함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영원왕 가이메른 또한 죽었다는 뜻이겠지. 저 고고한 드래곤조차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릭터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으며 끝까지 갑판 위의 인간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나를 피할 수 없다.”
*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허공에 떠 페르난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또 다시 이 꿈이다.
언제나와 같이, 끔찍한 압박감에 그는 몸을 굳히고 간신히 시선을 맞췄다. 시선을 피하는 것은 이번에도 허락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 마침내 지옥을 내딛었구나.”
“그래. 그랬지.”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난데스는 자신이 지옥을 내딛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래, 지옥을 딛었지.
“지금 나는 만신전의 이단심문관이야. 지옥을 걷는 것이 나의 업이 되었지.”
페르난데스는 자신이 이 따위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이건 일종의 농담이었다. 붉은 안광을 내뿜는 존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큭, 하고 놈이 웃었다. 페르난데스와 함께. 한참 박장대소하던 놈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너는 지옥 마력을 사용했어. 그 순간의 전능감을 맛보았지. 네 영혼의 일부는 이미 그 시절의 향수에 젖어 떨고 있더군.”
“즐겁더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때 그런 힘을 지녔다는 점이 다행스럽더군. 그게 나 여서 다행이야.”
평범한 디모니카였다면? 결코 여기까지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과 기적이 겹쳐 닿았다 하더라도, 이런 결말을 맞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의 구원은 아직 아득히 멀고, 희미하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는 있었다.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의 계획은 결코 한 수에 끝나지 않으니.
“감상적이군. 페르난데스. 나약해졌어.”
어둠이 걷히고, 불타는 세계가 보였다. 뻔한 환각이다. 페르난데스는 익숙한 편안함 마저 느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
-죽여!
-신이시여!!!
레바인테르 제국과 키라자트 술탄국의 백년 전쟁은, 문명 사회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동부 왕국 연합은 이 전쟁에 투입된 병력과 물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사하고 있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수인 대호족들은 저마다 다른 편에 서서 싸우고, 바다의 엘프는 신을 사냥하며, 흡혈귀들은 인류 문명을 살라 먹고 있었다. 악령이 나타나 도시를 집어 삼키고, 인적이 드문 산길과 험지엔 괴수들이 인간을 사냥했다.
세계의 저 멀리, 북해 너머에서 찾아온 약탈자들이 보인다. 칠흑의 에리크. 북부 야만인들을 통합한 대군벌. 놈들은 북부에서 시작해 동부와 서부를 가리지 않고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백년 전쟁으로 소비된 문명 사회는 그들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서부 대황야 너머에서 시작된 불길은 어떨까. 페르난데스의 눈 앞에 펼쳐진 세계 지도는 황야 너머에서 몰아치는 불길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왕(馬王) 카라드스카르. 오천 대(大)게르의 칸, 르위웨인가르의 지도자. 서부 대황야의 부족 국가들과 키라자트 술탄국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아세아스 고위 의회에 닿을 때까지. 그들의 진로에 있던 모든 도시와 왕국은 불타 사라졌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찢고, 다섯 개의 손이 나타났다.
여제 사다르켈리사, 악몽의 뭄토, 해충왕 우르카시아, 일곱 왕관의 예카세트. 그리고 진홍대공 타이반에 이르기까지. 다섯 대악마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수백 수천의 이단 종파들이 이 모든 사건의 뒤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마침내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힘을 다할 때까지. 그들은 그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강대한 인류의 문명은 그로써 저 스스로 허물어졌다.
대전쟁의 시대다. 인류의 멸망은 자기자신을 향한 칼날에 의해 시작되었고, 끝을 맺었다. [진홍 첨탑]. 페이자쉬가 말년에 축조했던 그의 요새에서, 마지막 ‘순수한 인간’이 죽으며.
“너희의 파멸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네놈 하나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설령 네게 지금의 수 배의 시간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고맙군.”
페르난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불에 타며 재를 날리는 지도를 꽉 쥐고 구겼다. 열기가 그의 손아귀에서 맥동했다.
“내 계획을 정리해줘서 고마워. 페이자쉬.”
더 이상 악몽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불길로 뒤덮인 세상에서, 붉은 안광이 그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
레이아는 갑판 위에 앉아, 바다 아래로 드리워진 로프들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흡혈귀의 전멸이 확실하게 된 지금, 바다 아래에서 엘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이 인퍼머르 근해에는 없었지만.
-촤아아악!
곧, 바다가 갈라지며 잠수복을 입고 있던 엘프가 갑판 위로 올라와 물을 토했다. 그는 힘겹게 머리를 흔들며 귀를 털었다.
“어떠냐, 찾았느냐? 무어라도 있더냐?”
“네, 폐하!”
엘프는 연신 기침하며, 허리춤의 배낭에서 조그마한 나무 조각을 꺼내 들었다. 검은 광택이 도는 나무 모형이었다. 레이아는 가이메른 왕의 기함을 본뜬 그 모형을 손에 쥐고 기도했다.
‘여신이시여, 당신의 백성이 따르겠습니다.”
여신이 웃음 짓는 소리를 들었다. 레이아는 그 충만함에 잠시 몸을 떨었다.
-촤아아악!
곧, 잔잔한 해수면이 갈라지며 엘프 잠수부들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능숙하게 갈고리를 걸며 갑판 위로 타고 올랐다.
-쏴아아!
그들이 끌고 온 그물에서, 생선과 진흙 따위가 흩어지며 바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곧, 그물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거대한, 나무 판자였다. 평범한 목판이 아니다. 이 물질 세계에서 오로지 가이메른 대왕만이 소유하였던 것이었으니.
‘가이메른 왕의 해도’
놀랍도록 정밀하게, 오로지 엘프들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제작된 해도였다. 엘프가 아닌 인간들의 눈에는 거대한 추상화처럼 보일 것이다. 레이아는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빠졌다.
우리의 여신께선 이제 더 이상 옥음을 들려주실 수 없으시다. 멜리실두르는 그날 이후 단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의사도 표현하지 않았다.
[나의 아이들아. 너희는 너희의 임금이 감히 묶어 두고 있는 나의 자매들을 구하라. 그리하여 마침내 너희는 역사를 얻으리라.]
따라서 여신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내린 말이 엘프들을 향한 여신의 유일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 전쟁 이래로 신을 지닌 최초의 엘프들, 레이아의 백성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들의 여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여신께선 남해의 말레이른 왕조, 서해의 제르올렌 왕조. 저들 두 서펜트킹이 감히 여신을 가두고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가이메른 또한 그와 같은 죄악의 업으로 천벌을 받았노라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레이아는 팔걸이가 으스러지게 꽉 쥐었다. 그들 종족 전체가 영원히 유랑하며 이천 년간 받았던 고통과 설움이 가슴에서 터질 듯이 맥박 쳤다.
“폐하, 이단심문관이 깨어났습니다.”
“오, 그래. 내 곧 찾아가 보겠노라.”
이 모든 사건들을 파헤치고, 그들의 여신을 다시금 그들의 품으로 인도한 인간. 레이아는 그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래, 적절한 포상이 필요할 것이다.
*
언제나처럼,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기 전에 몸 상태를 확인했다. 무장은 없고, 옷은 편하고, 등 뒤의 촉감은···. 침대 같기는 한데···.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사르륵.
누군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섬세한 손가락이 그의 이마와 눈썹을 쓰다듬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느냐?”
사금 같은 금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페르난데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턱선이나, 새하얀 미소가 아니었다. 푸르른, 자애로움과 장난기를 동시에 가진 그녀의 눈동자였다.
“아벨레사스···.”
“후후, 잠투정이 심하더구나.”
“그대였소?”
페르난데스의 말에 아벨레사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엇이 말이냐?”
“내 손을 잡았던 것이.”
페르난데스가 기억하는 의식의 마지막 순간은, 흐린 시야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멈춘 수인을 받쳐 주던 것이었다. 아벨레사스는 페르난데스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그럼 누군 줄 알았더냐?”
“···고맙소.”
“날 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내게 말하는 게냐? 재미있는 자화자찬이구나.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눈에 시선을 맞추려 노력했다. 누워서 보고 있자니, 그녀의 푸른 드레스가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벨레사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새하얀 목을 들어 올리며, 목에 감겨 있는 검은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느냐?”
“아니라고 말해주시오.”
그렇게 악취미는 없는데···. 페르난데스의 말에, 아벨레사스는 후, 하고 웃었다.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딜 아녀자를 희롱하려 드느냐?”
“···아녀자?”
“상처 받을 얘기는 하지 말자꾸나. 이 못된 녀석.”
그녀의 손이 페르난데스의 팔뚝에 닿았다. 팔뚝에 걸린 주문이 번뜩이더니, 마력으로 짜여진 사슬이 그녀에게 이어졌다. [지배의 술식]. 아벨레사스가 그녀의 진명을 걸고 허락한 통제권이 활성화되며, 페르난데스의 몸에 다시 마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옥 마력이 아니군.”
“···감상이 그것 뿐이냐?”
잠시 페르난데스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벨레사스가,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난 용이고, 저 녀석은 불사가 아닌가.
“이 말도 기억하느냐? ‘너는 이끌거라, 내가 따르리라.’”
“···그렇소.”
“그렇다면 이제 나를 아벨이라 부르···.”
-쾅!!!
아벨레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검은 머리칼이 물결치며 그의 품 안으로 뛰어 들었다.
“흡!”
“은공!!!”
키르하스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그녀의 귀가 페르난데스의 턱을 간질였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턱을 긁는 대신, 그녀의 귀를 눕히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등 뒤로 풍성한 꼬리가 파닥거렸다.
“은공! 은공! 은공!!”
“무례 하구나. 아이야. 그이는 환자다.”
“그이? 은공! 저 여자 누구에요!!!”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나며 아벨레사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갸르릉거렸다.
“저 여자가 은공한테 아는 척하는 이유 아세요? 전 모르는데! 이상하죠? 이상해요! 은공은 계속 저랑 같이 있었는데!”
“계속은 아니지.”
“하루 반나절 말고요! ‘거의’ 계속! 쭉!”
페르난데스는 시끄럽게 떠드는 키르하스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정말 애완동물 키우던 놈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어쨌건 일방적인 호의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전쟁과 전장, 악마와 이단, 흡혈귀나 엘프. 이런 문제가 잠시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안정감과 기분 전환은 중요하지. 아무렴.
-아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감정 교류는 중요한 요인이야. 유대감 형성을 통해 강화된 지배력이 우리의 계획에 어떤 강점이 될 수 있을지 생각···.’
-그만. 변명하는 꼴이 보기 흉하다. 할 일이나 해라.
‘할 일?’
-보고서.
‘···아.’
대체 이걸 어떻게 정리하지.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머리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이걸 사실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
감추기엔 너무 큰 일이었다. 당장에 인퍼머르 항구에 있던 인간들까지 모두 용과, 흡혈귀와, 마법과, 신을 조우한 상태였으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아···.”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해진 컨디션이 거짓말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어느새 피로에 찌든 눈으로 미간을 눌렀다.
*
[작전 보고서 : 쥐 잡이]
작전 지역 : 데인 왕국, 바르베스 남작령 제 2 체크포인트. 항구도시 인퍼머르.
작전 개요 : 상정 외 워커 사태 발생으로 인한 긴급 조사단 파견.
작전 경과 :
1) 체크포인트의 소요 사태는 워커가 아닌, 프란츠리트 흡혈귀의 레드 헝거로 인한 구울 사태였음이 판명.
2) 구울 및 프란츠리트 흡혈귀 처리 과정에서, 인퍼머르에서 이단 사교도가 암약하고 있음을 판명. (붙임 1 : 프란츠리트 밀서.)
3) 엘핀 서펜트킹, 가이메른 왕과 접촉.
4) 인퍼머르 배후에 프란츠리트 혈족과 사교도 [룬레이븐 학파]가 있음을 소명.
5) 인퍼머르 지하의 드래곤을 부활시키려는 정황을 포착 및 저지 시도.
6) 드래곤의 부활을 목격. 드래곤은 가이메른 왕과 상잔.
7) 프란츠리트 혈족의 인퍼머르 침략 정황을 포착 및 저지 시도.
8) 신의 부활 정황을 파악. [고대 엘프 여신 멜리실두르]로 추정.
9) 프란츠리트 혈족은 엘프 신에 의해 섬멸된 것으로 추정.
10) 엘프 신의 추적 시도는 불발됨. 소멸 정황 추정.
11) 가이메른 일족 엘프, 인퍼머르의 지배력을 잃고 세력이 위축됨.
12) 인퍼머르 항구의 재정비 및 정화에 대한 지원 요청 (붙임 2 : 지원 요청서).
작전 테스크포스 팀.
1)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복귀
2) 토치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 복귀
3) 현지조력요원, 아벨 – 포섭 및 동행
악마, 이단, 마녀를 불태우리라.
작전 책임자 :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타다닥.
“씁···.”
베오른은 열세 번째로 전령이 가져온 페르난데스의 보고서를 읽으며 탁상을 두드렸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지. 신? 엘프? 흡혈귀? 드래곤? 이 ‘성자’ 디모니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이 보고서가 사실일 경우, 만에 하나. 그래 만에 하나 이게 모두 진실일 경우. 동북부 재해권을 인류 문명 사회에 복속시켰다는 뜻이 된다. 서펜츠아일스의 프란츠리트 혈족은 이제 날개 잃은 박쥐가 되었고, 엘프 함대는 원항을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이로 인해 안정화된 바닷길은, 메를린포트를 비롯해 동부 삼각무역의 활로를 뚫을 것이다. 식량과 물자가 오고 가는 그림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분명 문명사회의 흥복이다. 분명히···. 베오른은 애써 좋게 생각해보려 해봤다. 나는 헤레티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수도원장이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해.
그러나, 마음속 가득 차오르는 미혹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주여 답을 알려 주소서···.”
베오른은 로사리오를 꺼내 쓰다듬으며 기도했다. 언제나처럼, 신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