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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47화 (48/388)

47. 전쟁을 바라보는 성직자의 자세

*

-타닥, 타다닥.

페르난데스는 수도원장 실에서, 벌써 15분 째 아무 말 없이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베오른은 거의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고쳐 읽은 보고서를 들고 그저 페르난데스를 노려 보고만 있었다.

-타다닥.

베오른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곧 보고서를 내려 놓았다.

“내가 자네에게 처음 했던 명령이 뭐였지?”

“이단을 불태워라···?”

“그 다음.”

“워커 사태 조사 입니다.”

“한번 들어나 보지, 그래. 워커가 아니라 구울이었다라···. 생김새가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보네. 첫 조사가 오류였다고 치세. 프란츠리트···. 프란츠리트 혈족이 바르베스 남작령에 출몰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작전 명령서 하달 당시, 페르난데스는 베오른에게 바르베스 남작령이 프란츠리트의 영역이 아니냐 물었던 적이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제가 지역 지리에 어두워서요.”

“좋네. 프란츠리트 흡혈귀가 하필이면 거기서 레드 헝거를 앓았고, 놈을 죽였고, 그랬더니 놈에게 밀서가 나왔다?”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베오른은 테이블에 밀서를 툭 던졌다. 프란츠리트의 봉인이 박힌, 닭의 피로 쓰인 글귀. 베오른은 밀서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그래서 이 밀서를 서펜트킹에게 전달했고, 이단 조사를 실시했고, 드래곤 부활 의식을 목격했으며, 이 모든 정황의 배후에 프란츠리트가 있었고, 전투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서펜트킹이 드래곤과 함께 죽었고···. 신이 부활했다고?”

“···믿기 어려우실 수 있지만, 보고서 그 대로입니다.”

“···씁.”

베오른은 페르난데스가 복귀하자마자 그를 불러들였다. 대체 이게 다 무슨 개소리인지 알아야만 했다. 페르난데스는 망토에 묻은 흙먼지를 털 틈도 없이 수도원장실에서 때 아닌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신이 부활해서 흡혈귀를 모조리 불태운 뒤에 사라졌고, 엘프 함대는 인퍼머르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원항으로 떠났다고?”

“네.”

“자네는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나?”

페르난데스는 평이하게 대답했다.

“근시일 안에 데인 왕국이 페이른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뭐?”

베오른의 시선이 잠시 페르난데스의 눈동자에 멈췄다. 그는 잠시 침을 삼키곤 되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그게?”

“페이른 왕실은 이단 종파에 오염되었습니다. 설령 제피스 형제님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메를린포트를 비롯해 왕국 전역에 발생한 이단 사건들을 정리하고 민심을 수습하기엔 국력이 과히 쇠락해 있지요.”

백년 전쟁. 아니, 이 시기엔 아직 오십 년 전쟁이다. 레바인테르 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문명 국가들은 지금 카라지트 술탄국과의 전쟁에 병력을 투사하고 있다.

자원 매장지 확보, 노예 공급, 이념 대립, 영토 확장···.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페르난데스의 기억으로, 이 무의미한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그 뒤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 탓이다.

이 기나긴 전쟁에 병력과 물자를 파견하며, 동부 왕국은 천천히 고사하고 있었다. 민심은 문명 사회의 역사상 그 어떤 순간보다 흉흉했고, 산간 지방엔 산적들이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이른 왕실에겐 확실한 적이 필요했다.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치세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다행히도, 페이른 왕실엔 대륙 최강의 전력 중 하나라 불리는 ‘로얄 그리핀 나이츠’가 있었다.

“데인 왕국은 해상 전력이 비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항만이라 할 만한 곳도, 사실 거의 없지요. 이 상황에서 인퍼머르의 엘프, 서펜츠아일스의 흡혈귀가 상잔했다면, 그래서 항로가 열리고 동부 해안선에 다중 무역이 시작된다면. 페이른 왕실에겐 그보다 큰 위협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메를린포트가 몰락한 이 시기에 페이른 왕실에겐 해상 무역을 이어갈 대규모 항만이 반드시 필요했다. 때마침 인퍼머르는 지리상 페이른 왕실의 해상 국경선과 대단히 근접해 있었다.

모든 조건이 맞물렸다. 페이른 왕실은 데인 왕국에 근시일 안에 선전포고를 보낼 것이다. 동부 연합의 두 주축이 맞부딪치며, 이 황폐한 동부 대륙은 전란에 휩싸일 것이다.

“···훌륭하군.”

베오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페르난데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16세. 과하게 어린 나이다. 전장에 나서기에도, 전투를 수행하기에도, 한 사람의 이단심문관이 되기에도.

그러나 그는 첫 임무에 악마를 봉인했고, 두 번째 임무에서 페이른 왕실을 구원했으며, 세 번째 임무에 이르러서는 엘프와 흡혈귀를 밀어내고 동부 왕국의 문명 사회의 영역을 넓혔다.

게다가 지금의 식견은···. 베오른은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명령할 것 같나?”

“이단을 불태우라 하시겠지요.”

문명 사회의 정치는 이단심문관의 영역이 아니다. 그들의 칼날은 오로지 악마와, 그 숭배자들을 향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면, 종교에 대한 권위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있었다.

베오른과 페르난데스의 시선이 잠시 얽혔다. 베오른은 깊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제 2급 이단심문관일세. 권한에 대해서는 마르코 형제가 알려줄 걸세. 그리고 헤레티카 성소에 찾아가 보게나. 이제 자네는 임무를 선택할 수 있네.”

“영광입니다.”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가보게.”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형제여.”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 그의 등 뒤에서 베오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자네. 정치외교 공학에 대해 익숙하더군.”

“제가 귀족 출신인지라···.”

“그리고 지리에도.”

“···칭찬 감사합니다.”

페르난데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문고리를 돌렸다. 그의 등 뒤로 베오른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내 자네를 기쁘게 지켜보고 있겠네. 디모니카 형제.”

“영광입니다.”

-끼이익, 탁.

지리에 익숙하지 못해서 바르베스 남작령의 지배권을 착각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저 정도의 식견을 가진 녀석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베오른은 웃으며 생각했다.

과거 마르코가 설명하기를, 어린 나이에 가질 수 없는 침착함과 노련함이라. 이것이 주의 성흔을 입은 성자라는 말인가. 베오른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끼이익.

낡은 의자가 삐걱거리며 무겁게 돌았다. 그의 시선은 벽에 걸린 대륙 전도에 닿았다. 붉은 인장과 검은 십자검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 거대한 지도였다.

‘주여, 단 20년만 더 빨리 내려주지 그러셨습니까.’

만신전의 봉문 이래 10년은, 아직 안정적인 시기였다. 이단심문청의 요원들은 지금의 세 배는 더 많았고, 발생하는 이단 사태는 지금의 다섯 배는 적었다.

그때 저런 요원이 자신을 보좌했다면. 베오른이 아직 실전에 투입되던 당시에 그의 수족 중 하나에 페르난데스가 있었더라면.

그때였다면 그는 페르난데스를 전력을 다해 키웠을 것이다. 훗날 이단심문청의 들보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웃으며 물러났을 것이다. 어쩌면 훈련교관 따위의 임무를 자청했을 수도 있다.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로사리오의 테두리를 쓰다듬으며 베오른은 기도했다. 너는 의(義)를 구하라. 너는 선(善)을 바라라. 너는 덕(德)을 행하라. 정녕코 그리 했나이다.

지도에 박힌 붉은 인장은 보고된 이단 사건들이고, 검은 문양은 사망한 이단심문관들이다. 마치 피를 흘리는 생살을 억지로 봉합한 형상이다. 베오른의 뇌리에 박힌 대륙 전도는 누더기를 간신히 이어 붙인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너의 천부께서 네게 정(正)을 더하시리라. 베오른은 기도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고서가 쌓인 데스크로 향했다. 그는 펜을 꺼내 들며 보고서를 작성해 내려갔다. 교황청을 향해서.

사람은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베오른으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할 따름이었다.

*

‘와, 저 늙은이 눈빛 봤어?’

-동시대에 활동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군.

‘그러게 말야.’

페르난데스는 수도원 복도를 가로지르며 웃었다. 하여간 어려운 숙제만 던져주는 상관이 따로 없었다.

‘왕실에게 거슬리지 않게 전쟁을 막아라···.’

-이런 섬세한 정치공학을 16살 꼬맹이한테 시키는 것도 제정신은 아니긴 하지.

베오른의 뜻은 그랬다. 동부 왕국이 전화에 휩싸이기 전에, 이단 재판을 핑계 삼아서 전쟁을 불식시켜라. 하지만 각 왕국의 심사를 건드리지는 말아라.

2급 이단심문관의 권한? 수행할 임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그 권한은 핑계에 불과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닥이 잡히지 않으니 알아서 결과를 내오라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로서는 이것이 베테랑 헤레티카 요원이 건네는 함정일지, 정말 그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상관 없었다.

동부 왕국 연합의 전쟁은 이미 이단심문청에 복귀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은···.

‘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잘난 척은.

페르난데스는 헤레티카 성소 입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알렌을 발견하곤 멈춰 섰다. 알렌은 붕대에 팔을 괸 채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 형제님!”

“막토, 어린 형제.”

알렌이 인사하자, 페르난데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막토 수페를라우도. 형제님. 돌아오신 것을 보니 기쁩니다.”

“나 또한 그렇다. 형제. 소문은 들었는데, 믿기진 않아서 말이야.”

“소문이 어떻게 났던가요?”

“자네가 드래곤을 타고 엘프와 흡혈귀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소문까진 들었지.”

“···하하.”

왜 사실인 건데? 페르난데스는 잠시 멈칫했다. 알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을 정도로 바보들은 없어. 하지만 그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일이라서 말이야.”

“저 또한 그렇습니다.”

“어떻게, 칼이라도 섞어볼까 했는데 내가 지금 몸 상태가 이래서.”

알렌이 붕대 감긴 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건 디모니카와는 달리 헤레티카는 아주, 아주 멀쩡하고 정상적인 인간들이다.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모쪼록 정양하시죠. 형제. 저도 지금 볼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헤레티카 성소에?”

“아, 저 이제 형제님이랑 같은 직급입니다?”

“···허.”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소문의 반만 사실이라 해도 특진이 우스운 일이지.

“축하해.”

“형제님에게 가장 먼저 축하를 받아 기쁘군요. 수도원장님께서 제게 임무를 선택하라 하셨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할 필요는 없어. 따라오게.”

알렌은 흔쾌히 앞장서 걸었다. 역시 인맥과 인상은 잘 다지고 봐야 한다니까. 페르난데스는 웃었다. 전생엔 그렇게 못하던 것 중 하나가 ‘좋은 인상’이었는데.

-아냐, 우리 인상 좋았어.

‘개소리 하지 마.’

-이봐, 다른 놈들을 생각해봐 우리 정도면 인상 진짜 좋은 흑마법사에 속한다니까?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는 투닥 거리며 알렌을 따라 걸었다.

*

엔마기카 성소에 있는 [장서고], 디모니카 성소에 있는 [야외 찬송의 전당]처럼, 헤레티카 성소에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구역이 있다.

[기록 보관소]. 전 대륙에 흩어진 헤레티카 요원들과 토치맨들이 보내는 기록물과 정보, 이단 사건에 대한 조사 보고서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 음습하고 퀴퀴한 공간에서, 페르난데스는 동부 왕국에 대한 보고서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은공, 여기 더 가져 왔어요!”

“아, 고마워.”

거의 서고에 몸을 파묻다시피 하며 온몸을 던져 기록물을 뒤지던 키르하스가, 또 다시 보고서 뭉치를 꺼내와 그의 앞에 늘어 놓았다.

-풀썩.

먼지가 크게 일어나며 허공에 비산했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젓고는 보고서를 꺼내 다시 분류를 시작했다. 페이른, 데인, 글로인, 그리켄, 벨두르. 동부 대륙의 왕국 별로 보고서를 늘어 놓던 페르난데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오?”

[조사 보고서 : 카르두스 남작령 폐쇄 은광]

-펄럭.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먼지 덮인 보고서를 들췄다. 폐광 근처에서 실종 사건이 이어지고, 기이한 소문이 돌아 조사했으나, 산적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카르두스···?

‘이거다.’

데인 왕실과 자연스럽게 연을 닿을 수 있는 정답이, 여기에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보고서를 품에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됐나요? 나가도 되나요?”

“그래, 잘 했어. 키르하스.”

키르하스는 먼지 덮인 곳이 싫었던지, 그녀는 나간다는 말에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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