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49화 (50/388)

49. 특수 작전 : 순회 공연

*

“은공, 뭐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몸이 상합니다.”

그로부터 사흘간, 페르난데스는 보관소와 장서고에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페르난데스에게 비스킷을 건넸다.

기록 보관소의 협탁 위에는 수 많은 자료와 서적들이 대중 없이 쌓여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거칠어진 눈가를 쓸어 만지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 아래에서 두꺼운 서류가 이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특수 작전 제안서 : 순회 공연]

페르난데스는 제안서의 표지에 직인을 찍어 넣으며 웃었다. 그는 쪽지와 강조가 잔뜩 붙은 데인 왕국 전도를 곱게 접어 제안서에 붙였다.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가 사흘간 밤을 새워가며 만든 역작이었다.

데인 왕국,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다. 세르너드 남작령은 데인 왕국의 영락한 시골 영지 중 하나였다. 그의 모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나라는, 이제 거대한 연극 무대가 되리라. 주인공과 조력자, 적대자. 조명과 음향, 모든 무대장치와 등장인물들에 대한 각본이 그의 손에 있었다.

페이른과 데인, 이 두 왕국 사이에선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전생에 페이른은 뎀드리자드 교단에 의해 몰락했고, 데인은 미친 노왕의 폭정에 신음하다가 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즉위한 젊은 영웅, 비센테 2세에 의해 간신히 동부 왕국 연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뎀드리자드는 실각했고 페이른을 지배하던 막후의 악마 교단은 제피스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인퍼머르가 데인 왕국의 손에 넘어가게 되며 페이른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정세는 페르난데스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예상한 범위 안에 있었다. 인퍼머르 사건 이후 이단심문청에 복귀하며 페르난데스는 이 전쟁을 막기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와작.

페르난데스는 비스킷을 씹으며 생각했다. 동부 왕국 연합이 무너지면, 레바인테르 제국 혼자만의 힘으로 카자리트 술탄국과의 전쟁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카자리트 술탄국이 전선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 지하엔···.

“네크로폴리스 언더카타콤···.”

페르난데스는 대륙 전도를 떠올렸다. 두 제국 간의 거대한 전쟁이 백여 년이 되도록 진정되지 않은 이유는 놈들의 영향력 탓이었다. 인류 문명의 기반을 뒤틀고 있는 그 전쟁은 반드시 멈춰야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두 제국 중 하나가 언더카타콤이 있는 중부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래서 놈들이 지하에서 풀려나게 된다면. 그 때엔 페르난데스의 힘으로 사태를 막아낼 수 없었다. 레바인테르 제국이 카자리트 술탄국의 병력과 백중세를 이루는 이 상황이 잠시 더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어쨌건, 중부 지역의 전쟁을 당분간 유지하기 위해서 페르난데스는 지금 동부 왕국의 전쟁을 막아야 했다. 이 역설적인 상황에 그는 피식 웃었다. 비스킷을 마저 씹어 삼키고, 그는 제안서를 들고 일어섰다.

*

-툭, 툭.

베오른은 천천히, 글자를 거의 씹어 삼키겠다는 듯이 페르난데스의 제안서를 정독했다. 그는 연신 데인 왕국의 지도를 힐끗거리며 탁자를 두드렸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홍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탁.

마침내, 베오른은 책장을 덮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참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짚고 있었다. 그의 외눈 안경이 두꺼운 검지 손가락에 걸려 대롱거렸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이게 자네의 결론인가?”

“네, 원장님.”

페이른과 데인, 이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질 전쟁을 막기 위해서 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베오른이 던진 이 질문에 대한 페르난데스가 도출해낸 가장 쉽고 빠른 해답은 하나였다.

‘기사왕이 부활하면 된다.’

혹은, 기사왕이 부활했다고 믿게 만들거나. 만신전 교회의 그 어떤 정치적 개입이 없다는 가정 하에, 이 전쟁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웅이었다. 상징적인, 너무나 상징적이어서 다른 왕국들조차 감히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할 그런 영웅.

“허황되고, 장구하네. 알고 있겠지?”

“실패한다면 그렇겠지요.”

“성공하리라 자신하는가?”

“자신하지 않고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겸손은 종교인의 미덕일세.”

“감사합니다.”

페르난데스는 웃었다. 그 미소에 베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이 청년이 무엇으로 성장했을까. 그는 페르난데스의 오만한 미소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위대한 영웅이 되었거나, 끔찍한 재앙이 되었을 청년이다.

“이 작전에, 교단의 지원은 기대하지 말게.”

“오히려 당연히 그래야지요. 교단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하늘 아래 신만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네는 이제 세속 사제일세.”

베오른은 담담하게 말했다.

“교단의 성물을 반납하고, 평사제 신분으로 돌아가게. 공식적으로 이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는 이단심문청의 일원이 아닐세. 신분 증명서는 교황청 인가가 나오는 즉시 새로 만들어 보내주지.”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무운을 비네.”

지금까지는 오직 이단심문청의 사제들과, 교황청의 사제 극소수만이 성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페르난데스가 교단의 광고 선전물로 활동하지 않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그는 교단의 비수로 취급 받았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판단이었다. 페르난데스가 활동한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이루어낸 업적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신께서 가호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베오른은 제안서에 직인을 찍었다.

“장구류 소지를 인가하겠네. 마르테리오 형제를 찾아가 무장을 점검하게.”

“호의에 감사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장님.”

“반드시 살아 돌아오게, 세르너드 경. 자네가 할 일이 많다네.”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신도여.”

페르난데스가 시성 되었다는 것은, 이단심문청의 대외비였다. 이단심문청의 모토는 오직 소문, 오직 실적, 오직 공포였고, 만신전이 봉문된 시대에 나타난 성흔과 성자라는 것은 너무 화려한 칭호였으니까.

페르난데스는 베오른에게 깊게 인사하고 물러섰다. 그가 문고리를 쥐고, 멀어졌다. 끼이익, 탁. 문이 메마른 소리를 내며 닫혔다. 베오른은 페르난데스의 제안서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그는 교황청에 보내려 준비했던 보고서를 꺼내어, 화로에 던졌다.

-화르륵.

불티가 사방에 비산했다. 그는 곧 새 종이를 한 장 꺼내 들었다.

*

“이번에는 얼마나 들고 올 예정인가?”

“적어도 칼자루보단 많이 남겨 오겠습니다.”

페르난데스는 마르테리오의 말에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매번 임무마다 장비를 죄 부수고 돌아오니, 이 나이든 수도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단심문청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소비하는 것이 장비 소모라고.

“그래, 꼭 그러시게.”

마르테리오는 웃으며 장검을 탁자 위에 올렸다. 아무런 문양도 들어가지 않은 수수한 장검이었다. 질 좋은 철을 사용한 검신에 페르난데스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꼭 돌아오라는 말을, 이렇게 매번 장비를 불출 받는 모든 이단심문관들에게 하는 걸까.

“장검과 대검, 그리고 방패였나?”

“사슬 갑옷도 부탁드립니다. 서코트도 한 벌 있으면 좋고, 갬비슨도, 마갑도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편력 기사인가?”

“그게 가장 편하더군요.”

페르난데스는 투척용 단도가 빼곡히 들어 있는 하네스를 들어 몸에 걸쳤다. 그는 자연스럽게 단검을 뽑아 쥐고, 다시 꽂았다. 평생에 그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는 역시 단검이었다.

“아, 그건 아직 완성되지 않았네.”

“이 정도면 충분한데···. 더 뭐가 있습니까?”

“걸쇠가 조금 부실해. 쓰려는 사람이 없어서 수리를 해두지 않았는데, 괜찮겠나?”

“에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르난데스는 불출 대장에 서명을 넣고, 짐을 챙겼다. 병장기의 묵직한 무게감이 든든했다.

*

야외 찬송의 전당엔 디모니카 수도사들과 아벨이 있었다. 디모니카들은 지난번 페르난데스와 아벨의 대련에 크게 감명 받았는지, 연신 그녀에게 도전했고. 아벨은 웃으며 디모니카들과 칼을 주고 받았다.

-챙!

“훌륭하군!”

아벨은 미소 지으며 파비아노의 대검을 공중에서 흘렸다. 파비아노는 익숙하게 대검을 틀어 위로 올려쳤다. 저 큰 칼에 걸린 하중을 오로지 손목 만으로 꺾어 올리다니, 대단한 힘이었다.

-후우웅.

“파비아노 형제는 대단히 숙련된 디모니카지. 어떤가?”

“아, 형제님.”

파비아노와 아벨의 대련을 구경하던 페르난데스의 곁에, 제피스가 나타났다. 제피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법 오래 밤을 설쳤나 보군.”

“디모니카는 사흘 정도까진 잠을 자지 않아도 성능이 유지되더군요.”

“재밌는 표현이군. 성능이라.”

제피스는 피식 웃으며 페르난데스가 들고 있는 짐을 바라보았다.

“임무가 빠르게 배정되었군.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텐데.”

“제가 원래 좀 바쁜 몸 아닙니까. 아, 형제님 가셨던 일은 어떻게···.”

페르난데스는 제피스의 눈에 얽힌 피로와 슬픔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페이른 왕실 사건은 경시할 수 없는 큰 임무였고, 해당 지역에 파견된 이단심문관이 제법 많았었다.

“평범하게 끝났지.”

제피스는 곧 표정을 다스리며 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인퍼머르 사건은 보고서를 읽어 보았네. 믿어지지 않는 일이더군. 여파가 적지 않겠어.”

“그 탓에 제가 쉬지 못하는군요.”

“근면함은 이단심문관들의 귀감일세. 이번엔 어디로 향하는가?”

“고향으로요.”

데인 왕국으로. 그의 고향으로. 기사들의 나라로.

“그대의 고향이라. 기대가 되는구나.”

어느새 대련을 마친 아벨이 땀을 닦으며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목례하고, 그녀의 뒤에서 헐떡이는 파비아노를 바라보았다.

“디모니카는 어떻습니까?”

“전술이 직선적이고 솔직 하더구나. 악마를 사냥한다고 했지. 확실히 검술이라기보단 사냥법에 가까운 거친 움직임이었다. 오히려 그 탓에 아주 까다로웠구나.”

한 번, 한 번이 트롤과 같은 힘을 싣고 있고, 반응 속도와 본능은 짐승처럼 기민하다. 디모니카의 공격은 일종의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자신보다 크고 강대한 적을 상정하고, 막아내지 않으면 공간 자체를 찢어 발기는 공세를 펼치는 방식이었다.

“그래. 다인의 왕국은 아주 오랜만이다. 혹시 수도에 들릴 일이 있겠느냐?”

“그럴겁니다.”

“잘 되었구나.”

아벨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가책을 느꼈다. 어쨌건 그녀를 이용하는 샘이었으니까.

-그녀를 사랑하나?

페이자쉬가 아벨의 뒤에 나타났다. 그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이죽거렸다.

-여기 있는 이 멍청이들을 정말 형제라고 여기진 않잖아. 그녀나 그 수인족 계집도, 우리의 체스 판 위에 있는 병정에 불과해.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미소를, 그리고 제피스의 피로한 얼굴을 잠시 한 번 바라보았다.

“제피스 형제님. 죄송하지만 전 이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 내가 바쁜 사람을 붙잡았군. 미안하네.”

제피스는 웃으며 멀어졌다. 페르난데스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우린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자격이 없어.’

-그래. 설령 그럴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 이들은 아니지.

‘그리고, 이들을 폄하할 자격 또한 없다.’

인퍼머르 사건 이후로,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의 가치관이 대립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게 비단 육신의 차이일까? 아니면 베이타서스가 그들의 영혼을 찢어 놓으며 해둔 장치일까? 페르난데스는 알 수 없었다. 전생 시절이라면, 그러니까 페이자쉬였다면 이런 식으로 사고하지 않았을 테니까.

저 멀리에서, 그에게 달려오는 키르하스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활기찬 발소리였다. 그녀의 맑은 웃음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쾌활한 목소리까지도.

-넌 나약해졌어. 차라리 내게 몸을 넘겨라. 내가 한다면,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어.

‘우린 욕심 많은 사람이야. 페이자쉬, 난 내 손에 들어온 것을 결코 곱게 내어주지 않아.’

키르하스의 검게 찰랑이는 윤기 있는 머리칼이 해질녘 이단심문청의 복도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은공!!”

키르하스는 타다닷, 하는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그에게 달려 들었다. 그녀가 마음 먹는다면, 디모니카의 감각조차 속인 채 접근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라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기획한 작전이 연극이라면, 그가 준비한 지금 이 장면의 연기는 가장무도회였다. 페르난데스는 웃음 짓는 가면을 얼굴에 덮어 쓰는 감각으로, 달려드는 키르하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느끼며, 키르하스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콧소리를 냈다.

‘이번 생에선, 그 무엇도 놓치지 않겠어. 어떤 것도.’

-언젠간 선택해야 할 날이 올거다.

기만하는 것, 연기하는 것, 이용하는 것, 버리는 것과 희생 시키는 것. 여든 넘은 노마법사로서, 그에겐 그보다 익숙한 것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품에 안은 채로, 그의 앞에 나타난 페이자쉬의 눈을 노려보았다.

‘아들을 위해서.’

-녀석을 위해서.

세상을 손에 쥐고,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리라. 그 대가가 그 자신이더라도. 육신은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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