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공연 제 1막, 악령이 거니는 폐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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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공! 은공!! 저기 사람들이 있어요!”
울창한 숲 속에서, 키르하스는 불량한 산적 졸개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가도 인근에 숨어 이 근방을 지나는 상단을 물색한 것이 이제 세 시간 째였다. 카르두스 남작령은 데인 왕국 남부 지역의 교역로였으니, 상인 행렬이 언제 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수는?”
“스물 정도? 무장한 병사는 여섯 명 정도에요!”
“그걸 파악해오니까 정말 산적이 된 것 같은데···. 아벨에게 연락해. 시작하자.”
페르난데스의 말이 도적 두목이 말하는 것처럼 들려, 키르하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마주 웃으며 말고삐를 잡아챘다. 말이 천천히 속도를 높이며 숲 속을 나아갔다. 키르하스의 말대로, 곧 인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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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렌은 교역 상인이었다. 대단한 상단을 이끌고 있거나, 대단히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제법 괜찮은 벌이를 벌고 있는 상인 중 하나였다. 이 근방에 공급되는 모피와 식자재는 대개 그와 그의 상인 연합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르두스 남작령 정도는 그에게 있어서 크게 위협적인 상행에 속하지 않는 곳이었다. 제법 잘 닦인 교역로였고, 치안도 괜찮은 편이었다.
카일렌은 반쯤 졸며 걷고 있는 용병들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좋아 용병이지, 상단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선은 전쟁 경험이 거의 없는 호위병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 유능한 용병들은 대게 영지전의 대리 병사로 고용되곤 했으니.
하지만 잘 무장된 병사 열세 명이 붙었다면, 적어도 눈이 달린 산적들은 결코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 카일렌은 말을 몰며 베르드 시에 있는 여관을 상상했다. 따듯한 욕조가 있고, 가슴 큰 여급이 있는. 카일렌의 입술이 살짝 풀렸다.
“···? 저거 뭡니까, 대장?”
“어···.”
가도 인근 수풀이 꿈틀거리기 전까진. 카일렌은 인상을 굳히며 용병들이 바라보는 곳을 살폈다. 산적? 아무리 미치광이 같은 놈들이라도, 이 정도 병력을 굳이 공격한다고? 그렇게 큰 세력을 일군 산적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이 근방에서 들은 적이 없었는데?
-부스럭.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조금 크기가 큰 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저녁에, 가뜩이나 시야가 제한된 숲길인 탓에 정확하게 살피긴 어려웠지만.
“저거 설마···?”
머리였다. 고블린의.
“머리···?”
“씨발! 무기 들어! 이 새끼들아, 뭘 멍하니 서···. 으아아악!!!”
-콰아앙!!
-히이이잉!!!
기겁하며 칼을 뽑아들던 용병대장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바위가, 거칠게 마차를 때렸다. 큰 충격에 마차가 기울어지고, 말들이 발버둥쳤다. 용병대장은 소리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뭐, 뭐야!!”
“적이다!!! 습격이다!!”
그 소란에 졸던 용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그러쥐었다. 제기랄, 이거 그냥 단순 호위 아니었어? 용병들은 긴장감 속에 침을 삼켰다. 곧, 숲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바, 바위 트롤이다아아!!!!”
“씨발! 창! 창 들어!!”
-쿠우웅!
비쩍 마른 팔과 툭 튀어나온 배. 잿빛 피부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나타났다. 놈의 두 눈은 허기와 광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놈은 고블린의 것으로 보이는 앙상한 팔을 우물거리며 가도 앞으로 내려왔다.
“대장! 이 근처에 트롤이 있단 말 들었어?”
“그랬으면 이 일 안했지!! 석궁!! 석궁 쏴! 빨리!! 불 가져와!!”
용병대장은 이를 깨물며 애써 칼을 쥐었다. 트롤이라면 이 정도의 병력으로 대처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괴물 사냥꾼들이나 기사들이 나서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이보다 배는 많은 병력으로 밀어 붙이거나.
대장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스쳤다. 이걸 다 버리고 튀어? 하지만 용병짓이라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선 위신이 가장 중요했다. 여기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말 산적 말곤 할 일이 없었다!
“트, 트롤이라니! 이보게, 트롤? 여기에 왜 트롤이 나와?!”
“그건 저놈한테 물어 보쇼! 저 자식 야식 되기 전에 꼭!!”
트롤은 다행히 멍청히 서 있었다. 흉포하게 바위를 던졌던 것 치고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놈은 머뭇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저거 왜 공격 안하지?”
“기도 조금 더 해봐 아무나. 그냥 이대로 꺼져 달라고.”
“노, 놈을 사냥하는 건 어떤가? 바위 트롤의 가죽은 제법 돈이 된다네.”
“···.”
용병 대장이 카일렌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은 이유는 정말 순전히 트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그우우욱!!!”
곧 트롤이 발작하듯이 움찔거렸다. 놈은 주위를 빠르게 살피더니 잠시 덜덜 떨었다. 놈의 눈에서 흉흉한 기세가 흘렀다. 트롤은 거품을 물며 고함치고는 곧장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쿵, 쿵, 쿵!
“으아아악! 창! 창 뻗어! 석궁!!!”
-퓻!
용병대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석궁 장전을 마친 용병이 재빨리 쿼렐을 쏘았다. 침을 흘려대는 트롤의 어깨에 쿼렐이 정확히 틀어 박혔다. 하지만 트롤의 가죽을 뚫고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쿵!
“끄으아악!!”
트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대한 곤봉을 휘둘렀다. 놈의 앞을 막으며 덜덜 떨고 있던 용병 하나가 그 공격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거칠고 맹렬한 돌격이었다. 놈은 특별히 누군가를 잡아먹거나 죽이겠다는 의도로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놈은 그저 정직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한 번에 하나씩,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용병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대며.
“피해!!!”
-쿠우우웅!!!
놈의 몸이 마차에 틀어박혔다. 마차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모피와 밀 따위를 가득 실은 마차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엄청난 괴력! 카일렌은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콰지직!
마차가 박살나며 과일과 순무가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카일렌은 뒤로 주춤거리며 기어갔다. 다행히 트롤은 그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트롤은 그저 앞으로만 가려 했다. 마차가 있든 용병이 있든.
놈에게 명백한 공격 의사가 없었던 탓일까. 부상을 입은 용병들 사이에서 아직 사망자가 발생하진 않았다. 용병 대장은 방패를 꽉 붙잡고 속으로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그는 단창을 움켜쥐며 속으로 셋을 셌다.
됐다. 용병 대장의 손아귀에 힘이 맴돌았다. 그가 지금까지 용병짓을 하며 살아남아 이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반쪽짜리 힘이라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준비도 오래 걸리고 효과도 크지 않았지만. 어쨌건 마력이었다!
-쿠르릉.
정점에 달한 전사의 몸엔 마력이 깃든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도, 분명한 힘이 그의 한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의 머리칼이 올올이 떠올랐다. 곧 그는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트롤의 등은 텅 비어 있었고, 놈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콰아앙!!
용병 대장의 팔이 거칠게 쏘아져 나가며 트롤의 등판에 단창을 박아 넣었다! 성공이다! 피륙을 꿰뚫은 촉감이 분명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저릿한 손을 거칠게 빼내려 했다. 놈의 몸에 박힌 창을—
“그우어어어어어어!!!!!”
“씨발···.”
트롤의 등에 처박힌 창이 놈의 거친 근육 사이에 물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병대장은 곧 분노에 일그러진 트롤의 거대한 얼굴을 눈 앞에서 보게 되었다.
“그어어어억!!”
“으아아악!!!”
트롤은 마차를 박살내던 손을 멈추고, 용병대장의 몸을 쥐고 들어 올렸다. 놈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면도날처럼 늘어선 치열이 보였다. 놈은 용병대장을 비웃듯 눈매를 비틀었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죽음이 보였다!
-쒜에에엑!!
-퍽!
“그아아아악!!”
용병대장은 거친 충격에 헐떡이며 자신이 바닥을 구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침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몸부림치는 트롤을 바라보았다. 놈의 몸엔, 긴 창이 박혀 있었다.
‘어디서? 누가?’
고통 탓에 단어가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흐린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트롤이 바라보는 방향을 살폈다. 저 멀리, 저물어가는 석양을 등지고. 누군가가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그는 그림자 진 사내의 새파란 눈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음울하고, 그늘진 눈이었다. 사내의 곁에 서 있는 수인족 여자가 트롤을 바라보며 재잘거렸다.
“적중이에요, 은공!”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안장에서 기마창을 들어 올렸다. 사내는 잠시 자세를 잡고는,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마갑을 잘 갖춘 말이 거친 투레질을 하며 달렸다!
-투두두두!!
“길을 터라!”
“히이이익!!”
말발굽 소리는 용병들에게 있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기사나 기병대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죽어나가는 용병들의 입장에서, 난데 없는 기마 돌격은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용병들은 기겁하며 다친 몸을 던졌다.
-투두두두!!!
찰나의 순간, 사내는 용병들이 급히 비켜선 가도를 내달려 가속했다. 사내의 창이 석양을 받아 번쩍였다. 곧 창날이 트롤의 가슴팍을 치고—
-콰아아앙!!
“뭐?”
“···뭐?”
“···어···어어?? 어어어???”
그대로 트롤을 꿰뚫어, 놈을 말 그대로 창 끝에 ‘매달고’ 달렸다! 용병들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고통을 잊고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어느새 가도의 끝까지 트롤을 끌고 갔다. 저걸, 한 팔로 했다고? 어깨 괜찮나? 용병대장은 경악하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히이이잉!!
트롤의 걸쭉한 피가 가도를 타고 길게 늘어졌다. 놈의 가슴은 기마 돌격의 충격에 갈기갈기 찢어져 곤죽이 된 뼈와 내장이 흘렀다. 기사는 아직까지 숨을 헐떡이는 트롤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스르릉.
한 손으로 장검을 뽑아 올린 기사는 창에 매달린 트롤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공중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흩어지고, 곧 트롤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히이이잉!
용병들은 말의 투레질에 정신을 차렸다. 기사는 말머리를 돌려 상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의 손에 들린 칼에서 핏물이 방울지고 있었다.
“에흠!”
상기된 목소리에 용병대장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수인족 여자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올리더니, 툭툭 털어 먼지를 닦았다. 그녀는 옷 소매로 사과를 문지르고는 그대로 씹어 먹었다.
“저 분이 바로 세르너드의 알베르트 경입니다!”
“세르너드의 알베르트···?”
용병대장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열정과 간절함이 반짝이는 눈으로 다가오는 기사를 보고 있었다.
-다그닥.
용병대장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석양을 받으며,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치렁한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무감정한 푸른 눈이 보였다. 고위 귀족, 그것도 정절과 신념에 목숨을 건 그런 귀족 무인이 보여줄 법한 눈이었다.
“용감하더군.”
-스윽.
용병대장은 그의 눈 앞에 피에 젖은 창이 내려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이 기사에겐 공격 의사가 없는 듯 했다. 용병대장은 얼떨결에 창을 받았다. 그가 트롤의 등판에 꽂아 넣었던 그의 단창이었다.
“그대의 분투 덕에 녀석을 붙잡을 수 있었어. 이 지역 주민을 대신해 사례하지. 고맙네.”
“아··· 그렇다면 기사님께서···?”
“놈을 쫓고 있었지. 놈에 의해 양민들의 피해가 대단히 컸어.”
“오오···.”
석양을 받은 기사의 얼굴이 강철 같은 기사도에 빛나는 것 같았다. 오랜 용병 생활로 피폐해진 그조차도 그 순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생명의 위기에서 막 벗어나 감상적으로 변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어나게. 나는 세르너드의 알베르트일세.”
“저, 저는 멜메드입니다! 기사님! 영광입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대장의 팔을 쥐고 끌어 올렸다. 용병대장은 그 거친 힘에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알베르트. 페르난데스는 아벨이 몰아온 트롤의 시체를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