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52화 (53/388)

52. 공연 제 1막, 악령이 거니는 폐광 (3)

*

“동행해주신다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죄송하게도 경께서 만족할 여정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카일렌은 망가진 마차를 수리하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트롤의 공격에 마차는 이미 운송 기능 대부분을 상실했다. 꼼짝없이 야영을 하고, 상단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판이었다. 손해가 막심했다.

“그건 걱정 말게. 나도 당장 급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니.”

“편력 수행 중이십니까?”

“지금은 그렇다네.”

“그렇다면 제스트 백작님을 찾아가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바이에미어 경께서 머물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일렌은 페르난데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다소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 원탁 의회의 바이에미어 경 말입니다.”

“어? 아. 아아. 그래. 그런가?”

페르난데스는 대강 맞장구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바이에미어가 대체 누구지? 그가 원탁 의회의 왕실 기사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이 시대의 원탁 의회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대단한 명예겠군. 좋은 정보 고맙네.”

무표정한 얼굴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난데스는 연기에 충실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의계획상 이번 여정에서 원탁 의회와는 한 번 부딪쳐 보아야 했다.

-전생의 반절만 강해도 힘들텐데.

‘그 정도의 기사들이 모여 있다면 데인 왕국이 이렇게 비루하게 전락했을 리가 없어.’

전생의 데인 왕국은 비센테 2세와, 헬르가, 스마이어 등의 위대한 원탁 기사들을 중심으로, 악마들의 군세를 말 그대로 ‘분쇄’하며 전진하던 미친 놈들이었다. 당대 기사단들 중에서 그들에게 견줄 수 있는 이들은 제국의 임페리얼 아이언 사이드 정도였을까?

인류 문명의 말엽은, 역설적이게도 그야말로 영웅들의 시대였다. 악마가 물질 세계에 나타나고, 만신전이 무너져가는 과정에서, 문명 사회의 왕국들이 하나 둘 불타오르는 과정에서, 역사상 그 어느 순간보다 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인류의 종말은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손에 스러져간 영웅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시대가 그들을 만들어낸 것이었을까.

“다음 마을까진 얼마나 걸리나?”

“이 근방에 폐광촌이 하나 있기야 한데···. 기사님께서 머물 정도의 마을까진 적어도 반나절은 더 가야 합니다. 이미 너무 늦어서··· 괜찮으시다면 야영을 하시겠습니까?”

“폐광촌?”

“음···. 경께서 듣기에 적합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세율을 감당하지 못한 하층민들이 만든 부락입니다. 머물기에 적합한 곳은 아닙니다.”

데인 왕국의 전시 세율은 십칠조다. 이는 일반 양민 기준으로, 농노의 경우 거의 십구조에 육박하는 무거운 세금을 징수해간다. 따라서 흉년이 들거나 구휼이 마땅치 않은 양민들이 이따금씩 비허가 부락을 만들기도 한다.

왕실 법률의 비호를 받을 수 없으니 근방 도적떼에게 취약하기까지 해서, 제법 잘 무장한 자경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 불법 부락들은 사실상 산적들과 다름 없었다.

“흥미롭군.”

“추천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경께서 기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부락민들이 공격해올 수도 있습니다.”

카일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이야 행상들이니 부락민 입장에서도 자재 수급을 위해서라도먼저 공격하지 않았지만 기사가 동행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아벨이 짜증내겠지?’

-아마도.

‘으음’

바르베스 남작령의 폐광이라. 시간을 다소 버리는 한이 있어도 조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근처 도시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벨을 생각하며, 페르난데스는 카일렌에게 말했다.

“사슴 고기도 취급하나?”

*

폐광촌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하인과 용병들이 상품들을 나누어 짊어지고 직접 부락으로 운송했다. 다행히 식자재들이 많아, 부락 내에서 판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보다 가벼운 것들로 교환하거나.

폐광촌은 목재 방책을 둘러 친 허름한 마을이었다. 당초 페르난데스의 예상보다 규모가 제법 크고, 경계가 삼엄했다. 말이 부락이지, 이 정도 되면 산적 소굴이나 다름 없었다.

“저희 마을엔 무슨 일이십니까!”

방책 위에서, 비쩍 마른 사내가 외쳤다. 사내는 위협적으로 도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일렌이 앞에 나섰다.

“나 카일렌이오! 이 근방에서 트롤이 나와 마차가 부서졌소. 하루만 신세를 질 수 있겠소? 교역품이 다소 남아 있으니, 거래를 할 수도 있소!”

“카일렌? 아아, 그 상인! 좋아, 좋아. 오랜만에 고기를 좀 먹겠군!”

-끼이이익.

방책의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정비 되지 않은 흙길과, 반쯤 부서진 나무 집들이 가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방책 뒤에서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안색 어두운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보였다. 부락민들은 피폐한 얼굴로 연신 그들을 힐끔거렸다. 이따금씩 페르난데스와 눈이 마주친 꼬마들은 기겁하며 제 어미의 치마폭 안으로 숨어 들었다.

황량한 마을이었다. 이런 마을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이 마을에 비하면 세르너드 영지는 천국이나 다름 없었군 그래. 페르난데스는 말고삐를 쥐고 생각했다.

그때, 한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덩치 큰 사내가 나타났다.

“그쪽은 누구쇼?”

“말 조심하게! 세르너드의 알베르트 경일세!”

“경···? 기, 기사?!”

사내가 눈을 크게 치켜 뜨자, 그들 주위에 서 있는 자경단원들이 제각기 무기를 움켜쥐었다. 불법 부락민의 입장에서 기사는 처형인과 다름 없었다!

“우리 마을에 기사를 끌고 와?! 죽고 싶어, 카일렌?!”

“내가 와보자고 했다. 평민. 이 상인에겐 죄가 없다.”

“···기사 나리. 아무 말 없이 떠나면 우리도 그냥 조용히 있겠수. 우린 다 그냥 배곯은 불쌍한 거렁뱅이들일 뿐이오!”

별로 굶주린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페르난데스는 그의 기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덩치가 크고 근골이 튼튼한 것이 기아에 시달리는 초봄 농노의 안색은 아니었다.

“아니, 쉴 곳으로 안내해라.”

“···담대한 거요, 미친 거요?”

“자, 자네! 말 조심하게!”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 앉은 채,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페르난데스의 기세에 움츠러들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그는 기본적으로 농민에 불과했다. 진짜 기사의 눈을 바라보고 소리지를 정도로 대담한 인물은 못 되었다.

이 정도만 했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 마을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의 목에 걸린 나비 모양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구리나 황동일 것이다. 조악한 손재주로 깎아 놓은 작은 장신구가 기름때에 찌들어 반짝거렸다. 페르난데스가 가만히 목걸이를 보고 있자, 사내는 겁먹은 표정으로 소매를 추스렸다. 목걸이가 옷섶 사이로 사라졌다.

-디케이더즈라···.

페이자쉬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연일까?’

-이런 마을이라면 뭐, 한 두 놈 숨어있을 수도 있지. 어찌 되었든 나쁘지 않아.

그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명성이었고, 명성을 쌓기에 가장 좋은 상대는 괴물과 악마였으니까. 악마를 한 마리 소환해서 죽여볼까 생각하던 그에게 있어선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페르난데스가 가만히 서 있자, 사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단 하루만입니다. 기사 어르신.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단 하루 편히 쉬고 떠나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입니다.”

사내는 페르난데스의 마구에 걸려 있는 트롤 머리를 연신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앞장 서서 걸었다. 모든 기사들은 대부분 살인 병기들이고, 개중 이런 편력 기사들은 농민들에겐 천벌과 같았다.

설령 천운이 닿아 이 기사를 처리한다면 어쩌겠는가? 그 틈에 대체 몇이나 되는 부락민들이 희생될 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그저 조용히 물러서길 바랄 뿐. 사내는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집으로 페르난데스를 안내했다.

*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겁에 질린 부락민이 내온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침상 위에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허벅다리 위에 얹어 놓은 장검의 차가운 촉감이 정신을 예리하게 벼려내는 것 같았다.

-다시 해보자. 여전히 그래?

‘아무래도 당분간은 포기 해야겠어.’

인퍼머르 사태 당시, 아벨을 부활시키고, 다섯 왕좌의 손아귀를 사용한 뒤에, 가이메른 왕의 대마법까지 탈취하는 바람에 청동 왕좌의 상태가 이상했다. 마력 회로의 구성이 크게 뒤틀려, 마법을 자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고대 유물인지라 당장 기능이 정지되거나 파괴 되지는 않았지만, 제 상태를 되찾을 때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래서 물건에 의존하면 안된다니까. 정말 불편하군.

‘몸 안에 마력회로를 하나 새로 파볼까?’

-지금 육신에 마력이 흐를 수 있나? 디모니카 세례 때문에라도 어려울 것 같은데?

‘방법이야 찾기 나름이지.’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라 한다면···. 육신의 일부를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거나? 부작용이 없는 시술을 하기 위해서라면 준비 과정이 복잡하기야 하겠으나, 영 불가능하진 않았다. 고려해봄직한 가정 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페이자쉬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기껏 마법을 포기하고 얻은 육신을 또, 마법을 얻자고 포기한다는 건 자가당착적이지 않나?

‘방법 중 하나란 거지. 뭣하면 체인질링의 스테프라도 찾아 보던가. 안 되면 다른 유물들을 좀 구해다 청동 왕좌 자체를 강화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지.’

청동 왕좌와 호환이 될만한 유물은 적어도 중부 지방 쪽으로 가야 나올 테고, 체인질링의 스테프는 아세아스 고위 의회가 소유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스르릉.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칼을 뽑아 드는 소리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뜨며, 무릎 위에 올려 둔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농노들이?’

-아니면 디케이더즈 쪽일 수도 있지. 뭐가 됐든···. 이런, 뒤!!

‘음?’

-툭.

차가운 날붙이가 그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 보려다가, 위협적으로 목을 긁는 칼날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 방 안엔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이 마을에 있었다면, 마을 입구에서 사내들의 소요는 이해되지 않았다. 디케이더즈? 아니, 아니었다. 악마의 냄새가 나진 않았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찔렀겠지.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하는 누군가?”

“마을에서의 사태는 흥미롭게 봤습니다. 알베르트 경. 우선, 본관에게 적대 의사가 없다는 사실만 알아두십시오.”

예상 외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덜미에서 칼날의 감촉이 사라졌다. 곧, 한 여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맵시, 절제된 눈과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칼. 마치 군인 같은 절도 있는 자세의 미녀였다. 그녀는 천천히 빈 손을 들어 보이며 페르난데스의 맞은 편에 섰다. 그녀는 짧게 경례하고는 말했다.

“부디 앙헬라라고 불러 주십시오. 사정상 본관의 본명을 밝힐 수 없는 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세르너드의 알베르트다.”

“본명이십니까?”

“베이타서스 교회의 보증서가 내 품 안에 있는데, 꺼내어 보여드려도 되겠나?”

“본다 한들 믿을 것 같진 않군요. 알베르트 경.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경이 적어도 기사라는 사실은 믿습니다.”

앙헬라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작은 서류 한 장을 펼쳐 그에게 건넸다.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받았다. 무기질적인 필치로 또박또박 적힌 글자가 보였다. 레바인테르 어(語)였다.

“제국칙령 제 3호에 의거하여, 현지 조력을 요청합니다.”

이어, 앙헬라는 목소리를 다소 낮추어 말했다.

“본관은 임페리얼 아이언 사이드의 그레이 서클. 또는 제국 특무대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제국 특무대라고??”

아이언 사이드의 계층 구조가 어떤지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그레이 서클이라면 악명 높은 해결사 집단이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어떤 더러운 임무도 마다하지 않는 사냥개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경이 놀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본 특무대의 모토는 ‘공포, 소문, 실적’이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께서 문명 사회의 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앙헬라는 기묘하게도,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감각한 표정과 당당한 인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계집은 뭐지? 멍청인가?

‘페이자쉬, 처음 보는 분한테 말이 심하잖아.’

페르난데스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귀하의 직장 동료들도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어째 이 시기 특수부대원들은 다 비슷한 놈들만 모여 있는 건가? 페르난데스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소름이 끼쳤다.

설마 디모니카 같은 놈들이 또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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