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막간극 : 행복의 이름
*
광명의 대신 샤일드. 선신 만신전의 주축이 되는 세 신 중 하나로, 데인 왕국의 국교에 해당했다. 샤일드의 사제, 베일테인은 젊은 나이에 교구장에 오른 유능한 인물이었다.
-똑똑.
“베일테인 사제님. 알베르트 입니다.”
“아, 나이트 알베르트! 어서 들어오십시오!”
베일테인은 차를 내려 놓고 웃으며 손깍지를 끼었다. 곧 낡은 나무문이 밀리며, 무표정한 청년이 들어왔다. 거칠고 힘든 편력 수행으로 다져졌을, 강인한 눈매. 그러나 귀족적 혈통을 증명하듯 섬세한 외모를 가진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베일테인은 저 신실한 기사가 해낸 일들을 기억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납치한 상단을 구원하고, 홀로 악마에게 맞서 싸워 승리했으며, 인근 가도를 위협하는 괴수들을 처리해왔다고 들었다. 실제로 그가 직접 본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사의 모범···.’
산촌의 농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도외시하고, 언데드가 들끓는 숲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숭고한 희생과 정의. 기사도의 전형이었다. 베일테인은 이 신실한 기사에게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나이트 알베르트. 혹시 바이에미어 경께서 이 도시에 머물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까?”
“상인들에게 소문으로는 들은 적 있습니다만···.”
“경의 이야기를 듣고, 바이에미어 경께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혹시 생각이 있으십니까?”
“제게는 큰 영광이 되겠군요. 원탁 의회의 기사를 만날 수 있다면요.”
페르난데스는 상상 이상으로 수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데인 왕국을 사실상 지배하는 최고위 정치 집단의, 그 일원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라면.
‘어전 영접도 머지 않았겠군.’
현 국왕, 헬르가 3세는 암군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 시점이라기보단, 후세의 평가가 그랬으니 오히려 지금의 일견 평화로운 치세는 당대 원탁 의회의 힘일 것이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헬르가 3세의 밑에서, 국력이 크게 쇠하지 않도록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당대 원탁 의회가 가진 유능함을 증명했다.
오히려 전생의 명군으로 명성 드높은 비센테 2세가 다스리던 당시, 너무나 강력한 왕권 탓에 강대한 원탁 의회의 기사들에겐 큰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원탁 의회라면 말 그대로 데인 왕국의 수뇌부와 다를 바 없었다.
-전생의 원탁 의회를 생각하면 안 될텐데. 지금 놈들은 기사라기보단 정치꾼들에 가까울 거야.
‘심지어 ‘유능한’ 정치꾼들이지. 오히려 유능한 기사보다 유능한 정치가가 더 다루기 쉬워.’
페르난데스는 베일테인이 건넨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속으로 웃었다.
*
키르하스는 멍하니 꽃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스트 백작이 직접 다스리는 이 도시는 잘 정비되어 평화로웠다. 토치맨의 입장에서, 또는 페르난데스의 가신 된 입장에서, 평화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지루함 뿐이었다.
“흐아암···.”
키르하스의 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흐느적거렸다. 따사로운 햇살에 잠긴 채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물론 재미있었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녀의 삶은 최근 페르난데스의 행적에 따라 목표가 결정되곤 했다.
“지루하느냐?”
“으앗?!”
키르하스의 귀가 쭈뼛 섰다. 그녀의 등 뒤에 기척도 없이 나타난 아벨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곁에 앉았다. 키르하스는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아벨을 노려 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거라. 그 마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왔다.”
“은공께서 이미 하실 말씀은 다 하셨을텐데요?”
“페르난데스. 후후, 그 아이는 늘 감추는 것이 많지. 그 탓에 더 재미 있기야 하지만.”
용들은 수수께끼를 좋아하니까. 아벨은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키르하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모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즐거웠다. 그리고 얄미운 일이지만, 아벨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라, 대화 하기 즐거운 상대였다.
“은공께선···. 유령을 잡으셨습니다!”
“그래 그래. 식인을 하던 부락이라 했지? 끔찍하구나.”
“아무렴요! 거기에 사람을 장대에 걸고···.”
그렇게 말하던 키르하스가 잠시 멈칫했다.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영역이었다. 아벨은 따듯하게 웃었다.
“힘든 일이 있었나 보구나. 우리 모두가 그렇지. 하지만 키르하스. 보거라.”
아벨은 키르하스의 발 밑에 피어난 작은 꽃망울을 따서, 키르하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화려한 관목이 아니라, 툇마루 밑에 돋아 있는 자그마한 꽃이어서. 키르하스는 미처 그 자리에 꽃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행복은 발 밑에, 그림자 뒤에, 고난과 무관심의 사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반드시 있지. 그러니.”
그녀는 키르하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픔에 매몰되지 말거라. 그리고 네 관심과 목표가 언제나 저 관목과 같이 화려하다 하더라도, 언제나 네 발 밑의 들꽃을 살피며 나아가거라.”
“···네···.”
키르하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벨은 푸른 눈을 빛내며 아름답게 웃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이 따듯한 봄바람에 흩날렸다.
키르하스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과정에서도, 가슴 한켠이 칼에 베인 듯 아파왔다.
‘이건··· 소유욕이야. 은공을 향할 감정이 아니야.’
그 순간, 키르하스의 귀와 꼬리가 맹렬하게 섰다. 은공?! 그녀의 귀가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몸보다 먼저 반응했다. 묵직하고 균형 잡힌, 신뢰감 넘치는 발걸음 소리. 은공이었다!
“앗?”
아벨이 당황하며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지만, 키르하스는 상관 않고 꼬리로 툇마루를 탁, 탁 내리쳤다. 곧 문이 열리며 페르난데스가 나타났다. 예의 피곤해 보이는 음울한 눈매가 보였다. 그녀는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키르하스. 미안한데 부축을 좀···.”
“네, 은공!”
페르난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르하스가 바람처럼 뛰어나와 그의 왼 어깨를 부축했다. 페르난데스는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임무를 포기하고 정양을 취해야 했다.
적절한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것도 이 험난한 타지에서 복부를 관통한 검상은 일반인이었다면 죽음에 달하는 치명상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디모니카의 축복 받은 육체 덕에 유지하고 있었지만,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툇마루에 앉았다.
“간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곧 수도에 갈 수 있을 것 같소.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 미안하오.”
“그런 말 말거라. 네가 내게 사과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 기다림 탓이 아니다.”
아벨은 페르난데스를 흘기며 말했다.
“네 몸을 보다 귀히 여기거라. 내 진작 네가 이다지도 무모한 아이인 줄은 알았지만, 어찌 매번 이런 중한 상처를···.”
키르하스가 페르난데스의 외투를 받아 개키는 사이에, 아벨은 새 붕대를 꺼내어 페르난데스의 배에 달라 붙어 있는 피에 절은 붕대를 뜯어냈다. 굳은 핏물에, 딱지 앉은 상처가 조금 뜯어지며 다시 피가 흘렀다.
“아아···. 우리들에겐 치유사가 필요하다.”
“상관 없소.”
페르난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표정을 굳혔다. 이 이상 인원을 늘리고 움직이는 것을 교단에서 허락할 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치유사는 일행에 필요한 재원이 아니었다.
키르하스의 역할은 전투 보조에 불과했고, 아벨은 고작 치유사가 치유할 수 있는 수준의 상처를 부상으로 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게다가 그 자신은···.
‘여차하면 그냥 죽지 뭐.’
-죽음에 익숙해지면 안된다고 강론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 꼴 나니까 차라리 그때 한 번 죽을 걸 해.’
-웃기는 군 정말.
페이자쉬가 키득거렸다. 디모니카의 육신은 어지간한 중상 정도는 자연치유로 치료할 수 있고, 그 이상의 치명상을 입어 사망하더라도 불사의 성흔이 그를 가호하고 있었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하면 속이 상한다. 그러지 말거라.”
아벨의 푸른 눈이 살짝 쳐지며 동그래졌다. 저 큰 눈으로 저런 표정을 지으면 꼭 자신이 철부지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아 찔렸다. 페르난데스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돌렸다.
“아, 매장 교단과 엮일 것도 같소. 그건 괜찮겠소?”
“후후, 나를 걱정하느냐?”
아벨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키르하스에게 지하 수로와 인신공양이 트라우마가 되었듯이, 아벨은 평생 매장 교단의 손에서 왕국을 지키던 수호룡이었고, 그녀의 최후 또한 그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벨은 키르하스가 머리칼에 꽂아 넣은 들꽃을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죽은 나의 아이들을 애도하는 것은, 그 아이들의 삶이 덧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찬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래하듯 말하며 깨끗한 붕대를 상처 위에 둘렀다. 그녀의 팔이 페르난데스의 허리를 감싸고 뒤로 돌아가며, 그녀의 머리칼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품 넓은 옷깃 사이로, 그녀의 새하얀 살결이 비쳐 보여, 페르난데스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리 된다면, 널 애도하겠다. 그러니, 부디 만수무강 하거라.”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되겠소?”
“너는 아이가 아니지 않느냐?”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페르난데스의 벗은 상체를 살짝 스치듯 만졌다. 키르하스가 재빨리 그 위로 외투를 둘러 주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따듯한 봄볕 아래, 여관의 툇마루는 평화로웠다.
*
바이에미어는 황혼에 접어든 노기사였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늙었다는 표현 대신, 조심스럽게 ‘원숙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었다. 헬르가는 가벼운 튜닉을 입은 바이에미어의 팔뚝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노인장, 그러다 고뿔 들면 죽을 나이 아니오? 아직 초봄이라, 밤 바람이 서늘한데?”
“하하, 전하. 노신이 감기에 들면 정말 죽을 때가 되었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헬르가는 행장을 꾸리는 바이에미어를 바라보곤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했다.
“내 탓에 노년에 고생하시는 구려. 손주가 지금 내 또래라 하지 않았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하. 제가 자청한 일인데, 어찌 또 그러십니까. 그리고 판···. 그 꼬마는 아직 전하에 비하면 천방지축에 불과합니다.”
바이에미어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행장을 마저 꾸렸다. 원탁 의회의 기사와 일국의 왕자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여행을 준비하는 일이 일어나다니. 바이에미어는 이런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 젊은 왕자가 좋았다.
“아, 베일테인 사제에게 홀로 트롤을 토벌했다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하. 왕도로 향하기 전에 한번 만나 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하지만 홀로 트롤을 잡았다라? 그 정도야 경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하하,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주 젊은 청년이라 하더군요. 그래서야 한번 만나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흉흉한 시대에, 바이에미어는 쓸만한 기사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고 여기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편력 수행중이라면 아직 어딘가에 적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니, 성품을 보고 왕도에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여정에 위해가 되진 않겠지?”
“걱정 마시옵소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 있지. 하지만 어째서? 젊고 유망한 기사들이야 왕실에 차고 넘치지 않소? 굳이 경이 이리 나서 보증까지 서며 위험을 감수해야 하오?”
다른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 헬르가는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지금 대외적으로, 왕국을 유람하며 편력 중이었다. 그들의 여정에 대해 왕실과 교단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 기사의 이름이 알베르트였습니다.”
“흔한 이름 아니오?”
“베이타서스 교회에서 보장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더군요.”:
“편력 기사라면 그래야지.”
“세르너드 남작령 출신이라 합니다.”
“···세르너드?”
바이에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에 비추어진 그의 단단한 암석 같은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루카스의 아들이라 합니다.”
“그럴 수가 있나···? 아니, 베이타서스 교회라···. 그래. 내 소문으로 들었지. 그렇다면 그 기사가?”
“네. 교회의 신분증이 사실이라면 그럴 겁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습니다.”
세르너드의 루카스. 그의 자식은 페르난데스 한 사람 뿐이었다. 만약 베이타서스 교회의 신분증이 사실이라면, 알베르트라는 그 기사의 정체는 페르난데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를 숨기며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아야 하겠지.
그러나 그 신분증이 조작된 것이라면···.
‘대가를 치루리라.’
감히 원탁 기사의, 친구의 자식을 사칭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