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58화 (59/388)

58. 제 2막, 왕도의 그림자

*

페르난데스의 수면 패턴은 사흘에 6시간이었다. 두 시간씩 쪼개어 잔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흘에 한 번 잠을 잤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육체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수면은 실험 결과 정확히 저 정도에 불과했다.

깊은 밤, 그는 침상 위에 허벅지 위에 칼을 올려 둔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며칠 째 밤마다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실험을 하고 있었다.

‘디모니카 육신이 너무 고성능이라니까.’

-전생에 이랬으면 예순 쯤에 일을 끝냈겠는데?

‘전생에도 디모니카였으면 아예 마법을 배우질 못했을 텐데 무슨 소리야.’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풀고는 빠르게 수인을 짚어 나갔다. 복부의 관통상은 회복되어 가고 있었고, 이미 육신의 마력 회로는 신성이 흐르는 혈액에 의해 다 타버려 없어졌다.

-치이이익···.

왼팔에 격렬한 통증과 함께, 산산이 마력이 흩어졌다. 그는 청동 왕좌를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청동 왕좌의 기능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인가?’

인퍼머르 당시의 무리한 마법으로 기능성을 완전히 상실했었지만, 과연 고대 악마의 유물 다웠다.

-똑똑.

“자느냐?”

“들어 오시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청동 왕좌를 손목에 걸며 말했다. 곧 문이 열렸다. 얇은 가운을 걸친 아벨이 엷게 웃으며 나타났다. 그녀는 갓 씻고 나온 듯, 살풋 젖은 머리칼을 쓸어 만지며 페르난데스의 앞에 마주 앉았다.

“아녀자가 내방하기에는 과히 늦은 시간이로구나.”

“···?”

“추문이라도 난다면 아주 큰일이겠어. 젊은 기사의 방에 야음을 틈타 출입하는 여인이라.”

아벨은 짓궂게 웃으며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추문이 두렵거든 낮에 해도 될 용건 아니오?”

“재미 없기는. 네게 궁금한 바가 있어 왔다.”

아벨은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곧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베이타서스와 거래를 했다 하지 않았느냐? 수평 세계를 뒤로 돌렸다고. 그래서, 이 며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구나. 세계를 뒤로 돌리기 전에 너는, 혹시 흑마법사가 아니었느냐?”

“그렇소.”

“대단히 강력한 존재였겠지?”

“관점에 따라 그렇지.”

“악마의 힘을 빌렸느냐?”

“악마를 사역하기까지 했지.”

“그렇다면 어째서?”

아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속으로 단어를 골랐다. 만에 하나, 설령. 끔찍한 악적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그의 전생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 그리고 그의 최근 행보는 올바르고 정의로웠다. 아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선신 만신전에서 너를 위해 세계를 뒤로 돌렸느냐?”

“세계는 멸망할 것이오.”

“···뭐?”

아벨의 움직임이 굳었다. 그녀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페르난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의 수호룡을 향해서, 페르난데스는 고해 하듯 입을 열었다.

“세계는 멸망할 것이오.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지만,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지. 이 시대는 이미 그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소. 사람이 모이는 모든 마을, 도시, 나라엔 악마 추종자들과 사교 집단들이 파고들고 있고, 현자들은 지옥의 꾀임에 미쳐가고 있지.”

“그런 순간은 언제나 있었고, 그럼에도 너희 인간들은 언제나···.”

“이번에는 아니오. 아벨. 이번에는.”

페르난데스의 눈이 피로에 찌들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섯 대악마들이 모두 지상에 도래할 것이오. 만신전은 봉문했고, 인간은 연약하지. 영웅들은 저들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어갈 것이오. 그게 우리에게 남은 운명이오. 내가 바라본 운명이며, 내가 적극적으로 일조한 파멸이지.”

“희망은···. 희망이 있느냐?”

“희망은 없소. 절박함이 있지. 그리고, 내가 있소.”

슬픈 눈망울을 하고 있는 아벨에게, 페르난데스가 강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있소. 그러기 위해 돌아왔고, 그러리라 맹세했소. 아벨. 역겨운 위선이고, 무가치한 속죄라 해도 좋소. 나는 회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하지만, 내가 있소. 지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몰락시켰고, 가장 많은 영웅들을 몰아 세웠던 악마 추종자가.”

“만신전이 인류 문명의 구원을 위해 너를 되살렸다면. 어째서 너는 그리 흔쾌히 그들의 약속을 이행하느냐?”

아벨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를 믿어도 될까? 그녀에게 이 말을 해도 될까? 그녀가 가진 호의는 명백히 인간 영웅에 대한 호감이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은 애정에 가까웠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둔감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리 오랜 세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는 상대의 마음을 파고들 줄 아는 흑마법사였고, 그 빈틈을 제법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겐 그녀의 호의를 이용할 자격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말했다.

“아들의 영혼을 구원받기로 했소.”

“···뭐···??”

아벨의 눈이 커졌다. 아들···? 아들? 자식이 있었다고? 그럼, 아내도 있었나? 인간은 유성생식하니까, 그래. 그래야 아들이 있겠지.

그래···. 아벨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아들이라고?

“아내는!”

“···뭐?”

“아, 어. 음. 흐으으음···. 아내가 있었구나? 그래. 너 정도 되는 사내라면 응당 있었겠지. 그래. 내 생각이 너무 짧았구나. 아내라. 아내···. 분명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겠지. 그래···.”

아벨은 횡설수설하며 페르난데스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소.”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커플이었구나?”

“아주 아주 많이.”

“얼마나···?”

아벨은 그녀에게 남은 유예 시간이 얼마인지 알아야 했다. 이 시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때, 여관 아래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들렸다.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와 말이 우는 소리였다.

“세르너드의 알베르트!! 여기에 있는가!!”

“···불청객이 왔구나.”

“기다리던 손님이오.”

페르난데스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소드벨트에 칼을 차고 일어섰다. 야밤에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이유야 들어보면 될 일이었다.

*

바이에미어는 말에 탄 채로 여관 앞에서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여관의 시종들은 감히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원탁 기사가 소란을 부리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법이니까.

“기사 알베르트! 난 알트하이스의 바이에미어다! 어서 나와 마주하라!!”

“무례하다고 말해도 되겠소?”

여관의 문이 열리며, 피로에 찌든 청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바이에미어는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훑어 보았다.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하게 단련된 몸. 세르너드 남작가의 검은 곱슬머리와 푸른 눈. 고생을 한 듯 선이 굵지만, 그럼에도 귀족적인 섬세함을 잃지 않은 턱선.

‘아, 루카스를 보는 듯 하구나.’

바이에미어의 웃음이 깊어졌다. 그는 친근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훌쩍 말에서 뛰어 내렸다. 쿵, 하고 묵직한 진동이 일었다. 그는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청년에게 성큼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음!! 훌륭하게 단련되었군. 키도 크고, 근골이 좋아. 녀석의 그 문약하다는 아들 치고는! 하하, 소문이 잘못 돌았나 보군! 좋은 일이야!!”

바이에미어는 친근하게 웃으며 청년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강철 건틀릿을 낀 채로! 청년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원탁 기사라 하더라도, 무례하시오.”

“무례라! 내게 직접 이리 말하는 놈들이 최근엔 없었는데! 하하하. 아주 아주 좋아. 무례라!”

-스르릉.

바이에미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안장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호기롭게 외쳤다.

“기사에게 무례를 지적한다는 건, 명예를 훼손한다는 뜻이지! 자, 세르너드의 알베르트! 이제 자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볼까?”

‘야밤에 갑작스레 나타나 이리 시비를 건다고?’

-저 놈 눈 봐. 노리는 게 있어.

‘이건 예상 외인데. 저 늙은이가 왜 이러지?’

-원탁 기사들은 정치가들이야. 방심 하지마.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말에 웃으며 칼을 뽑아 올렸다. 놈이 목적이 있어 이리 과격하게 나온다면, 그리 하라지.

‘난 방심한 적 따윈 없어.’

*

바이에미어는 땀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눈 앞엔 헐떡이며 칼을 짚고 서 있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제법 분전했지만, 아직 기술이 여물지 않아 깊이가 부족했다. 그는 불만스럽다는 듯 호통 쳤다.

“네 아비는 기교가 특징인 기사였거늘, 어찌 아들 놈은 이처럼 곰 같이 싸운다는 말이냐?”

“아버지의 지인이셨소?”

“아무렴! 알베르트. 네가 어찌 이름을 감추는지 궁금하기도 하구나!”

“···날 알면서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오.”

“하하하! 정말 제 아비 같지 않은 놈이로다! 루카스 이 못된 녀석. 이런 아들놈을 숨기고 가다니. 하하하.”

바이에미어는 그제야 상쾌하게 웃으며 비틀거리는 페르난데스를 부축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이런, 몸이 불덩이 같구나! 열병이 들었느냐?”

“별 것 아니오.”

“아니기는! 이거··· 이거 피냐? 부상을 입었다고?! 트롤에게 입은 부상이냐?”

“아니오.”

“내가 주책 맞았구나! 들어가자꾸나! 바람이 차다!”

바이에미어는 페르난데스의 말을 거의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무작정 페르난데스를 끌고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시종들은 황급히 그의 앞을 비켜섰다. 여관의 안엔 키르하스와 아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에미어는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네 아비는 돌 같은 녀석이었거늘, 아들이 참 호색하구나!”

“···실 없는 소리.”

“하하하! 내 반가워 그렇다. 반가워서! 잘 자라 주었구나!”

키르하스가 재빨리 뛰어와 페르난데스를 부축하고 섰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바이에미어를 노려보며 그르렁거렸다. 바이에미어는 쾌활하게 웃었다.

*

시종을 모두 쫓아낸 뒤, 바이에미어는 식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붕대를 갈고 있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악령에게 당했다고?”

“별 것 아니오.”

“상처를 보면 관통이구나. 배꼽 위 세 치. 조금만 더 위로 찔렸으면 심장이나 폐가 터졌겠어. 그런 부상을 입고 그리 싸웠다고?”

“감당할 만 하오.”

“젊음이란! 좋구나! 암. 나도 소싯적엔 화살 네 개 미만까진 맞은 걸로도 안 쳤다!”

바이에미어는 껄껄 웃으며 탁상을 두드렸다. 시끄러웠다. 이 노기사는 아직도 혈기왕성하게 날뛰는 체질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원탁 기사가 정치가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쩐 일이오? 조금 더 나은 시간에 찾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야 없지. 나는 내일 이 도시를 뜬다! 그 전에 네 얼굴을 보고 싶었구나!”

“그럼 오늘 낮에 오지 그랬소?”

“해가 떠 있을 때 나누기엔 부적합한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그래, 이 여인들은 믿을 만 한가?”

“적어도 당신 보다는.”

“하하하! 기개가 좋구나! 젊은 놈들은 이래야지!”

바이에미어는 한참 웃더니 의자를 당겨 페르난데스에게 가까이 앉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훑어 보았다.

“루카스의 아들 페르난데스. 망령과 싸울 때, 달리 얻은 정보가 없나?”

“놈들의 정체를 아시오?”

“매장 교단의 놈들이지. 자, 네가 대답할 차례다.”

“네크로폴리스의 하수인이었소. 매장 교단과 손을 잡았다 하더군.”

“네가 이름을 숨긴 이유는?”

“비밀이 비밀인 이유가 있지 않겠소?”

“하! 당돌하구나!”

“솔직한거요.”

“그렇다면, 솔직하게 대답해 보거라.”

바이에미어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의 두꺼운 팔뚝이 불끈, 뒤틀렸다.

“네 아비처럼, 왕국에 충성하고 있느냐?”

왕국이 직면한 문제는 외우내란. 페이른 왕실의 준동이 심상치 않은 이 때, 가이메른 왕조 엘프들의 갑작스런 증발. 왕국 서북부에서 세력을 일구던 프란츠리트 혈족의 실종. 내부에서 국력을 좀먹는 매장 교단의 발호와 헬르가 왕의 노환까지.

이 급박한 시기에 이름을 숨긴 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젊은 기사의 존재란, 자칫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프란츠리트 혈족과 매장 교단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던 바이에미어로서는, 이 청년을 온전히 신뢰하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아니오.”

“···페이른 왕실의 사주를 받았나?”

“그것도 아니오.”

“프란츠리트? 제국? 매장 교단? 누가 되었든, 루카스가 슬퍼할 일이다!”

“모두 아니오. 오히려 나는 데인 왕가에 도움이 될 일을 하려 하고 있소.”

바이에미어가 고개를 까딱이며 더 말해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을 이었다.

“페이른 왕실이 곧 데인 왕국에 선전포고를 할 것이오. 감당할 수 있소?”

“놈들은 농사 짓는 샌님들이다!”

“그렇게 치면 데인 왕국 병사들은 풀뿌리 캐는 산촌 뜨내기들이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페이른 왕실의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당장 분쟁이 시작하면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오.”

“···적어도 놈들 또한 멀쩡할 수는 없겠지.”

“그 사태를 막으려 하오. 두 왕국의 국력이 고작 이런 분쟁 따위로 삭아 없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오. 보다 더 큰 전쟁을 위해서.”

“···오십 년 전쟁?”

“그보다 더 큰 전쟁을.”

지금 이 시기의 가장 거대한 전쟁은 제국이 벌이고 있는 오십 년 전쟁이다. 그러나, 이제 곧 북부 야만인들이 남침을 시작할 시기였다. 칠흑의 에리크. 놈이 이끄는 북부인 전사들이 남침을 시작했을 때, 동부 왕국 연합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었다.

그 당시, 페이른 그리폰 나이츠가 옥쇄를 각오하고 에리크의 군영을 직접 타격하며 전선을 고착시킨 틈에, 데인 왕가의 원탁 기사단이 적진의 종심을 파괴하지 못했다면? 그 두 왕국의 연합전선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면?

만일 그랬다면 에리크는 끝내 동부 왕국 연합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그 여파로 제국이 백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술탄국이 타락했다면? 그랬다면 카라드스카르의 오천 대(大)게르는 누가 막았겠는가?

인퍼머르 사태는 작게는 엘프 왕가 하나의 몰락이었지만, 그로 인해 페이른 왕실과 데인 왕국이 대립을 시작한다면 큰 흐름 안에서 동부 왕국의 멸망이 시작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된다. 적어도 그가 막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라면, 인류 문명은 그 힘을 전생보다 더 온전히 보존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의 피라면, 기꺼이. 페르난데스는 새 붕대를 감은 몸을 일으켜 튜닉을 입었다. 바이에미어는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페이른 왕실은 큰 위협이지만, 매장 교단을 도외시하고 그 무엇도 온전히 준비할 수는 없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예정이었소.”

“네가 만나 보아야 할 분이 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관 문이 열렸다.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성큼,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페르난데스가 그를 바라보자, 사내가 후드를 뒤로 젖혔다.

찬란한 백금색 머리칼이 여관의 등불에 비치며, 빛이 비산했다. 사내는 에메랄드 색 눈을 빛내며 웃었다. 바이에미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예를 갖추거라. 이 나라의 적법한 계승자, 헬르가 왕자님이시다.”

“베이타서스 교회에 이단심문을 받기 위해 호송되었다 들었네만. 정정해 보이니 다행이로군.”

청년, 헬르가 왕자는 시원스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는 페르난데스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반갑군. 비센테라 부르게나.”

‘비센테? 영웅왕 비센테?”

-시기상, 그 놈의 아비쯤 되겠군.

‘거물이군.’

“나와 함께 왕도로 향해 주겠나?”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페르난데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기꺼운 일이다. 뒷배에 왕자의 지지를 지고 있다면, 행동이 더 없이 수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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