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59화 (60/388)

59. 정치가, 외교관, 기사

*

“강철의 도시. 문명의 방패. 아···.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이 도시의 정경은 예와 같구나.”

데인 왕국의 왕도, 알트베르트. 또는 언덕의 베르트. 말 그대로, 거대한 구릉지 위에 얹어진 도시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간 지방으로 이루어진 데인 왕국에 있어서, 드넓은 곡창 지대인 알트베르트 지방은 왕실의 보물과 같았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 때 마다, 보리밭이 융단처럼 일렁이며 흩어졌다. 그 전까지 보고 있던 울창한 숲과 깊은 산은 꿈이라도 되는 듯, 봄볕 아래 알트베르트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견고한, 잿빛 성벽이 도시의 외곽을 따라 늘어서 있고, 깊은 해자엔 푸른 강물이 굽이쳐, 평야 너머로 이어졌다.

“너무··· 아름다워요.”

키르하스는 말 위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막과 황무지를 거쳐, 그녀가 본 문명 사회의 대도시라곤 노예 시장과 인퍼머르 정도가 전부였다.

깨끗하게 닦인 관도 위를 느긋하게 이동하며, 헬르가 왕자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페이른 왕실의 도시들은 화려하고 실속이 없지. 우리 왕가의 도시들은 이처럼 검박하고, 실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실리라, 십구조를 말하는 거겠지?

헬르가 왕자의 말에 페이자쉬가 이죽거렸다.

데인 왕국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간 지대이며, 철광과 몇몇 은광을 제외하면 그나마도 쓸 만한 광물 자원도 부족한 국가였고, 그나마도 인퍼머르 회수 전까지 해상 무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가를 유지하는 자원은 두 가지였다. 강력한 육상 전력과, 지독한 세율.

아벨은 추억에 잠겨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키르하스는 감탄하고, 헬르가는 그를 자랑스러워하며, 아벨이 추억을 곱씹는 시간 동안, 페르난데스는 별 말 없이 걷고 있었다.

그는 점차 다가오는 성벽을 바라보며, 헬르가 왕자와 처음 대면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

“자, 페르난데스 경. 어디 한번 들어나 보지.”

-드르륵.

헬르가는 쾌활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찬란한 백금발이 등불에 샹들리에처럼 빛나며 주위를 밝혔다.

그는 낡고 먼지 덮인 여관의 의자에 괘념치 않고 테이블에 있는 맥주잔을 쥐었다. 왕자라기보단, 젊고 활기찬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본국이 직면한 위협 중, 오십년 전쟁보다 거대한 전쟁이 무엇인지 말야.”

헬르가의 눈이 사자처럼 빛났다.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처럼 반짝였다. 페르난데스는 이런 눈을 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소위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의 눈이다.

수많은 난관을 딛고, 역경을 마다하지 않으며, 고난 속으로 스스로 투신하여 마침내 영광을 쟁취하는 이들의 눈빛이다.

들불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용기로 태우고, 어둠 속 등대처럼 희망의 지주가 되는 이들의 눈이다.

‘어째서?’

전생에서, 데인 왕국을 이끌던 젊은 기사왕. 영웅왕 비센테의 아버지라···. 이 정도의 사내가 어째서 전생엔 왕위를 잇지 못한 것일까. 데인 왕국의 계보는 헬르가 3세에서, 비센테 2세로 곧장 이어졌다.

-헬르가 왕이 이상할 정도로 오래 살긴 했지.

‘오래 산걸까?’

거의 영생자라도 된 것처럼 오랜 치세를 이어간 헬르가 3세. 그가 과연 오래 ‘산’ 걸까? 네크로폴리스가 엮였었다는 정보가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뒤엉키며, 자그마한 실마리를 발견했다. 아직 가설에 불과했지만···.

-아마 그 가정이 맞을 거다.

‘헬르가 왕이 네크로폴리스의 꼭두각시였고, 이 왕자가 매장 교단을 파헤치는 과정에 희생당한다라···. 그렇게 가정하면 그림이 참 예쁘지?’

-한번 떠 보지.

페르난데스가 아무 말 없이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바이에미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 그새 말 하는 법을 잊었느냐?”

“아, 괜찮다. 바이에미어 경. 왕자를 만나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긴 하지.”

왕족을 만나 굳은 것인가? 젊은 기사라면 응당 다들 그렇겠지만···. 헬르가 왕자의 눈에 실망이 내려 앉았다. 그때, 페르난데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는 베이타서스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 이단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 갔다는 이야기는 후에 전해 들었네. 그 동안 무얼 했는가?”

“순수성을 증명하고 성당기사로 복무했습니다.”

-탁.

페르난데스는 품속에서 베이타서스 교회의 보증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바이에미어와 헬르가는 보증서를 굳이 펼쳐보지 않았다. 저렇게 올려둔 공문서가 거짓은 아닐 테니까. 그렇게 어설픈 수를 쓰는 자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동북부 해상을 지배하던 엘프가 원항을 시작하고, 서펜츠아일스의 프란츠리트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왕자님, 그 상황이라면 지금 왕국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인퍼머르의 확보와 동부 삼각 무역의 관세 조항?”

“페이른 왕실의 선전포고입니다.”

페르난데스는 북부 야만인들이 곧 공세를 시작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 십 년 안에 반드시. 그러나 그것은 전생의 기억이었고, 이를 증명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실주의자들을 설득할 수단이 있다면, 이들이 접하지 못한, 그리고 동시에 권위를 가진 기관의 정보 뿐이다.

“베이타서스 교회는 페이른 왕실이 워커 사태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데에 사건 발발에서 세 달을 예상했습니다. 왕국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면서, 왕권의 공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선 공격적인 외교 전술이 필요할 겁니다. 베이타서스 교회는, 페이른 왕실의 선전포고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헬르가 왕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명백히 갈등하고 있었다. 왕족에게 전란은 기회였다.

페이른과 데인, 두 왕국의 전력은 내륙에 한정한다면 비등했다. 워커 사태로 인해 해상 전력을 추스릴 충분한 시간을 갖추지 못한 페이른 왕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하지만 바이에미어는 원숙한 기사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테이블을 두드려 주의를 끌었다.

“그게 본질이 아닐텐데? 우리와 페이른이 전쟁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국지전에 불과할 거야. 어떻게, 그게 오십 년 전쟁보다 커질 수 있지?”

“동부 왕국 연합이 무너지게 된다면, 오십 년 전쟁은 제국의 패배로 끝맺을 겁니다. 지금 오십 년 전쟁은 술탄국과 서부 호족 혈맹을 상대하는 대리전이나 다름 없죠. 제국이라는 장벽이 사라진 이후에, 놈들이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까?”

“억측이다. 황무지를 관통하는 대원정을 그 누가 쉽사리 감당하겠나? 키르자트의 알’하쉬르가 아무리 미치광이 전쟁광이라 하더라도, 이 머나먼 동부까지 병력을 투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바이에미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원탁 의회는 단순한 기사들의 모임이 아니다.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숙한 정치가들이며, 동시에 외교관들이고, 또한 영주들이었다.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지독히 어려운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서 깍지를 꼈다.

“인퍼머르의 엘프가 증발한 이후, 프란츠리트가 침묵했던 것이 우연 같습니까?”

“뭐?”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조합한다면.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적어도 정보전과 기만술의 방면에서, 달인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프란츠리트의 군함들이 그 날을 기점으로 관측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같습니까? 이제 해상에서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는데도 놈들이 해안을 습격하지 않는 이유가?”

“···말을 끌지 말게.”

바이에미어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한 순간, 이 청년의 음울한 눈빛에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여든 살은 족히 먹은 노련한 정치인 같은 눈빛이었다.

“오십 년 전쟁에서 제국이 패하고, 대륙 북부에 지배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페르난데스는 예언가처럼 말했다.

“엘프 왕의 견제에서 벗어난 프란츠리트가 동북부에서 벗어나, 북부 전역 해안선에 완벽한 해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놈들에겐 내륙을 침략할 군세가 부족해. 내륙에서 그 반편이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바이에미어는 공포를 떨치듯 단언했다. 여관의 등유가 일렁이며 테이블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의 눈에 그것은 마치, 그림자에 덮여 가는 대륙 지도처럼 보였다.

“동부 왕국 연합이 전쟁으로 무너지고, 대륙 동부가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면. 프란츠리트는 내륙에 투사할 병력을 구해올 수 있습니다. 대륙 문명 도시들을 그 누구보다 증오하는 이들이. 프란츠리트와 뜻이 일치할 만한 자들이 있죠.”

“···북부 야만인들···!”

헬르가가 억눌린 신음을 내질렀다. 그는 경악에 물든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눈 앞의 청년은 애송이 기사가 아니었다.

“박쥐 놈들의 군함을 운송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래. 가능하겠지. 하지만, 하지만 경의 말은 모두 가정 아닌가?”

바이에미어는 이제 거의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르난데스의 말이 그저 망상에 불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페르난데스는 이제 이 두 사람이 완전히 설득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쐐기가 부족할 뿐.

“베이타서스 교회의 판단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교회가 직접 나서지 않나?”

“제가 이름을 숨기고 이 나라에 들어온 이유가 그것이라면, 직접 나서지 않는 데에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까?”

교회가 문명 사회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암묵적 금기에 해당했다.

어느 정도의 조율과 조언 수준의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었지만, 선신 만신전이 봉문된 이 시대에 실권을 쥔 각 왕실과의 적대 관계는 교회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문명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은 이처럼 익명의 요원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직 이를 눈치채지 못한 헬르가 왕자와는 달리, 바이에미어는 미묘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베이타서스 교단의 외교관이군.’

두 왕국의 전쟁을 막기 위해 파견된 외교관이라 한다면, 결코 녹록한 인물을 보내진 않았을 터.

데인 왕국의 귀족 출신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무력이 출중하고, 상당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을 파견했을 것이다.

이 청년처럼. 바이에미어는 죽은 친구의 서자를 바라보는 눈에서, 외국의 노련한 정치가를 바라보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헬르가 왕자는 식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페이른 왕실의 평화 의지가 아니다. 페르난데스 경.”

“헬르가 3세 폐하의 의사겠지요.”

“그래. 그리고 아바마마께선 아마도···.”

“전쟁을 바라고 계시겠지요.”

페르난데스는 마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전하께서 지금 이렇게, 야음을 틈타 외유하시는 이유 또한, 폐하 탓이 아닌지요?”

“···베이타서스 교단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폐하께서 단순히 연로하셔서 판단이 흐려지신 것이 아니란 정도를.”

헬르가와 바이에미어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 순간 나온 말이 밖으로 흘러 나간다면 역모에 준하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두려워하는 상황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조사로는, 매장 교단이 폐하께 암수를 뻗었다는 것을.”

“제기랄. 바이에미어!”

“네, 전하!”

-스르릉!

바이에미어는 재빨리 칼을 뽑고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만일 누군가가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준비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허사가 될 것이다!

헬르가는 눈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청년의 몸이, 어느새 거대하게 부풀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청년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왕족을 만나 굳은 어리숙한 청년 기사? 아니, 아니다.

이 청년은···. 아니, 이 기사는. 그저 자신을 떠보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 그릇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 지 보고 싶다는 듯이.

헬르가는 소름이 돋는 팔을 애써 숨기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제가 전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

바이에미어는 아무 말 없이 말을 모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죽은 친구의 아들이 장성한 것에 기뻐하기엔, 녀석은 예상보다 너무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냥 순박하고, 재능 있는 젊은 기사 정도면 충분했어. 루카스. 제기랄. 아들 복이 과하지 않았나.’

녀석과 동년배 중, 저 정도의 식견과 무력을 동시에 지닌 놈이 얼마나 될까. 바이에미어는 왕실 기사들의 목록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명문가 출신 청년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헬르가 왕자였다. 그런 왕자조차 저 청년보다 나은 점이라곤 무력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네 아들한테 신경 쓰지 못한 벌이냐? 루카스.’

루카스의 동생, 다니엘 세르너드 남작은 정치적이고 설득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는 루카스가 죽은 이후 빠르게 세르너드 영지를 장악하고 이를 인정받았다.

대외적으로는 섭정공이었지만, 그가 영지를 승계하는 것에 반발할 귀족이 특별히 없었다.

바이에미어 또한, 세르너드 촌구석을 신경쓰기엔 과히 바쁜 사람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성인이 된 이후에 그의 후견인이 되어주는 정도가 그에게 가능한 최선이었다.

그러나 정작 페르난데스는 성인이 되는 날 제 삼촌과 사촌을 모두 죽이고 이단심문청에 끌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줄 수 있었겠는가. 바이에미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알트베르트의 관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달려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찬란한 백금발이 바람을 타고 일렁거렸다.

“전하, 공주님께서 오십니다.”

“아··· 제길. 나 모르는 척 해.”

헬르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멈췄다.

“오라버니, 외유가 기셨습니다?”

“···모리아. 내가 오는 지는 어떻게 알았나?”

헬르가의 날 선 목소리에, 모리아는 싱긋 웃으며 말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오라버니 걱정에 언제나 망루 위에 있었답니다.”

“감시는 왕성 안에서도 충분했다. 모리아. 나는 피곤하다. 그럼 다음 기회에···.”

“그러지 말고, 같이 오신 분들을 소개해 주시지요.”

모리아의 에메랄드 빛 눈이 페르난데스의 얼굴에 멈췄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걸로 퍼즐이 완성되는군.’

-점점 일이 재미 있게 되어가는구나.

페이자쉬가 큭큭거렸다. 비전 시야의 마력이 페르난데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 도시를 휘감고 있는 마력에 대한 것과—

‘설마 공주를 사로잡았을 줄이야.’

모리아의 눈에 얽힌 흑마법의 흔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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