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우리는 표류자들이다.
*
“나와 내 손님들은 먼 길을 달려 왔다. 모리아. 이 무슨 무례란 말이냐?”
헬르가 왕자는 눈을 매섭게 치켜 올렸다. 모리아는 그런 그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기사였다. 바이에미어와 헬르가가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명문가의 자제는 아닐 것이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오라버니. 궁내대신인 제가 이방인의 정체도 파악하지 않은 채 입궐을 허락해서야, 직무 유기가 아니겠어요?”
“언제부터 네가 네 관직에 그리 관심이 많았느냐?”
“어머? 오라버니의 잦은 출타에도 왕가의 일원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홀로 도맡아 하고 있는데,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세요?”
모리아는 그녀를 무시하고 성으로 향하는 헬르가에 보폭 맞춰 말을 이끌며 싱그럽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헬르가와 모리아가 대화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모리아에게 남겨져 있는 흑마법의 흔적을 읽고 있었다.
‘놀랍군. 좋은 스승을 둔 것 같아.’
-매장 교단의 주력은 네크로맨시인데···.
‘정신계 학파라. 멘탈리스트들이 그렇게 흔하지 않으니, 보면 알겠지.’
기안-켈의 비전 시야는 대단히 강력한 유물이었다. 분석과 추적에 있어서, 같은 급수에 둘 수 있는 유물을 거의 찾기 어려웠다. 당장 기안-켈과의 일전에서도, 그는 페이자쉬의 존재를 눈치 챈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유물의 힘을 빌리고서도, 모리아가 감추고 있는 흑마법의 잔향은 지극히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가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그래서, 그대의 이름이 뭐지, 이방인?”
“실례했습니다. 공주님. 세르너드의 알베르트라고 불러 주십시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나도 반가워. 오라버니를 보필하는 새 시종인가?”
모리아는 노골적으로 페르난데스를 모욕했다. 또래의 평범한, 그것도 왕자를 보필하는 명예를 얻게 된 시골 기사라면 이런 모욕에 반드시 반응할 것이다. 모리아는 만약 이 젊은 기사가 분을 참지 못해 무례를 범하면, 곧장 근위대를 부를 작정이었다.
“모리아···!”
헬르가 왕자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때, 페르난데스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영광스럽게도 저를 수도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흠? 그래?”
모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왕족의 권위에 굴종하는 모습도, 분을 삭히는 표정도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상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귀족이며, 무력과 명예를 숭상하는 기사들은 일반적으로 이 나이에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곤 한다. 모리아는 곧 즐겁게 웃었다.
“환영해, 알베르트 경. 다시 만날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
“영광입니다. 공주님.”
모리아는 헬르가 왕자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별 말 없이 멀어졌다. 헬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거의 잡아먹을 듯이 이를 갈았다.
“불명예스러운 언사였군. 경이 이해하시게.”
“저는 세속의 명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왕자 전하. 신경 쓰지 마시길.”
페르난데스는 그런 왕자의 모습이 오히려 우스웠다. 동부 왕국 연합의 기사들은 명예와 영광에 과도하게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따금씩은, 그것이 군주의 정당성과 왕권을 다지기 위한 도구라는 점을 망각한 채로.
“그래, 어디에 머무를 작정이냐? 궐내에 자리를 마련해주랴?”
“폐하를 알현할 기회만 준비해 주십시오. 저는 교회를 들러 보아야겠습니다.”
“만신의 거리는 북문 대로에 있다. 내 처소는 내성 성하의 3번로에 있다. 필요하거든 편할 때 찾아 오거라.”
바이에미어는 왕자와 함께 말을 몰아 멀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왕자에게 짧게 인사하고는 곧장 말머리를 돌려 북문으로 향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키르하스. 서문으로 가서 그 근방 연금술 공방들을 수색해. 직접 침입하지 말고 거리를 잘 잡아라. 자정에 찾아가겠다.”
“네, 은공.”
페르난데스의 말에, 키르하스가 고개를 숙이고는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공주의 검지 손톱.’
모리아 공주의 검지 손톱과 손가락 끝이 연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멍이 들었거나 상처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특별한 약제를 다룰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아라젤모네···.’
또는 아라젤모네를 원료로 쓰는 약품. 보기 드문 약제를 공주가 다루었다는 것은, 그 시약을 도시 내부로 유통하는 연금 공방의 수준이 제법 괜찮게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연금 공방은 대개 왕궁 내부에 있지 않은 법이었다. 시약 누출의 위험이 있으니까.
비전 시야의 정보에 따르면, 마력 얽힘이 가장 복잡하게 나타난 곳은 서문 방향 인근이었다. 그 위치부터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
모리아는 궁궐로 향하는 헬르가를 먼 발치에서 내려보고 있었다. 내성의 갤러리엔 그녀의 근위 기사가 시립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팔을 뻗었다.
-휘이이익.
그녀의 새하얀 팔 위로, 비둘기가 사뿐히 내려 앉았다. 그녀는 흥얼거리며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 왕자가 다녀온 곳이 바르베스 남작령이라고?”
“예, 전하. 팔리아메인의 기사 둘이 실종된 지역입니다.”
“쯧, 고작 워커 소동으로 기사를 잃다니. 팔리아메인 경도 예전 같지 않군.”
바르베스 남작은 원탁 기사, 팔리아메인의 측근 중 하나였다. 고작 워커 사태 정도에 기사를 잃은 팔리아메인도 우스웠지만, 영지 내에 일어난 워커 소동을 진정시키지 못한 바르베스 남작의 능력 또한 구설수에 올랐었다.
그 직후 일어난 가이메른 왕실의 몰락 덕에 소문이 빠르게 진정되기야 했지만, 그 일로 팔리아메인이 명성에 타격을 입은 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다행 아니겠습니까. 원탁 기사들은 이제 늙은이들에 불과합니다.”
“그래. 구시대의 유물이지. 이빨 빠진 사자들. 후후, 왕자가 눈치 챈 것 같더냐?”
“짐작이야 하고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 녀석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미 돌이킬 수는 없지.”
모리아는 가볍게 팔을 털어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비둘기의 다리에 매달린 작은 편지를 바라보며, 모리아는 기분 좋게 웃었다.
“네가 내게 해줄 일이 있구나.”
“하명하십시오.”
“알베르트라는 기사를 떠보거라. 실력, 사상, 목적까지. 왕자가 굳이 동행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죽여도 괜찮겠습니까?”
“세르너드는 산촌에 불과하고, 녀석은 편력 기사다. 노상에서 횡사하는 것에 무슨 소란이 있겠느냐?”
눈먼 칼날에 목숨을 잃는다면,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이겠지. 설령 그렇지 않아도 좋다. 왕자의 계획이 어찌 되었건 간에, 누가 나를 막아 설 수 있을까. 모리아는 궁궐이 내려 보이는 내성의 갤러리 위에서 바람을 맞았다.
-쏴아아아아···.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드넓은 보리밭이 바람에 따라 흩어지며 시원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초봄의 들판은 아름다웠다.
*
아벨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만신의 거리에 들어설 때 까지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로소 세월이 흘렀음을 알겠다.”
“도시의 풍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오?”
“내가 이 도시 위를 날던 그 때보다 더 크고 융성하다. 그땐 목책을 두른 거주지에 불과했지.”
아벨은 잘 닦인 도로와, 도시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석조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알트베르트는 초가와 목조 건물들, 그리고 야전 천막들이 늘어선 숙영지에 가까웠다.
이 도시는 기사왕 다인이 직접 언덕 거인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세운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아벨은 언덕 거인의 피가 이 목초지를 잔뜩 적시던 때를 기억했다.
험난하고 척박한 시절이었지만, 희망과 명예가 있던 때였다. 사람들은 순수하고 소박했다. 아벨은 이 차가운 석벽들이 늘어선 도시에서, 홀로 과거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이 도시를 감도는 기묘한 냄새는 지옥 마력의 잔향이었다. 용의 예민한 감각이 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도시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서글픈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페르난데스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 도시도 이렇지 않았소.”
“그래? 전생엔 어떠했느냐?”
아벨의 슬픈 눈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그 시대 동부 왕국 연합은 몰락 직전에 있었지. 동부의 왕국들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소.”
기근과 역병, 타락과 전쟁. 칠흑의 에리크가 일으킨 침략의 시대를 견디고 간신히 재활하고 있던 데인 왕국은, 대전쟁의 초창기에 멸망한 수 많은 왕국들을 통합하고 거대한 전선을 구축했다.
영웅왕 비센테가 이끄는 원탁 기사들은 동부 왕국의 희망이었다. 타락하지 않은 동부 왕국의 인간들은 희망을 찾아 이 도시에 모여들었다.
“이 도시의 별명은 불굴의 언덕이었지. 이 도시는 대륙 동부에서 가장 순수한 땅이었소. 지금의 모습이야 어쨌건, 머지 않은 미래에 이 도시는 그렇게 될 것이오.”
“아, 페르난데스.”
아벨의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녀의 푸른 눈이 맑게 빛났다.
“우리는 표류자들이구나. 각자의 시간에서 떠나 먼 길을 왔어.”
페르난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류라, 이 시대에 떠밀려온 그녀는 표류자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는 그녀처럼 스스로를 표류자라고 여길 수 없었다. 멀고 희미하지만, 그에겐 확실한 목적지가 있었다.
아들아.
페르난데스는 어느새 다가온 베이타서스의 교회를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는 열쇠검 문양이 화려하게 양각된 교회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말 아래로 내려섰다.
-찰팍.
돌길 사이에 고인 빗물이 그의 발치에 흩어졌다. 그는 투레질하는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 시대에 홀로 돌아와 다시 나아가고 있다.
너와 나는 육십 년을 등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렇지만.
그는 말 위에 앉은 아벨을 바라보았다. 가을 낮의 밀밭을 닮은, 눈부신 금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찰랑거렸다. 그는 아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벨은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다행히 너에겐 등대가 있구나.”
“당신 또한 그랬으면 하오.”
“이미 있다.”
아벨은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왕의 어전은 궁궐의 가장 거대한 회랑 끝에 있었다. 석주 사이로, 창 밖에서 내리 쪼이는 빛이 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헬르가 왕자는 회랑을 천천히 걸으며 점점 숨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한때, 어전을 걷고 회랑의 석주에 그려진 영웅들의 서사시 사이에서 즐겁게 뛰어 놀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옥좌에 기대어 누워 있는 노인을 올려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헬르가 3세. 한때 영민하고 강인했던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노왕은 탁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찌···되었느냐···?”
“바르베스 남작은 여전히 왕실에 충성합니다. 폐하. 팔리아메인 경의 충성심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뿔나팔을 부신다면, 왕의 기수들은 고민하지 않고 폐하께 검을 바칠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네가 아니냐···?”
“···폐하?”
노왕은 쿨럭이며 몸을 일으켰다. 시종들이 황급히 다가와 노왕의 몸을 부축했다. 왕의 긴 로브가 바닥에 끌렸다. 왕은 헐떡이며 왕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내··· 전해 들은 바가 있다···. 너와 바이에미어가 병력을 꾸리고 있다지···?”
“···인퍼머르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퍼머르는 우리의 항구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 쿨럭! 어찌. 병력을 해산하지 아니하느냐?”
“폐하. 프란츠리트의 흡혈귀들이 사라졌습니다. 아직 사태가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저 자리더냐?”
노왕의 떨리는 손가락이 옥좌를 가리켰다. 노왕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시종들의 부축을 쳐냈다. 그는 왕자의 앞에 바싹 다가가 섰다.
“네가··· 정녕···?”
“폐하! 정녕코 저를 의심하십니까?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니라, 모리아. 그 계집입니다!”
-철썩!
왕자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그의 입술이 찢어져 핏물이 한 줄기 턱을 타고 흘러 내렸다. 노왕은 분개한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시종들이 황급히 왕의 몸을 부축했다.
“네가 감히···. 감히, 네 동생을 모함해!”
“....”
왕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강인한 군주, 왕국을 부흥시키리라 모든 신하들이 기대하던 성군. 헬르가 3세의 찬란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왕자는 찢어진 입술을 씹어 상처를 벌렸다.
“꺼져라! 꺼져! 쿨럭!”
“···만수무강하소서.”
왕은 마른 기침을 터트리며 소리질렀다. 왕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어전을 등지고 걸었다. 거대한 석주 사이로, 언덕 거인을 무찌르는 데인 왕의 묘사화가 그려져 있었다.
초원 위를 나는 용과, 쓰러져 피를 흘리는 언덕 거인. 그리고 그 시체 위에 서서 칼을 치켜 들고 있는 위대한 기사왕의 그림이 보였다.
한때, 왕자는 어전의 회랑을 사랑했다. 회랑의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들까지도.
“전하, 괜찮으십니까?”
“바이에미어는?”
“처소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준비하라 일러라.”
왕자는 입 안 가득 퍼지는 혈향을 삼키며 말했다. 그의 기사들이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왕자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사자처럼 빛났다.
“때가 임박했다.”
“왕가의 영광을.”
“영원한 영광을. 제군들.”
그들은 왕자가 직접 전 국토를 외유하며 고르고 고른 그의 가신들. 명문가의 일원이 아닌, 재야의 인재들. 왕실이 아닌, 오로지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었다.
헬르가 왕자는 날선 눈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긴 회랑의 끝에 용의 머리가 장식된, 굳게 닫힌 어전의 문이 보였다.
혈향이 코 밑을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