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불타는 도시, 알트베르트 (1)
*
알트베르트의 베이타서스 교회는 엄숙하고 경건했으나, 소박했다. 광명신 샤일드를 주신으로 삼는 탓에, 데인 왕국에서 베이타서스는 그다지 인기 있는 교파는 아니었다.
-끼이익.
묵직한 교회의 문을 열고, 페르난데스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예배당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비치는 색색의 볕으로 화려하게 물들어 있었다. 열쇠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한 사제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예배 시간은 지났습니다. 교우님.”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사제님.”
“길 잃은 양이여, 환영합니다.”
사제는 천천히 일어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군신의 사제답게,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사내였다. 사제의 다부진 체격과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다. 사제는 페르난데스에게 손을 뻗었다.
“쉼터가 필요하십니까?”
“정보가 필요합니다. 부디, 저를 알베르트라고 불러 주십시오.”
“막토, 교우님. 저는 바레인입니다.”
“막토 수페를라우도.”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레인 사제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이 소리 없이 열렸다.
-형제여, 필요한 것이 있나?
-장소.
-따라오게.
둘은 말소리 없이 입술로 대화하며 사제실로 향했다.
*
사제실은 검소하고 무기질적이었다. 속세의 사치를 혐오하는 베이타서스 교단의 사제실 다웠다. 바레인이 물 한잔을 따라 내어오자 페르난데스가 입을 열었다.
“형제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며칠 되었다. 페르난데스 형제. 형제님의 임무는 듣지 못했는데, 이 근방이었나?”
“저는 지금 본청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린 모두 언젠가 한 번은 길을 잃고 방황하지. 형제여.”
바레인은 따듯하게 웃으며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수많은 메모와 종이가 붙어 있는 알트베르트 지도였다.
“자,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가?”
“먼저 형제님의 임무를 듣고 싶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단 사건이 접수된 기록을 보지 못했는데요?”
“며칠 전, 샤일드 사제들의 실종 사건이 있었네. 그 조사를 위해 내가 이 지역으로 파견되었지.”
확실히, 헤레티카가 나설 만한 임무이긴 했다. 바레인, 본명은 알 수 없었지만 페르난데스 또한 사슬끊기 임무 브리핑 당시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저는 이 지역 토착 이단 신앙과 관련된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매장 교단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기록상 몇 건 있었지.”
만신전의 이단 조사 및 심판 권한은 베이타서스 교회에 있었다. 교단의 방대한 이단 기록들 중엔 매장 교단에 대한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바레인의 조사 기록들이 붙어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샤일드의 사제가 실종된 지역은 도시 서부, 시장 거리 쪽이었다.
“제 토치맨이 마침 이 쪽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형제님. 공을 빼앗는 격이 되지 않는다면 오늘 밤 제가 먼저 이 지역을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다른 쪽에 작업을 하고 있었네. 상관 없어.”
바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바이에미어는 그의 갑옷을 조심스럽게 기름 먹인 천으로 닦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갑옷을 입고, 적진을 향해 질주한 것이 언제던가.
-똑똑.
“바이에미어 경,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어서 오게나.”
젊은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이에미어는 손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았다. 왕자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이름 없는 가문의 서자로, 갑옷은커녕 좋은 칼 한 자루도 물려받지 못했던 반편이를 왕자와 그가 거두었던 기억이 있다.
“제이른 경. 어쩐 일인가?”
“왕자 전하께서, 준비하라 전하셨습니다.”
“팔리아메인 경은?”
“하루 거리에 주둔 중입니다.”
-저벅. 저벅.
제이른은 천천히 다가오며 대답했다. 제이른의 서코트 아래로 사슬 갑옷이 절그럭거렸다. 바이에미어는 제이른의 소드벨트에 매달린 장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자네 무장했나?”
“곧 피바람이 불 테니까요.”
“하하, 젊군! 좋아. 그래, 그 외에 전할 말이 있나?”
“아, 모리아 공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
제이른은 천천히 칼자루를 쥐었다. 바이에미어가 반응하기도 전에, 제이른은 칼을 뽑아 올리며 이죽거렸다.
“지금 원탁 기사들은 이빨 빠진 늙은이들이다.”
“···하. 너 이 더러운···.”
“그리고, 가장 먼저 원탁 기사를 처치한다면 다음 원탁의 자리는 네 것이다.”
“배신자···. 왕자 전하의 은혜를 이렇게 갚다니!”
“어차피 팔리아메인 경은 도착하지 못합니다. 공주 전하께서 이미 헬르가 왕자의 계획을 모두 알고 계셨으니까요.”
바이에미어는 자신의 검을 찾았다. 편하게 갑옷을 정리하던 탓에, 그의 검은 저 멀리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제이른은 서두르지 않고 칼을 쥐고 섰다. 깔끔한 자세였다. 그가 직접 가르쳤던···.
바이에미어가 슬프게 웃었다.
*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졌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허벅지 위에 얹고 있던 칼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던 아벨이 부스스 일어나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느냐?”
“조금 더 쉬시오.”
“아니다. 나를 여염집 아낙으로 착각하느냐? 나는 용이다.”
“그러니 쉬라는 것이오. 곧 용이 필요해질 수도 있으니까.”
차마 페르난데스는 그녀가 너무 화려해서 잠입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아벨은 눈치 빠르게도 이를 알아채곤 시무룩해졌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신할 수는 없다. 미안하구나.”
“미안할 것이 뭐가 있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그는 소드벨트에 장검을 차고, 단검들을 허리춤에 꼽아 넣으며 말했다.
“고얀 녀석. 다치지 말고 돌아오거라.”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
알트베르트는 통행 제한 시간이 없는, 자유로운 도시였다. 원탁 의회와 왕실 근위대가 있는 곳에서 헛짓거리를 벌일 만큼 간 큰 범죄자들은 적어도 한 세기 전에 모두 죽었을 테니까.
그 탓에, 도시의 시장 거리는 밤에도 야간 개장을 하는 가게들로 북적였다. 데인 왕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인 탓에, 물류의 흐름이 항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시장 거리를 둘러보다가, 먹거리를 파는 가게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상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추적이 붙었어.
‘알아. 모리아일까?’
-그 마녀는 심계가 깊어. 아마도 우릴 떠보기 위함이거나, 혹시 모를 위협을 제거하기 위함이겠지.
‘오히려 좋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휴식 덕에 몸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복부의 관통상도 지금은 거의 완치되어 가고 있었다. 거의 트롤에 가까운, 놀라운 속도였다.
그는 몸을 틀어 골목 안으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따라 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충분히 인적이 드물어진 것을 확인한 페르난데스가 몸을 돌려 다가오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잘 무장한 용병처럼 차려 입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페르난데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스운 연기였다.
“공주가 보냈나?”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언제 비틀거렸냐는 듯 놈은 페르난데스를 경계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눈치 채고 있었나?”
“그렇게 티나게 움직이면 세 살 꼬마도 눈치 채겠지.”
“제법이군.”
-스르릉.
놈이 칼을 뽑아 들며 웃었다.
“네 왕자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은 성공할 수 없다. 젊은 기사. 너는 여기서 죽게 될 거야.”
“...어.”
매장 교단을 쫓는 것 말고,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었나? 왕자의 기색이 흉흉하긴 했지만, 그는 페르난데스에게 별 다른 부탁을 하거나, 계획을 설명하진 않았었다.
-이거 반란을 준비했나본데?
‘그게 실패한거고?’
-전생에서는.
‘그래서 비센테 2세 전까지 헬르가 3세가 집권했었군. 모리아가 그 배후에 있었고.’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원탁 의회의 지지를 받는 헬르가 왕자가 왕위를 이양 받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헬르가 3세의 장기 집권 탓은 아니었군. 페르난데스는 사내를 따라 웃었다.
“이번엔 성공할거야.”
“뭐?”
사내가 멈칫하자, 페르난데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 것도 쥐어있지 않던 손 안에서 단검이 튀어 나왔다. 사내가 채 준비하기도 전에, 단검이 쏘아져 날아갔다.
-챙!
“큽! 이건 명예롭지 못한···!”
사내는 재빨리 단검을 쳐냈다. 어두운 골목 안에서 검은 재가 발라진 투척용 단검을 쳐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사내는 뛰어난 기사였고, 간신히 크로스가드로 단검을 막아낼 수 있었다.
불의의 기습이었지만, 막았다! 사내는 칼자루를 재빨리 내리며 뛰어나갈 준비를 했다. 검격을 나눈다면 지지 않을—
-콰직!
어느새 그의 눈 앞에 다가온 페르난데스가 사내의 목을 쳤다. 사내의 머리가 잠시 허공에 멈췄다가, 피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는 사내의 머리를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칼을 한번 튕겨 피를 털었다.
‘모리아가 어떻게 왕자의 반란을 막았지? 암살인가?’
-이 시기에 왕자를 암살했으면, 비센테 2세가 태어나지도 못했겠지.
‘공주에게 그럴 만한 병력이 있었을까?’
-왕국 내부에선 아니겠지. 군권은 원탁 의회가 쥐고 있는데. 다른 방식이 있었을···.
-쿠우우웅!!!
그때, 시장 거리의 한 구석에서 큰 불이 피어오르며 진동이 일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벽을 박차고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시장의 한 거리가 통째로 불에 타고,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불이야!!”
“근위병!! 근위병!! 불이 났어!!!”
“도망쳐!! 번진다!!”
시장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낮게 신음하며 불길 사이에 번쩍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화염 속에서 희미한 약초 냄새가 났다. 연금 공방의 폭발이었다.
“키르하스···. 잠입하진 말라고 했었는데···.”
불길 사이에서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키르하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불길에 그을린 채로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
“공주님!! 공주님!!”
“무슨 일이냐?”
모리아 공주는 황급히 뛰어 들어온 시종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섬세한 배합으로 시약을 만들고 있었고, 이런 순간에 집중이 깨어져 약품을 망치게 된다면 이 귀한 약품들을 버리게 될 것이었다.
“시, 시장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걸 나한테 알리는 이유는?”
“연금 공방이 불에 타고 있습니다!!”
“···뭐?”
왕자의 짓인가? 하지만, 연금 공방을 눈치 채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모리아는 시약이 엎어지는 것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벌떡 일어나 외쳤다.
“스, 스승님은?!”
“연락이 없습니다! 어, 어쩌지요?”
“스승님은 불길을 다룰 줄 아시는 분이시다!”
불이 났는데, 이를 진압 하지도 못한 채 이렇게 공개적으로 사태를 키웠다면. 그것도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스승에게 변고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계획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준비했던가!
“채비해라!! 내가 직접 가보아야겠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 쓸모 없는 사내들이 일만 잘 처리했다면, 왕자는 지금 손발이 끊긴 상태일 거야.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모리아는 급히 외투를 걸치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