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불타는 도시, 알트베르트 (2)
*
시장에 번진 불을 막아내기 위해 근위병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불길의 경로에 있는 건물들을 파괴하며 물을 끼얹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로 지붕 위를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은공! 은공!!”
-콰지지직!
붉은 창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발치에 박혔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뒤로 뛰어 물러서며 칼을 휘둘렀다.
-챙!
그녀의 눈 앞까지 다가온 창을 튕겨내며 그녀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화염으로 약해진 기둥 탓에, 그녀가 밟고 서 있는 지붕은 작은 충격에도 곳곳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 계집!!”
-콰지직!
다시, 창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키르하스가 아닌, 그녀가 딛고 있는 지붕을 향해. 키르하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었던 것도, 수인족 다운 균형감각 덕이었지만. 이제 디딜 바닥 자체가 없었다.
“꺄아아악!!”
그녀의 몸이 화염이 이글거리는 건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있는 힘껏 부서져가는 지붕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녀의 몸이 허공 위에서 아찔하게 매달렸다. 그런 그녀의 뒤로, 천천히 놈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짐승. 이제 끝이다!”
“누구 맘대로?”
-저벅.
그 순간, 키르하스의 귀가 번쩍 치솟았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발걸음. 그리고 익숙한 냄새! 곧 지붕 끝을 잡고 있는 그녀의 팔을 단단한 손이 붙잡고는, 엄청난 힘으로 그녀를 끌어 올렸다!
“은공!”
“고생했다.”
키르하스는 정신없이 페르난데스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그녀의 꼬리가 바싹 서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그녀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키르하스는 그에게 안겨서 조금씩 갸르릉거렸다.
“내 종사에게 무슨 짓이지?”
“저 더러운 짐승이 내 공방을 불태웠다!”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가 지붕 위에서 페르난데스에게 소리질렀다. 기사? 마법사? 그는 페르난데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은공, 저 자는···.”
“괜찮아. 쉬어. 나도 보여.”
페르난데스의 목에 걸린 비전 시야가 맹렬히 가동하며 마법사의 몸에 얽힌 마법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모리아가 누구에게 마법을 배웠나 싶었는데, 제법 전통적인 학파에게서 배웠나 보군. 페르난데스는 로브 아래로 보이는 익숙한 마법에 미소 지었다.
“첼리니. 오랜 만이군.”
“···날 아나?”
“더 좋은 때에 만났으면 좋았을거야. 이 시기엔 여기에 있었군.”
“무슨 개소리지? 넌 누구야.”
마법사는 움찔 떨며 거리를 벌렸다. 마법사의 손이 허공에 재빨리 얽히며 수인을 짚어 냈다. 순서대로 작성, 개입, 조각, 관통!
-지금 시기가 저 계집의 전성기에 거의 근접할 때로군.
‘경험은 우리가 알던 그 첼리니보다 훨씬 떨어져.’
순식간에 네 번의 수인을 짚은 마법사의 손 끝에서, 붉은 창이 날아들었다. 단순하지만, 빠르다! 페르난데스는 한 손으로 키르하스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뽑아 창을 쳐냈다.
-챙!
칼날이 진동하며 창을 박살냈다. 정확한 모멘텀의 일격이었지만, 칼날이 크게 상하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파괴력, 더 무서운 점이라면. 저것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거란 점이다!
“키르하스. 바이에미어 경의 집 위치, 기억해?”
“네, 성하 3번로···. 네, 알아요.”
“가서 경고해. 모리아가 곧 움직일 거라고.”
“네, 은공. 조심하세요!”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품 안에서 벗어나 재빨리 뛰어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수인을 멈춘 채 그를 노려보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자신감이야. 내 정체를 알면서, 혼자 날 상대하겠다는 거야?”
“첼리니. 모리아가 네 학파를 이었다고 쳐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겠지. 나도 너한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조용히 대화하기엔 너무 많이 왔어. 팔다리를 우선 뽑아내고, 그 다음 네 뇌에 직접 물어보마.”
‘준비 됐어?’
-나야 뭐 준비랄 게 있나?
‘계획대로 가자. 공격은 내가 맡는다.’
마법사가 수인을 짚는 것과 동시에, 페르난데스 또한 왼손을 뻗어 수인을 짚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맺는 수인은 정밀함과 속도가 크게 떨어지지만, 경험과 지식으로 이를 극복하여.
“역시! 마법을 배웠군, 꼬마!”
-콰지지직!
마법사의 손에서 붉은 번개가 튀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뻗어 번개를 꿰뚫었다. 번갯불이 칼날을 휘감고 그의 오른팔을 갉아 먹었다. 살이 터지고, 화상이 굵은 뱀처럼 그의 팔을 타고 올랐다.
“크흑!”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칼을 털어 잔류하는 마력을 흘리고, 동시에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마법사와의 거리는 십오 미터! 디모니카의 출력으로 다섯 번 도약하기 전에 도달할 수 있다!
-구축.
왼손이 수인을 한 수 짚으며, 그의 머리 뒤로 검은 헤일로가 떠올랐다. 불완전한 청동 왕좌의 기능상, 그에게 남은 기회는 하루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뿐!
-콰지지직!
마법사의 손에서 다음 번개가 튀었다. 페르난데스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해내며 다음 지붕을 박찼다. 그의 허리가 감기고, 바닥을 박차 올라 한 번 더 뛰어 올랐다!
-여력.
수인이 한 수 더 얽히고, 더욱 단단하게 맺힌 마력 얽힘이 페르난데스의 왼팔을 타고 구현됐다.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에 떠 있는 검은 헤일로에서 가시가 뻗으며 타오르고—
-콰아앙!!
“이 놈!!”
다시 한 번 더! 지붕을 박차 오르며 공중으로.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허물어지는 지붕의, 그 허술한 디딤판 위를 타고 오르며 마법사에게 한 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남은 거리는 6 미터 정도.
-육신.
그의 머리 뒤에 떠오른 헤일로가 검은 불길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마법사는 주춤 물러서며, 붉은 창을 뽑아 던졌다. 페르난데스의 칼날이 창을 막아서고, 박살나며 공중에 비산했다.
“이제 끝이다!!”
“그래. 이제 끝이지!”
‘페이자쉬! 청동 왕좌의 기능은 오 분이 한계야!’
-내게 오 분이면 차고 넘치지.
마법사의 다음 공격이 시작하기 전에, 마법사는 수인을 짚던 손을 잠시 멈추고, 멍하니 다가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불길로 어그러진 시계 탓에 잘못 본 것일까? 그의 등 뒤에 날개가 돋아나는 것처럼—
‘날개가 아니야···. 저건···?’
페르난데스의 몸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그녀도 이제 명확하게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놈의 등 뒤로, 희미한 빛을 명멸하는 영체가 떠올랐다. 바싹 마른 노인의 앙상한 팔이!
보조술식, 삼두육비. 두 개의 손을 구현하는 것이 한계였지만, 페이자쉬가 조작하는 두 손이라면 역주술을 시도하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청동 왕좌가 마련한 시간은 단 오 분의 구현 뿐. 페르난데스는 부서진 칼을 집어 던지고, 한 손에 투척용 단검을 뽑아 들었다.
-콰지지직!
마법사는 입술을 깨물며 다가오는 페르난데스에게 번개를 쏘아 내려 했다. 수인이 빠르게 짚이고, 마력이 회로를 타고 그녀의 손끝에서 실체화되며—
‘이건!!!’
-두두두두!
마력이 모이는 매 순간마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교하게, 마력 쐐기가 박히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기겁하며 다른 마법을, 또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소용 없었다. 그녀의 회로가 더 이상 마력을 끌어 모으지 못했다!
“네, 네놈!! 뭐 하는 놈이냐!”
-콰직!
“커흑!!”
마법사의 안면에 페르난데스의 주먹이 내리 꽂혔다. 거친 힘에, 마법사의 턱이 크게 돌았다. 페르난데스는 단검으로 마법사의 배를 쑤시며 웃었다. 마법사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끈적한 핏물이 흘렀다.
“첼리니. 첼리니. 우린 참 좋은 짝이었어.”
강가의 첼리니. 마인드플레이어. 보름달의 대마녀. 사바트의 여주인. 세상을 불태운 열다섯 악적 중 하나. 전생, 그가 칼름부르크 마법 학회를 이끌던 시절. 그의 가장 절친한 벗 중 하나였다.
그녀의 마법 구현 방식과 버릇, 마력 얽힘의 매듭법까지. 어떤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칼날을 반대로 틀었다.
“커흑···!”
“이렇게 만나서 정말 유감이야. 첼리니. 바르바티아 첼리니 페트라시아.”
“날··· 어떻게 알지? 날 쫓던 잡것들 중 하나였나···?”
“그렇게 생각해.”
-모리아가 온다.
‘남은 시간은?’
-3분 20초.
‘충분해.’
*
키르하스는 정신없이 지붕 위를 뛰어 다니며, 내성을 향해 달렸다. 내성은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성하 3번로는 그 바로 아래에 뻗어 있는 큰 길이었다. 귀족들의 집들이 모여 있는 탓에, 경비를 서는 근위대가 많았다.
‘피 냄새?’
그녀의 예민한 후각에 혈향이 잡혔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지붕 위에 몸을 숙이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소란이 일거나, 근위대가 급히 뛰어가는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 냄새가 3번로의 한 집에서 짙게 풍기고 있었다.
‘아, 옆길로 새면 안 되는데···.’
키르하스는 바이에미어의 저택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 와서 저택들의 정문에 걸린 명패를 하나하나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반쯤 도박하는 심정으로 혈향이 감도는 저택을 향해 몸을 던졌다.
*
바이에미어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저 앉아 있었다. 그는 핏물이 섞인 침을 뱉고는, 뜨거운 입김을 흘렸다. 옆구리를 관통 당했고, 오른팔이 잘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흐릿했다.
-챙그랑!
그의 멍한 귓가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또 누가 내 목숨을 노리고 왔나? 어차피 죽음은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제이른 이 멍청한 자식···.’
모리아. 그 마녀의 손에 기어코 위대한 기사의 나라가 허물어지게 생겼구나. 바이에미어는 눈물을 흘렸다. 제이른은 자신의 제자였다. 녀석의 검술은 아직 충분히 영글지 않았다. 늙고 지친 스승을 이길 정도로는.
“지금 울어요?”
“···그 녀석의 종자냐?”
“많이 다치셨어요.”
침대보를 찢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그의 상처들이 단단하게 감싸졌다. 바이에미어는 흐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제이른의 시체와, 키르하스의 얼굴이 보였다.
“저 기사는 경께서 죽이셨나요?”
“아직 내가 그 정도는 되지.”
“은공···. 알베르트 경께서 모리아가 곧 움직일 테니 조심하라 전해달라 했어요. 이미 늦은 것 같네요.”
“아직이다.”
바이에미어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검을 가리켰다. 키르하스가 조심스럽게 칼을 가져오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네가 챙겨라. 이 검을 들고 왕자 전하를 찾아가. 그 분께, 배신자가 있었다고 전해다오. 왕도를 벗어나 팔리아메인 경을 찾아 가라고. 왕도는 위험하다.”
“모리아와 그 스승이라면 제 주군께서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크. 그 꼬맹이가 참 많이도 자랐구나.”
바이에미어는 큭큭 거리고 웃었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왕궁엔 매장 교단 놈들이 있다. 모리아나, 그 계집의 스승이란 작자도 그저 매장 교단의 조력자에 불과해. 폐하의 뒤에 숨어 있어 지금까진 손을 델 수 없었지만. 이제 곧이었는데.”
“상처를 치료해야 해요. 바이에미어 경. 이대로 두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화살 네 자루 미만까진 상처로 치지도 않았어. 나는 원탁 기사다. 이 꼬마야.”
바이에미어는 힘겹게 일어서서, 절뚝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제이른의 시체에 꽂힌 검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뽑아 올렸다.
“이런 녀석들 셋이 더 와도 나한텐 안 된다. 나는 알트하이스의 대영주, 바이에미어다! 원탁 기사 바이에미어!”
“부디 몸 성히 계시길. 금방 다녀 오겠습니다.”
키르하스는 이 늙은 기사를 향해,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이고는 창문으로 빠져 나갔다. 저택의 계단을 타고,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에미어는 팔을 느슨하게 풀며 속삭였다.
“나는 알트하이스의 바이에미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