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63화 (64/388)

63. 알트베르트, 자정의 기도

*

헬르가 왕자는 무장한 채, 침소를 초조히 거닐었다. 시장의 화재로 왕도를 지키는 근위대들의 이목이 몰렸지만, 이는 오히려 그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애당초 그가 꾸미고 있는 반정의 시작이 이런 종류의 테러리즘이었다. 그는 왕도의 일부분을 불태워 근위병들의 시선을 돌리고, 팔리아메인의 병력을 성내로 들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이제 왕도의 근위병들은 당분간 예민한 경비 수준을 유지할 터였다. 헬르가 왕자는 칼자루를 톡, 톡 두드리며 문을 바라보았다.

“왕자님, 사자가 찾아 왔습니다.”

“누구냐?”

“알베르트 경의 종자라 하는 이가 왔습니다.”

“···? 알베르트 경의? 들라 하라!”

예상하던 손님은 아니지만, 어쨌건 지금 단 한 사람의 정보라도 더 필요한 때였다. 헬르가 왕자는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이에미어의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칼···?”

“바이에미어 경께서 저를 대신 보냈습니다.”

“경은···? 아니, 아니다. 대답하지 마라.”

헬르가 왕자는 영민하고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짧은 순간, 바이에미어의 가보를 들고 있는 키르하스를 보며 모든 진상을 유추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탁상에 앉았다.

“아아···. 바이에미어. 그대는 이리 갈 인물이 아니었소.”

“경께서는 명예롭게 싸우셨습니다.”

“언제나 그랬지.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내 어리석음이 영웅을 죽였구나!”

헬르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그치고 난 후에, 헬르가는 붉게 충혈된 눈을 뜨며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경의 유지를 전하러 왔나?”

“네. 도시를 떠나 팔리아메인 경을 찾아 가라 하셨습니다. 배신자가 있고, 모리아 공주가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있다고···.”

“···그런가”

헬르가 왕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장인이 만든 그의 묵직한 갑옷이 둔중하게 절그럭거렸다. 그는 천천히 깊은 숨을 몰아 호흡을 가다듬고는 눈을 떴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사자처럼 빛났다. 그에게는 사람을 이끄는 마력이 있었다. 천부적인, 영웅의 재능이. 헬르가 왕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키르하스를 내려보았다.

“네 주군은, 알베르트 경은 어디에 있지?”

“모리아 공주와 그녀의 스승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뭐?”

왕자는 크게 당황했다. 수 개월간 추적했던 마녀의 행방을 이렇게 단박에 찾아냈다고? 심지어 모리아 공주를 왕성 밖으로 유인해냈다는 말인가? 왕자는 급히 문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네, 전하!”

곧 근위 기사가 황급히 문을 열고 나타났다. 헬르가 왕자가 쥐고 있던 칼자루를 놓으며 말했다.

“모리아 공주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급히 출타했습니다. 성하 대로에서 근위병들과 함께 떠나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바이에미어 경. 너무 급히 가셨소!”

헬르가 왕자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슬픈 미소가 그려졌다. 절그럭, 그의 무거운 발걸음에 따라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절그럭, 절그럭.

그는 천천히, 묵직한 발걸음을 옮겨 침소의 회랑으로 나섰다. 석주들이 늘어선 회랑엔, 그의 기사들이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절그럭. 열 명 가량의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왕자의 걸음에 따라 한 발자국씩 길을 비켜섰다.

“판.”

“네, 주군.”

잿빛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왕자의 곁에 부복하며 말했다. 왕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내려보았다. 투구의 바이저 아래로 보이는 앳된 얼굴에서, 바이에미어의 눈이 비쳐 보이는 듯 했다.

“알베르트의 종사, 키르하스에게서 그대의 가문검을 받으라.”

“네. 주군.”

“그 길로 팔리아메인 경을 찾아가라. 진군을 명하라.”

“왕가의 명예를.”

“영원한 명예를. 알트하이스의 파프나르메어. 그대를 믿겠다!”

그 말에, 젊은 기사가 잠시 몸을 떨고는 일어섰다. 키르하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를 바라보며 바이에미어의 검을 건넸다.

“그리고 키르하스. 그대 또한 나를 따라 오겠나?”

“···저는 주군께 가겠습니다.”

“그대의 주군에게 내 감사를 전하게.”

키르하스는 헬르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체념한 것처럼도, 각오를 다진 것처럼도 보였다. 그는 몇 차례 칼자루를 쥐었다 놓고는. 곧 고개를 돌려 회랑을 지났다.

절그럭.

그의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키르하스는 잠시 멈춰 서 있다가, 곧장 몸을 돌려 복도를 떠났다. 다음 임무가 내려지기 전까지,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곁을 지켜야 했다.

*

페르난데스는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을 조금씩 꿈틀거렸다. 첼리니의 번개에 당한 뒤부터 오른팔에 감각이 없었다. 그의 머리 뒤에서 불타오르던 검은 헤일로가 천천히 명멸하고, 이윽고 사라졌다.

‘고생했다.’

-재밌었다.

페이자쉬는 킥킥 하고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공포와 경악에 물들어 헐떡이는 모리아를 내려보았다. 그녀는 첼리니의 시체를 끌어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어디의··· 고인이십니까?”

“다시 한 번 말해보지 그래? 기사 따위가 마학의 방대함을 이기어 낼 수는 없다고?”

기사왕의 후예가 하는 말로는 퍽 우습고, 그것을 자신을 향해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가소롭기까지 했다. 페르난데스는 저 멀리 근위병들과 시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모리아의 정치적 입지는 끝이었다.

모리아는 수치심이 치미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페르난데스는 한 자루 남은 단검을 뽑아 손에 쥐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도해라. 마녀.”

“기도···?”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간절히.”

“이단···심문관···!”

모리아는 그제야 페르난데스가 신전 기사나, 편력 기사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어떻게 이단심문관이 흑마법을···.?”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사술을 부렸단 말인가?”

페르난데스는 짐짓 의뭉스럽게 웃었다. 실제로, 전투 내내 삼두육비를 통해 그가 부린 마법이라곤 상대방의 마법을 방해하거나, 파훼하거나,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마법사가 아니라면 결코 눈치챌 수 없다.

검은 헤일로도, 반투명하게 떠올랐던 삼두육비의 영체도. 이 자욱한 불길 속에선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번개를 뿜고 허공에서 불길한 핏빛 창을 뽑아내 집어 던지는 등의 과격한 마법과 비교하자면.

모리아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내가 기도할 때 신들은 무얼 했지?”

“뭐?”

“내가 간구할 때, 그 잘난 만신전의 대신들은 무얼 했느냔 말이야!! 위선자들, 그저 영성을 착취할 뿐, 신앙을 수집할 뿐이면서! 너희 대신들은 악마들과 다를 바 없어!”

모리아는 기사왕의 핏줄을 저주했다.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왕과 왕자, 그리고 그 잘난 원탁 의회의 기사들은 그녀를 마녀 취급하며 무시했다.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그녀를!

“저주하리라. 저주 받으라! 너희 위선자들을 영원히!”

-서겅.

그녀의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칼을, 차가운 단검이 스쳐 지나갔다. 모리아는 어느새 뽑아 든 흑요석 단검을 들고 머리칼을 짧게 올려 쳤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매섭게 노려보며 허공에 머리칼을 뿌렸다.

-화르르륵!

공중에 드리워진 차양처럼, 한 순간 백금색 장막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가 잠시 멈칫한 사이에, 머리칼이 불길에 휩싸이며 타올랐다. 검붉은 불길이 온 사방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너희는 저주 받으리라.

모리아의 원한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난데스는 감탄했다. 과연 마인드플레이어. 첼리니의 제자 다운 마법이었다. 첼리니는 비록 정신계 마법을 펼치기도 전에 그의 손에 쓰러졌지만. 그녀의 제자가 학파의 마법을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둔중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화염이 온 세상을 불사르고 있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서서, 그의 주변을 가득 채우며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스승보다 낫군.’

-영혼을 태웠군. 훌륭한 기개다.

페이자쉬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래, 영혼을 불태워 일으킨 마력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 강력하고 순수한 마법을 부릴 순 없었을 것이다. 짧은 순간이나마 모리아는 그녀 자신의 한계를 넘은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무너지고, 만신전의 이단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점 때문일까? 확실히, 그녀가 이 자리에서 살아나간다 하더라도 그녀에겐 화형대, 아니면 교수대가 준비될 것이었다.

헬르가 왕자라면 이 틈을 놓치지 않겠지. 모리아의 증오와 분노가 절절히 느껴졌다.

-내가 스러지더라도, 너희들의 파멸이 머지 않았다!

모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불길 사이로, 지옥이 보였다. 악마들이 배회하고, 선인의 시체가 장대에 걸리고, 영웅의 유해가 쓰레기처럼 널려 있는 세상이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모리아가 보여주는 환영에 차분하게 웃었다.

-지옥이 다가왔다. 너희의 발 밑에! 너희의 그림자 안에! 너희가 가장 안심하고, 편안하게 잠드는 그 시간에도, 언제나 너희의 곁에!

“아, 그렇더군.”

-···뭐?

한 순간, 환영이 일렁거렸다. 이 어린 마녀가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확실히, 정신계 마법은 위협적이다. 적어도 평범한 기사를 상대한다면. 오히려 눈에 보이는 화려한 마법보다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디모니카의 혈액이 혈관을 타고 맥동하는, 불굴의 성흔이 박힌 그에게 있어서, 정신계 마법은 크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에게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며 위협하다니?

“영웅들이 잠들 때, 성인들이 기도할 때, 현자들이 그들의 골방에 틀어박혀 고서적을 뒤적일 때에도. 지옥은 멈추지 않지. 모든 그림자 속에는 악마가 울부짖는 시대니까.”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하지만 모리아. 용이 말하더군. 이 시대를, 불길의 시대라고.”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환영이 만들어낸 불길 사이로 거침 없이. 청동 왕좌는 기능을 정지했고, 적어도 하루 동안은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실체화된 환영이 그의 손을 달궈,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그는 상처 입은 오른손을 뻗어, 그 안에 있는 존재를 잡고, 쓰다듬었다.

-아···.

“진창에 발을 디디고 서더라도, 하늘이 우릴 이용하고, 땅이 우리를 증오한다 하더라도, 멈춤 없이. 모리아. 슬프고,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홀로 보냈느냐? 그래서 결국 이 세계를 저주하게 되었느냐?”

너보다 먼저 그 길을 밟았던 선배의 입장에서 말하건데. 페르난데스는 잠시 멈췄다. 환영이 천천히 부서져 나갔다. 사그라드는 불길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모리아가 보였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 영혼을 불사르며 마법을 부렸고, 그 백레시로 죽어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후회 뿐이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없느냐? 차라리 너에겐 그것이 축복일 것이다.”

“당신은···. 이단심문관이 아니었군.”

“한때는.”

모리아는 헐떡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독기가 서렸다. 핏물 섞인 침을 한 차례 토해낸 모리아에게 페르난데스가 속삭였다.

“기도 하겠나?”

“누구에게? 너희 만신전의 신들에게?”

“너를 위해서, 너 자신을 향해서.”

“웃겨 정말. 가짜 사제.”

차라리 저주하겠어. 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눈꺼풀 위에 손을 얹고 잠시 멈췄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이번 만큼은.’

그는 모리아의 눈을 감겨준 뒤, 짧게 성호를 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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